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회 칸영화제 개막일의 가장 거대한 적? 정치적 논쟁도 미학적 논란도 아니다. 올해 영화제의 첫번째 강적은 자연이다. 아이슬란드 화산 분화의 영향으로 올해 영화제는 거의 열리지 못할 뻔 했다. 시커먼 화산재가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스페인과 독일의 일부 공항들이 잠시 문을 닫았다. 영화제 개최 이틀전까지만해도 니스 공항마저 폐쇄될 거란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게다가 영화제를 열흘도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칸 해변에는 6미터가 넘는 쓰나미가 밀려들었다. 큰 돈 들여 설치한 영화제 구조물들이 희생양이 됐다. 일기예보는 영화제 기간 내내 강풍과 뇌우가 작렬할 것이라고 경고하느라 바쁘다.
문제가 어디 자연의 횡포 뿐이랴. 올해 경쟁부문의 영화들이 예년만큼 영화제 객들을 흥분시키지 못한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마이크 리, 기타노 다케시의 이름이 고고하긴 하지만 유명한 거장의 숫자는 압도적으로 적다(유명한 감독과 배우가 없으면 찾아오는 기자의 수도 확연히 줄어든다). 마누엘 데 올리비에라와 장 뤽 고다르, 지아장커 등 칸이 사랑하는 감독들의 신작이 경쟁부문이 아닌 주목할 만한 시선에 이름을 올린 것도 불평을 자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올해 칸이 또다른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는 건 사실이다. 올해 영화제 집행위원회는 확실히 ‘발견’이라는 단어에 힘을 싣고 있는 듯 하다. 영화제 사상 최초로 아프리카 차드의 영화 <울부짖는 남자>(Un Homme Qui Crie)와 우크라이나 영화 <나의 기쁨>(Schastye Moe)가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하녀>의 임상수 역시 처음으로 경쟁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경쟁부문 스무편 중 거의 절반이 경쟁부문에 처음으로 진출하는 감독의 영화다. 프랑스 잡지 <텔레라마>는 "올해 영화제의 선점권은 경쟁부문의 단골들이 아니라 아주 특별하지는 않은 미지의 감독들에게 주어져있는 듯 하다"고 말한다. "그들 역시 매혹적인 감독들이다. 그래서 약간 혼란스럽기도 하고, 약간 경계심이 일기도 한다"
국가적으로 보자면 프랑스 영화의 우세와 미국 영화의 몰락이 두드러진다. 프랑스는 무려 네 편의 영화를 경쟁부문에 올렸다. 베르트랑 타베르니와 자비에 보부아는 <몽펭지에 공주>(La Princesse de Montpensier)와 <사람들과 신들>(Des Hommes et des Dieux)로 오랜만에 칸에 복귀했다. <잠수종과 나비>로 유명한 프랑스 배우 마티유 아말릭이 <순회공연>(Tournee)으로 경쟁부문에 진출한 건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면 지난 몇년간 경쟁부문을 장악해 온 미국 영화는 단 한편 뿐이다. 그것도 순수한 상업적 오락영화를 만드는 덕 라이먼의 <페어게임>이다.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에 따르면 테렌스 말릭과 구스 반 산트의 신작은 영화제 직전까지 완성을 보지못해 결국 경쟁부문 진출에 실패했다고 한다. <르몽드>에 따르면 줄리앙 슈나벨의 <미랄>(Miral)은 비경쟁부문 출품 제안을 거부했고, 소피아 코플라의 <어딘가에>(Somewhere)는 이미 베니스가 선점해버렸다. 어쨌거나 다들 덕 라이먼의 경쟁 진출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상태인 와중에 젊은 필진으로 물갈이 된 <카이에 뒤 시네마>는 쌍수들고 환영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선택인가. 그는 유일하게 순도 100%의 좋은 미국영화를 세 편 연속으로 만든 감독 아닌가"
시대가 하수상한 만큼 정치적인 논쟁도 거세다. 이탈리아 베를루스쿠니 정부는 비경쟁부문에 초청된 <드라퀼라>(Draquila)가 "이탈리아 민중과 진실에 반하는 프로파간다"라며 항의를 하다못해 이탈리아 문화부 장관이 칸 방문을 보이콧 하기로 했다. 물론 <드라퀼라>는 작년 4월 아퀼라 지진에서 불거진 베를루스쿠니 정부의 비리를 파헤치는 ‘이탈리아 민중과 진실에 협력하는 좋은 영화’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경쟁부문에 진출한 라시드 부샤렙의 <법의 외곽>(Hors La Loi)은 프랑스 극우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다. 1942년 알제리인 2만여명이 프랑스 경찰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탓이다. <르 피가로>를 비롯한 극우 신문들은 부샤렙의 영화가 살해당한 28명의 프랑스인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며 항의하는 중이다. 영화가 공개되는 날 극우 단체의 항의 시위가 열린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니키타 미할코프의 <위선의 태양 2>도 논쟁의 불꽃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다. 러시아 영화감독 협회는 극단주의적인 푸틴주의자인 미할코프가 그간 러시아 정부지원금의 분배권을 독점해왔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고, 프랑스 언론들은 이 영화가 스탈린을 새롭게 복권하려는 푸틴의 야망을 지원하는 영화라며 연신 폭격중이다.
