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REC) 버튼을 누르는 순간, 카메라는 매번 알려준다. 만물은 단 한번도 고정된 채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한다는 것을. 인간의 머리와 눈이 세상을 고정해 바라볼 때 카메라는 변화 그 자체만을 담아낸다. 영화가 해야 할 일은 이 변화하는 세상의 풍경을 카메라라는 기계로 포착하는 것이다. 변하지 않음을 바라는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이 변해야만 살 수 있는 인간과 비인간을 향해 우리는 카메라를 들고 렉 버튼을 누른다.
최근 전주국제영화제(이하 전주영화제) 폐막작 <기계의 나라에서>를 둘러싼 연출 크레딧 배제 논란은 한국 독립다큐멘터리 영화판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이 논란은 지금까지 우리가 제대로 질문하지 않았던 한국 다큐멘터리의 이미지 미학은 무엇이며, 한국 독립다큐멘터리 창작자들의 윤리성은 어디에 있는가를 정면으로 묻는다. 영화제 상영 이후 불거진 연출 제작자와 기존 감독 사이의 논쟁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다큐멘터리 창작자의 윤리성이다. 전주영화제는 이 작품의 미학이 폐막작 선정의 기준이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전주영화제가 바라본 미학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카메라는 정직하다. 그러나 카메라와 편집은 결국 창작자가 가진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작품의 주제와 창작자의 욕망은 별개처럼 보이지만, 작품 자체에 그 괴리가 드러날 때가 많다. 대상과 카메라의 거리, 숏의 사이즈, 편집 컷의 물리적 시간. 컷과 컷, 액션 컷과 리액션 컷의 배치에 의한 몽타주를 통해 창작자의 내적 욕망이 다큐멘터리 표면 위에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기계의 나라에서>의 제작자이자 크레딧 감독은 “다큐멘터리는 현실로부터 간절히 발화하고 싶은 욕구를 발견하는 데서 시작되고, 자신이 느낀 감정과 사유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려는 욕망으로 만들어진다”라고 말한다. 또한 제작자의 기획 구성안을 감독이 따르지 않고 1년의 제작 기간이 3년 이상 걸린 부분이 기존 감독을 크레딧에서 배제한 사유 중 하나라고 했다. 다큐멘터리는 과연 창작자의 생각을 공유하고 싶은 욕망과 발화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는 것일까? 극영화보다 더 우연의 산물인 다큐멘터리의 결과물은 예견하여도 매번 그 예상을 빗나간다. 무엇 하나 고정해선 안된다. 나의 욕망을 투영하고 욕구를 드러낼수록 우연은 사라진다. 나의 욕망과 욕구보다 세상이 더 빠르게 예측할 수 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큰 틀의 구성이 아닌 구상을 하고, 현장에서 만나는 우연들을 하나씩 발견하며 매 순간 다시 작품을 구성하고 그 구성을 허문다. 수많은 구성안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며, 작업 자체가 변화의 결과물을 증명하는 방식이 바로 다큐멘터리다. 이는 사전에 철저히 기획되고 구성된 다큐멘터리에서도 마찬가지다. 구성의 수립과 소실, 영화 시간의 변화, 그리고 우연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카메라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기다림의 미학, 그리고 윤리
다큐멘터리의 미학은 기다림과 직결된다. 그 기다림의 형식이 이미지의 미학으로 표현된다. 기다림의 시간은 대상과의 관계성을 형성하며 다큐멘터리 창작자의 태도와 윤리성으로 연결된다. 다큐멘터리에서 창작자의 윤리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카메라와 대상간의 거리다. 대상과 맺은 관계의 깊이가 시간으로 이미지 표면 위에 나타난다.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시간은 카메라와 대상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만들어낸다. 관계의 시간이 적으면 대상이 카메라를 피하거나 카메라가 자연스럽게 대상에서 멀어진다. 대상과의 축적된 시간이 길수록 카메라는 대상과의 거리에서 자유로워진다. 창작자가 그 자유로운 거리감을 획득하고 선택하는지가 다큐멘터리의 이미지 미학이며, 대상에 대한 창작자의 윤리성이다. 이동우 감독의 <노후 대책 없다> <셀프-포트레이트 2020> 속 카메라는 대상과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에 선다.
1~2년으로는 도저히 다가설 수 없는 카메라와 대상간의 거리감으로 다큐멘터리의 진정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라브 디아스의 <폭풍의 아이들, 1권>에서 카메라는 멀리 떨어져 관조한다. 감독은 필리핀 태풍으로 초토화된 지역으로 향하지만 곧장 카메라를 들지 않는다. 1년여의 충실한 취재 뒤 대상과 관계를 맺고 나서야 카메라를 들지만 카메라는 대상에 함부로 다가서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되고 1시간40분이 지나서야 카메라는 대상 앞에 가까이 다가서 질문한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카메라는 공간과 관계를 맺는다. 인간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다이렉트 시네마이지만 카메라가 공간과의 관계 맺음에서는 시네마베리테에 가깝다. 공간과의 관계 맺음, 그리고 그 안에 인물들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에 카메라가 서 있다. 오가와 신스케는 <산리즈카> 7부작을 통해 카메라와 대상간의 거리가 사라진 곳에서 이미지의 발견을 넘어, 카메라 자체가 사라지게 만든다. 나리타 공항 건설로 땅을 빼앗긴 농민들 앞에 창작자는 사라지고 산리즈카와 주민들만 남는다. <기계의 나라에서>의 제작자는 조사와 취재, 섭외를 끝내고 작품의 기획과 구성 후 감독을 현장으로 보냈다고 한다. 감독이 첫날 현장에서 만난 네팔 노동자들은 하루만 촬영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김미례 감독의 <열 개의 우물> 촬영을 돌이켜본다. 김미례 감독은 내가 촬영자로 현장에 가기 1~2주 전부터 인터뷰 대상자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다음에 올 촬영 스태프에 대한 설명을 미리 해준다. 물론 그 대상들을 촬영하기 오래전부터 김미례 감독은 대상들과 관계를 쌓아놓고 촬영을 결정한다. 촬영 당일엔 아침 일찍부터 낯선 촬영 스태프와 영화 속 주인공들을 만나게 하지 않는다. 이른 점심, 촬영지 근처 식당에 함께 모여 먼저 밥을 먹는다. 식사하며 자연스럽게 촬영 스태프와 다큐 주인공들이 관계를 쌓을 시간을 충분히 갖게 한다.
