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만 하더라도 엘리트 느낌을 물씬 풍겼는데. 인상이 변한 것 같다. 얼굴선도 동글동글해졌고. =그때는 눈빛도 또렷하고 그랬는데. 나이 먹어서 그런가. 요즘엔 자꾸 눈이 처지고 눈 아래 그늘도 지고 그런다.
-감독들과 자주 만난다고 들었다. 대기업에 있을 때와 가장 다른 게 뭔가. =그룹에 있을 때는 말을 편하게 할 수도 없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여유로워지니까 사람 만날 때도 편하다. 얼마 전에 이창동 감독님과 식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멋진 분이다. 모르는 게 없고, 삶의 원칙도 분명한 분이시고. 대기업에 있었다면 그런 면모를 발견할 수 없었을 거다.
-올해 NEW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세운 목표가 있다면. =우리는 사업 계획은 안 짜는 회사인데. 200만명 할 거라고 봤던 영화가 20만명이 되고, 50만명 될 영화가 500만명도 되는 것이 이 산업의 속성이다. 이전엔 올해 매출 얼마 해야 한다, 뭐 그런 게 있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다. 한번도 안 맞는데. 맞지도 않고 맞출 수도 없고. 사실 크리에이티브 영역을 제외하면 영화산업이 과연 개인이 할 만한 비즈니스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다.
-그럼 투자배급사를 차린 건 무슨 이유에서였나. =기본적으로 미디어 사업이 갖는 소통의 즐거움 때문이다. 그 재미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하는 거다. 영화 안 좋아하는 사람 있나. 전에 그룹에 있을 때 사장들 모여서 차 한잔 마시면 누구는 증권 이야기 하고 누구는 새로 출시된 제과 이야기 하고. 그때마다 다들 ‘아, 그래요?’ 하면서 흘려듣는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면 다들 그 영화의 그 장면은 이상한 거 아니냐, 부터 팝콘이 맛이 있네 없네, 까지 모두 한마디씩 한다. 이게 영화의 장점이자 매력 아닐까. 그때는 그런 이야기 들으면 짜증났지만. (웃음)
-대기업에 있을 때와는 영화를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진 것 같다. =어릴 때는 시장에서 1등 하고 싶었지. 경쟁사한테 지기 싫고. 빨리 크고 싶고 돈도 벌고 싶고 폼도 내고 싶고. 지금도 1등 하고 싶은 건 똑같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그 이후에 뭘 하고 싶냐를 생각하게 된다. 사회에 의미있는, 좋은 영화를 많이 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 거지.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103만명 돌파하고 파티를 했는데 이전이라면 100만명 들었다고 잔치하고 좋아했겠나.
-지난해 CJ, 롯데에 이어 국내 배급사별 시장점유율 3위를 기록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12.5%의 점유율을 보였고, 성수기에도 3위를 차지했다. =수치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지난해보다 성장했다는 점은 고무적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만. 내 입장에서 현실적인 문제는 성장을 계속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가다.
-<헬로우 고스트> <그대를 사랑합니다> <블라인드> <가문의 영광4: 가문의 수난> <풍산개> 등을 투자배급해 좋은 흥행 성적을 거뒀다. 이들 영화 모두 제작비가 중소 규모다. 업계에선 NEW의 틈새시장 공략이 주효했다고 하던데. =손해보지 않을 작품을 선택하려고 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바깥에서 볼 때는 다른 회사들에서 투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영화들처럼 볼지 몰라도 내부적으로는 자신있었던 영화들이다. 다행히 결과들이 좋아서 기쁨이 배가 된 거지.
-<헬로우 고스트>는 시나리오를 읽고 하루 만에 결정했다고 하던데. =집에 가서 시나리오를 봤는데 너무 좋았다. 사실 직원들이 시나리오를 건네줄 때 뉘앙스가 조금씩 다르다. 본인들이 좋아하는 거면 씩 웃으면서 집에 가서 읽어보시죠, 그런다. 그게 아니면 같이 회의하자고 하고. 직원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인데 언제부터인가 시각이 많이 비슷해졌다. 나를 포함해서 다들 따뜻한 영화들을 좋아하는 편이고. 그런 영화들이 승률도 더 좋고.
-현장에선 NEW의 강점 중 하나로 결정이 빠르다는 점을 꼽는다. 콘텐츠 확보에 있어 메이저 투자배급사와 경쟁하기 위한 전략처럼 보이기도 한다. =발로 뛰는 것밖에 더 있겠나. 자금이든, 조직이든, 인프라든, 리소스든 대기업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데. 현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남보다 기민하게 뛰고, 의사결정 좀더 빨리 해주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한 제작자는 앞으로 NEW랑 쭉 할 거라고 하더라. 투자배급사가 제작을 겸하는 상황에서, 제작사를 파트너로 삼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남달라 보인다. =대기업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다. 다만 투자배급, 제작, 상영부문까지 다 경험해보니 제작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더라. 구조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한곳에 모아놓으면 시너지가 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대기업 입장에선 시장이 작다보니 한데 뭉쳐서 하려고 하는 것이고 창작자들 입장에선 자본과 인프라의 힘이 세지니까 결국 그렇게 가는 것인데. 창작자들은 그룹 내의 누군가가 내 크리에이티브를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저 시스템이 내 크리에이티브를 인정하게끔 맞춰야 하니까 힘들 테고.