전통적인 영화 배급 방식의 해체 역시 올해 칸영화제의 논쟁거리 중 하나다. <리베라시옹>에 따르면 올리비에 아싸야스의 <카를로스>(Carlos)와 장 뤽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Film Socialisme)이 경쟁부문에서 탈락한 이유는 두 영화가 기존의 관습과는 전혀 다른 상영과 배급 방식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아싸야스의 신작은 이미 프랑스 채널 <카날 플러스>에서 방영을 시작한 5시간30분짜리 TV 시리즈다. 고다르의 신작은 영화제가 시작하자마자 VOD 서비스로 단돈 7유로에 다운로드가 가능해졌다. 경쟁부문 진출이 유력했던 두 작품은 결국 전통적인 상영과 배급 방식을 지지하는 영화제 이사회의 반대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미디어의 진화에 재빨리 적응하길 거부하는 칸의 보수주의가 화산처럼 분출한 사례라고 해야할까.
한국 영화 역시 올해는 뜨거운 칸의 뜨거운 감자다. 이창동의 <시>와 임상수의 <하녀>가 경쟁부문에, 홍상수의 <하하하>가 주목할만한 시선에, 그리고 김기덕 조감독 출신인 장철수 감독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 비평가주간에 초청됐다. 물론 모두가 (궁금해하지 않는 척 짐짓 점잔을 떨면서도) 궁금해하는 건 이창동과 임상수 중 누가 트로피를 손에 들고 ‘merci beaucoup’를 외치는가다. 황금종려상의 행방이 심사위원장의 개인적인 성향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는 걸 생각하며 팀 버튼의 속내를 궁리하더라도 마땅한 정답은 없다. 만드는 영화와 좋아하는 영화는 다르게 마련이다. 1999년도 심사위원장이었던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에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안겼던 사례를 떠올려보자.
<카이에 뒤 시네마>의 젊은 편집장 스테판 들로름은 칸 특별호 에디토리얼에 이렇게 썼다. "매년 모두가 투덜댄다. 올해 칸은 정말 셀렉션이 별로라고. 하지만, 매년 그 해 최고의 영화는 결국 칸에서 나온다". 더욱 중요한 건 이거다. 올해 최고의 영화는 칸에서 나올테지만, 그건 아마도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새로운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것. 화산재와 저온과 빗방울을 뚫고 칸에 도착한 올해 최고의 영화는, 지금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
심사위원장 팀 버튼 기자회견
심사위원장인 팀버튼 감독(오른쪽)과 심사위원인 배우 케이트 베킨세일(왼쪽)
“올해는 유명 감독들이 모두 시나리오 집필 중이거나 촬영 중이다.”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의 발언은 푸념이 아니다. 개막작 감독인 리들리 스콧까지 무릎수술을 이유로 불참했다. 말 그대로 스타가 부족한 해다. 심사위원장으로 참석한 팀 버튼 감독이 간판 역할까지 이중으로 해내야 할 판이다. 팀 버튼 감독을 비롯 배우 케이트 베킨세일, 베네치오 델 토로, 평론가 알베르토 바베라, 에마누엘 카레르, 영화음악가 알렉산더 데스플레, 인도 감독 세크하르 카프루 등 8명의 심사위원단이 참석한 심사위원 기자회견장이 예년보다 관심을 모은 이유도 여기 있다. 이들은 개막일인 12일부터 오는 23일까지 총 19편의 경쟁작을 평가한다. 12일 낮 열린 기자회견에서 팀 버튼 감독의 답변을 들어보았다. 이화정
-심사위원단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린 전문가이고 모두가 평가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고 작품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작품을 보고 그 작품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교감을 주는지, 그것들에 대해서 토론하고 합의를 보길 원한다. 이번 영화제의 심사위원단이 모두 다른 문화와 나라에서 온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흥미롭게 생각한다. 작품을 즐기고, 토론할 것이다.
-화제작이 예년보다 없는 편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영화를 보러갔을 때 난 그 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갔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영화에 대해서 모든 걸 다 안다. 제작비는 얼마고, 어떻게 만들어 졌고 등등. 그런데 모르고 볼 때 그게 더 놀랍다고 생각한다. 경쟁부문의 작품들은, 우리가 아는 감독들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은 감독들도 있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목표를 향해, 우린 일종의 의무감으로 함께 이 여행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여행에서 놀라운 발견을, 새롭게 떠오르는 작품들을 발견 하길 바란다.
-심사위원으로 초청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정치적 이유로 수감 중이다. 상징적인 의미로 심사위원 석 한 자리를 비어두었다. 그의 석방이나 구속 중인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석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당연히 석방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 표현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일생에 걸쳐 우린 모두 그걸 위해 싸운다. 당연히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걸 표현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