다세대 주택에 산다. 채광이 좋고 집주인 인상이 좋아 무턱대고 입주했다. 막상 살고보니 성가신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웃들이 뭣보다 성가시다. 3층에 살지만, 언덕에 세워진 집이라 창문을 열면 눈높이에 골목이 있다. 또 다른 집들이 코앞에 있다. 그 아저씨가 코앞의 집에 산다. 층간 소음이 아니라 집간 소음이 골치다. 주정뱅이 그 아저씨 못지않은 성가신 이웃이 또 있다. 그 아저씨 옆방 사는 그 아줌마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으나 그 아줌마는 틈만 나면 마당에 나와 한숨을 쉬고 넋두리를 한다. 땅이 꺼지는 한숨이고, 천둥치는 넋두리다.
“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가? 그게 우리한테 무슨 이익이 되는가? 무엇보다도 우선, 어떻게 그 요구를 달성할 것인가. 그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그는 서슴없이 덧붙인다. “나를 매혹하지 못하거나 내 감정 생활에 아무런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지 못했다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니,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잘못이다.” 심지어 그는 이렇게까지 주장한다. “낯선 사람은 내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솔직히 고백하면 내 적개심과 증오까지 받아 마땅하다.”
과연 그런가. 그렇다면 다큐멘터리 <춤추는 숲>의 첫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랄 것이다. “서울에 사람 사는 마을이 있다니….” 성석제, 이혁상, 정석, 이 세 사람이 성미산 마을에 부친 편지에도 부러움이 가득하다. <춤추는 숲>에 나오는 선한 사람들은 세상에 없는 별종들인 것일까. 의아하다면, 변성찬의 독립영화비행을 훑어보라. <춤추는 숲>의 성미산 마을이 공동체(共同體)가 아니라 공동체(共動體)라고 그는 말한다. “적/동지라는 쌍이 아니라 제3의 용어로서의 이웃”만이 연대의 보루가 될 것이라는 누군가의 호소를 <춤추는 숲>을 보고 나서야 약간 이해했다.
☞ <춤추는 숲>을 보고 나니 (완성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언젠가 털어놨던)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 후속편이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