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만한 척했고 실제로 자신만만하기도 했었으나 막상 비행기를 타고보니 간이 팍 찌그러들면서 오로지 화장실 갈 때 돈 안 잃어버리게 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 돈이랑 주소 잃어버리면 난 끝이야. 심장 혼자 몸 밖으로 튀어나가 뛰고 있는 듯 마구 두근거리는 박동이 버거워 졸지도 못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제야 제정신이 들면서 두려워졌던 것이다. 파리에서의 초기 생활은 매일같이 외로워 비싼 전화카드 써가며 집에 전화를 자주 해댔는데, 늘 짜증이 머리 끝까지 뻗친 채 끊었다. 그리움에 부풀어 걸어보면 지금 딸이 지구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도 짐작이 안 간 채 오로지 몸 성한지만이 궁금한 엄마는 “뭐 좀 먹었냐, 춥진 않냐, 거기 어디냐” 세 가지 질문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하나마나한 얘기나 더듬거리느라 비싼 통화시간을 다 써버렸던 것이다.
어린 딸이 엄마에게 전하는 소식이란 늘 다 가슴철렁하고 한심한 것들이었다. 엄마 나 오늘 집에 불냈어, 엄마 나 오늘 집에서 쫓겨났어, 엄마 나 오늘 보증금 다 떼였어, 엄마 나 너무 춥고 아픈데 여긴 약국에서 약을 안 판대, 엄마 나 돈 떨어졌어. 세상은 넓고 잘난 사람들은 발에 채일 듯 많고 나는 ‘somebody’이긴커녕 ‘anybody’도 못 되는 ‘nobody’일 뿐이라는 진리를 터득한 채, 그저 먹어댄 탓에 살만 디룩디룩 쪄 돌아온 딸을 엄마는 개선장군 맞듯이 맞았다.
이제 벌써 십수년 전 일인데 엄마는 아직도 그때 일을 후회한다. 내가 미쳤어. 알지도 못하는 곳에 널 혼자 보내다니. 그럼 그때 말리지 그랬어? 니가 꼭 가야 된대서 그럼 꼭 가야 되는 줄 알았지 뭐. 너무 순식간이라서 그냥 놓쳐버렸나봐. 집에 불내고 니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그럼 그때라도 쫓아오지 그랬어? 그런데 말야, 그땐 나도 그런 생각도 미처 안 들고…. 너한테 무지 중요하고 니가 꼭 하고싶었던 일을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서 가슴이 찡했다. 내 자식이 나중에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제발 좀 안 했으면 좋을 일을 하겠다고 나설 때, 예를 들어 비둘기 조련에 평생을 바치겠으니 집 베란다에서 비둘기를 좀 키워야겠다고 한다든가, 병아리 성감별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며 병아리 수백 마리를 방에 풀어놓거나 한다면, 나는 저 아버지처럼, 비록 스스로는 납득이 도저히 안 가더라도, 축복하며 도와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버지에게 발레란, 나한테 비둘기 조련 만큼이나 기절초풍할 일일 텐데.
뒤이어 내 부모님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까지 부모님께 뗀 공수표는 수천장이 넘는다. 외무고시는 그중 좀 괜찮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도 차마 밝힐 수 없는 엄청 부끄러운 것들도 부지기수다. 이거 하겠다고 돈 타내고 저거 하겠다고 타내고, 그때마다 부모님은 도저히 수긍이 안 가 했지만 매번 결국 길을 열어주셨고 비웃고 싶어하는 남들 앞에서 딸의 입장이 되어 옹호를 해주셨다. 그런 게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던 생뚱맞은 것조차도 딸의 선언과 함께 관심을 가지려고 무진장 노력해 관심을 갖게 되고, 그런데 그럴 때쯤이면 딸의 관심은 또다른 기상천외한 것으로 이미 넘어가 있고, 그런 무한순환이었다. 자신은 짐작도 할 수 없는 세계로 떠나보내며 아들을 꼬옥 껴안아 번쩍 들어올리는 빌리 아버지의 낯빛에서 나는 우리 부모님을 보았다. 빌리는 결국 대성공을 했고 나는 많은 돈을 낭비한 채 그냥 보통 아줌마가 됐지만, 결국 그럴 거였다면 왜 그 많은 돈을 써야 했던 건지 나 스스로도 도저히 알 수가 없지만, 부모 입장에서 그 결과는 무엇이 됐건 사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뻔뻔한 생각이 드는 이유는, 고작 왕초보지만 나도 이제 부모가 됐기 때문인 것 같다. 설혹 아이가 정말 비둘기 조련의 길로 나선다고 해도 그것을 진심으로 추구한다면, 먼발치에서나마(비둘기를 도저히 가까이서 쳐다볼 수는 없으므로) 축복해주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슬몃 드는 것이다. 물론 먼훗날의 일이고, 결국 닥치면 비둘기와 엄마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며 게거품을 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오은하/ 대중문화평론가 shimba@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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