-수직계열화된 대기업 주도의 산업 안에서 NEW가 일정한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는 이들이 많다. =상대적으로 우리가 좀더 편하겠지. 제작사와 소통하고 의견을 반영하는 데 있어 큰 기업보다는 자유로우니까. 그게 NEW의 강점이긴 하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도 그렇고 제작사도 그렇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서로 대안을 찾다 보니 서로의 요구가 맞은 측면도 있다.
-이전에도 중급 규모의 배급사가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극장을 갖지 못해서라고 보는데. =유통에 있어서 극장 인프라가 없다는 건 핸디캡이다. 대기업들이 작품을 가져올 때 극장 인프라를 내미는 경우도 많으니까. 사실 그게 자연스럽다고 본다. 감독이나 제작자들도 이왕이면 그렇게 하는 게 낫다. 하지만 시장은 계속 돌고 도는 거다. 윈도가 많아질수록 인프라의 힘은 떨어진다. 유통 채널이 많아질수록 제작사처럼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쪽이 힘을 더 가질 수밖에 없는 시대가 올 거다. 그때까지 우리도 버텨야 하고, 감독이나 제작자들도 버텨야 한다. 근데 불쌍한 중소기업에 도움되는 질문을 좀 해주면 안되나. (웃음)
-직접 돈을 구하러 다녀보니 어떻던가. =내가 옛날에 이랬는데, 저 사람이 전엔 나한테 안 그랬는데 뭐 그런 생각을 안 할 수는 없지. 다만 중요한 건 팩트인 것 같다. 한때는 왜 좋은 시나리오가 우리한테 안 오냐 뭐 그러기도 했지만 그게 팩트 아닌가. NEW는 개인 회사이고, 작은 회사이고, 더 뛰어야 하는 회사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만 이제 인프라는 없으나 대안적인 배급사로서의 위치까지는 오른 것 같다.
-2009년 ISU-글로벌 콘텐츠 투자조합(200억원)을 시작으로 대략 800억원 규모의 펀드를 결성했다. 지난 3년 동안 안정적인 자금 확보를 위해 애썼는데. =극장을 못 주면서 자본에 대한 불안감까지 안길 수는 없잖은가. 지금은 프로젝트를 운용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처음에는 친한 분들한테 부탁해서 여기서 3억원, 여기서 5억원 이런 식으로 모았다. 욕먹을 이야기지만 사실 첫 한국영화 배급할 때 3억원 넣고 배급했다. 다행히 지금은 넉넉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정도다.
-내년 개봉예정인 <미쓰 GO>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은 제작비가 50억원을 넘나든다. 2013년 라인업에는 대형사극과 전쟁영화가 끼어 있다. =농담삼아 직원들에게 우리도 500만짜리 영화 해보자고 하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거다. 큰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기도 하고. 다만 내년쯤엔 적어도 1편 정도는 메인시장에서 승부를 볼 수 있겠구나 한다. 물론 중요한 건 체력이다. 오버할 생각은 없다. 배급편수도 1년에 16∼20편 정도를 유지할 거다.
-2009년에는 <트와일라잇> 시리즈, <블랙> 등과 같은 외화 위주로 라인업을 짰고, 지난해와 올해는 한국영화 위주로 라인업을 구성한 것 같다. =처음부터 한국영화를 많이 할 수 있었겠나. (웃음) 다만 앞으로 한국영화 위주로 라인업을 꾸리겠다 뭐 그런 건 아니다. 산업의 트렌드에 맞게 작품을 수급하고, 한편한편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지금은 시들해진 통신사 자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애초 목적이 통신 인프라에 얹을 콘텐츠가 필요한 것이었지 투자배급해서 1등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는 거다. 근데 막상 보니까 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한해 300억, 400억원 정도 쓰면 시장에 쉽게 진입할 수도 있고. 그랬는데 막상 와보니 먹을 게 없는 거지. 또 이 과정에서 다른 대기업과 경쟁구도가 되어버렸고. 전략에 미스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배급하지 않고 여러 펀드에 그 자금을 뿌렸다면 애초 목적을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해외팀을 충원한다고 들었다. NEW 입장에서도 해외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을 텐데. =태생적으로 작은 시장의 한계들을 돌파하려면 해외시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우리에게 해외시장은 당면과제가 아니다. 나도 합작해서 내 이름 영어로 올리고 싶지만 안되는 걸 어떻게 하나. (웃음) 사람을 뽑는 건 준비해야 하니까 조금 더 투자하는 정도다.
-쇼박스가 CJ나 롯데와 겨룰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인력 세팅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계 인력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서 수업료를 덜 지불했던 것 아닌가. NEW 역시 가장 큰 자산은 사람과 네트워크일 텐데. =돈은 정말 중요하다. 사람 좋아도 돈 없으면 안된다. (웃음) 대기업에서 일할 때부터 갖고 있었던 원칙이 하나 있다. 개별 구성원의 실력보다 조직 내에서 그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 크리에이티브한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투자배급과 같은 일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사실 이것 때문에 그룹 안에 있을 때 다른 계열사에서 욕도 많이 먹었다. 이만큼 해낼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고 우리 직원들한테 물어보면 다 자기가 잘해서라고 한다. 이게 내가 바라는 NEW다. 누구 하나가 잘했고, 다른 사람들은 들러리 섰다는 식은 싫다. 사실 올해도 영화인들보다 직원들하고 더 많이 놀았다. 만날 술 먹고 밥 먹고 야구 보고. 우리 회사 엥겔지수가 굉장히 높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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