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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월의 외로워 말아요 눈물을 닦아요] 극장을 좋아할 것 같아…
김사월 2025-08-28

언뜻 평범한 외관의 대형 쇼핑몰이지만 조금만 유심히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건물 안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영업 중인 상가도 드나드는 사람도 없이 오랜 시간 방치되고 있는 모습인데요, 그 앞 넓은 부지는 이내 스케이트보드를 연습하는 젊은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건전한 청년들임을 알고 있습니다만 어둑한 밤에 여기를 지날 때면 어쩐지 몸이 움츠러드는 기분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어 참으로 유감스럽지만, 이 건물 꼭대기 층에는 그야말로 유령 산장 같은 영화관이 하나 있습니다. 이미 귀신 나오는 곳으로 유명하더라고요. 인터넷 검색창에 이곳의 이름을 입력하면 ‘귀신’이 자동 완성으로 따라붙습니다. 귀신 목격담은 대충 이런 느낌입니다. 아르바이트생이 상영 준비를 위해 빈 상영관에 들어갔는데 제일 앞 열 좌석에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거나, 엘리베이터 정원은 분명 20명인데 대여섯명이 탔는데도 정원초과 벨이 울렸다거나…. 제가 초등학생 때 유행하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수준의 괴담을 보니 추측건대 영화관 귀신 녀석은 저랑 연배가 비슷할 것 같습니다. 그러다 문득 흥미로운 댓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귀신들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렸다가 한꺼번에 빠지는 곳을 좋아한대. 예를 들자면 극장, 놀이공원, 학교 같은 곳.”

그렇다면 귀신은 지금도 영화관을 좋아해줄까요? 손님 없는 극장에서 ‘언젠가는 다시 북적이겠지’ 하며 여느 자영업자들처럼 버티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러다 지쳐서 그만 파수꾼 자리를 스케이트보드 친구들에게 맡긴 건지도 모르겠네요. 관객들에게도 귀신들에게도 인기가 없을 걸 생각하니 이거 좀 안쓰럽게 느껴져서 저는 가끔 그 영화관을 찾습니다. 대부분 텅 비어 있기 때문에 현장에서 티켓 구매를 해도 마음에 드는 좌석을 고를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요, 역시나 앞뒤 양옆에 사람이 없으니 팝콘을 우걱우걱 먹을 수도 있습니다. 으스스한 이곳의 정취를 이용해서 귀신영화를 보는 하드코어 관객들도 종종 있다고 하네요. 저도 여기서 <씨너스: 죄인들>을 봤는데 아이맥스는 아니었지만 다른 의미로 몰입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유령 산장보다 제가 좀더 자주 찾는 영화관은 서울아트시네마라는 시네마테크입니다. 여기도 귀신들의 성에 찰 정도로 사람들이 붐비는 곳은 아닙니다만, 가끔 두줄에 한명 정도로는 아늑하게 관객이 차기도 합니다. 저 같은 경우 일반 극장이나 OTT에서 만나기 어려운 영화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서 이곳을 찾습니다. 게다가 관객회원으로 연회비를 내면 평소 6천원에 티켓을 살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본질적으로는 가격이 비슷하겠지만 왠지 나만 저렴하게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들어서 좋아합니다. 최근에는 <오징어 노동조합>이 상영되길래 신이 나서 이곳을 찾았습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초창기 영화인데요, 이 영화를 완성한 뒤 감독은 스스로 부족한 점이 보인다며 낙담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감독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그가 아쉽다고 여긴 부분을 상상하는 것조차 즐거운 일입니다. 아마 이 영화에서도 사람들은 노동하다 쫓겨나고 빈털터리가 되어 무언가를 찾다가 인생이 담긴 듯한 구슬픈 노랫말을 무표정하게 듣고 있겠지요. 제가 사랑한 그의 다른 영화들처럼요. 극장에서 마실 커피의 얼음 소리를 찰랑찰랑 내며 걷습니다. 마치 오랜만에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러 온 듯한 마음으로 좌석에 앉습니다. 드문드문 채워진 객석을 보며 이 시간에 이런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상상합니다. 이내 암전이 되어 저는 잠깐 눈을 감고 숨을 크게 쉬며 영화관의 먼지 냄새를 맡았습니다.

최근에 정부에서 발급한 영화 할인쿠폰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 영화관 예매 사이트가 순간적으로 마비되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잠시나마 사람들이 영화관을 더 많이 찾게 될까요? 유령 산장의 귀신들도 드디어 잠에서 깨어나 상영관과 엘리베이터에서 장난을 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 세상에는 영화관 말고도 재미있는 곳이 많아서 사람들이 굳이 영화관에 올 이유가 많지 않다는 것을요. 이건 제가 속해 있는 음악 업계와도 닮았습니다. 잘되는 곳은 이전보다 더 큰 성취를 이루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곳은 전반적으로 관객을, 청자를, 독자를 모시기 어려운 그런 분위기입니다. 겉으로는 알 수 없을 안쪽의 어딘가가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런 저도 할인쿠폰을 야무지게 챙겼습니다. 게다가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 할인도 있어서 이 두 가지 혜택을 합치면 영화를 천원에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특수를 이용해 소마이 신지의 <이사>를 예매하고자 인터넷에 접속했습니다. 그런데 맙소사…. 그 극장의 가장 큰 관인 1관에는 예매 가능한 좌석이 두어개밖에 남지 않았더라고요. 내 공연도 아닌데, 내 영화도 아닌데 한두알 남은 포도알이 왜 감동적인 걸까요. 그날 그렇게 붐비는 씨네큐브는 처음이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앉을자리도 꽉 차서 많은 관객이 장내를 서성이고 있었고요, 입장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길게 줄을 늘어섰습니다. 극장에서는 영화가 웃기면 웃는 소리가 났고 울리면 우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날 1관에 앉은 수많은 사람은 다 함께 주인공 렌의 집에 갔다가, 비를 맞았다가, 불꽃놀이를 봤다가, 그 아이의 어린 시절 기억이 바다 위에서 불타 없어지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티셔츠 위에 눈물 자국을 묻힌 채 멍하니 엔딩크레딧까지 보고 나니 관객들이 슬슬 퇴장하기 시작합니다. 과연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렸다가 한꺼번에 빠지는 광경이었습니다. 생각했습니다. “내가 귀신이라도 극장을 좋아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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