왕빙 역시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에서 어렵게 얻어낸 3개월간의 정신병원 촬영을 서두르지 않는다. 일주일 동안 환자들 사이에서 하루 종일 자거나 앉아 바라만 본다. 대상들의 위치에 직접 감독이 서 본 뒤에야 카메라를 돌린다. 이처럼 다큐멘터리는 대상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극영화가 과정보다 결과에 집중한 기록이라면 다큐멘터리는 결과와 과정이 동시에 기록되어 과정 자체가 결과가 되고 결과 자체가 과정이 된다. 과정과 결과가 크리스털 이미지처럼 구분 불가능한 특징을 갖는다.
<기계의 나라에서>의 프로듀서가 주장하듯 감독이 다큐멘터리 내 대상들과 관계성을 쌓지 않는 작품들도 물론 많다. 파운드 푸티지 다큐멘터리들이 대표적이겠지만 그 창작자들은 물질과 관계 맺기 위해 애쓴다. 아카이빙 푸티지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김경만 감독의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제주 4·3 피해자들과 관계성을 맺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자리를 지키며, ‘증언할 수 없음’ 그 자체를 카메라로 증언한다. 와이드렌즈로 4·3 피해자들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카메라는 방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인터뷰 전 피해자들을 만나며 관계를 쌓기 위한 노력의 흔적도 프레임 안에는 없다. 카메라는 오히려 무감하게 바라보는 제주의 자연을 더 잘 담아내려 한다. 4·3 피해자들의 ‘증언할 수 없음’ 그 자체를, 제주 자연 풍경과 그 안 돌들의 이미지로 드러낸다. 돌들과 자연은 말하지만 인간은 듣지 못한다. 아니, 듣지 않으려 한다. 인간들의 폭력적인 역사 속에서도 생존자가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지 않음을 피해자가 아닌 제주의 자연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름 없는 남자>에서 왕빙의 카메라엔 대상과 친밀함을 느끼는 단 하나의 숏도 존재하지 않지만 카메라는 항상 말 없는 대상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 작품은 겨울에서 시작해 사계절을 지나 다시 겨울에서 끝난다. 영화 안 시간은 1년처럼 보이지만 실제 촬영 기간은 2006년에 시작해 2009년에 완성했다. 이강현 감독의 <파산의 기술>도 아카이빙 이미지를 적극 활용한다. IMF 10년 뒤 기업을 살리기 위해 국민을 파산으로 내몬 한국 자본의 민낯을 아카이빙 자료들을 활용한다. 대상과는 관계 맺지 않지만 카메라를 든 감독은 항상 현장에 있다.
몸짓의 기록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시영화를 분석하며, 몸짓은 ‘사회적인’ 감정의 전달체라고 말한다. 카메라는 대상의 몸짓 그 자체를 그대로 기록한다. 다큐멘터리에서 대상의 몸짓 너머 카메라 뒤에는 다큐멘터리의 창작자가 가장 먼저 그 감정을 받는다. 몸짓이 전달한 사회적 감정과 카메라 뒤 창작자, 그리고 카메라가 만나는 지점에 다큐멘터리가 서 있다. 창작자가 미리 예견하고 예단한 곳에 대상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창작자가 자신을 내려놓고 타자로 향할 때 카메라는 타자의 몸짓을 기록할 수 있다.
그때서야 창작자는 사회적 감정에 반응할 수 있다. 왕빙의 <이름 없는 남자>는 중국 사회 농민공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름 없는 남자의 몸짓을 통해 어떤 것도 규정할 수 없고, 미루어 판단할 수 없다. 고정할수록 미끄러져 나가는 이름 없는 남자 앞에서 고정된 부끄러운 나의 신체를 마주하는 풍경의 기록이다. 왕빙은 자신의 유일한 능력은 삶을 관찰하는 것이고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왕빙이 지닌 다큐멘터리 창작자로서의 윤리성과 이미지 미학을 보여준다. 대상에 대한 왕빙의 관찰과 공감은 머리가 아닌 몸짓으로 찍고, 대상에 대한 몸짓을 몸과 몸으로 만나 연결할 때 가능하다.
파솔리니가 추구한 시적 영화, 다큐멘터리의 언어는 몸짓의 언어다. 현대 민중이 시를 짓는 일은 사회적 지옥 속에서 지점, 지대, 시선, 신체, 아름다움이 살아나는 몸짓을 응시하는 일이다. 랑시에르가 고문서 보관소에서 발견한 바닥 깎는 노동자 고니의 편지는, 낮에는 저임금 노동을 하고 밤에는 시를 지으며 철학을 논했던 19세기 노동자들의 가장 정치적인 몸짓이었다.
<기계의 나라에서> 속 한국에 온 네팔 노동자들이 시를 짓는 행위는 분명 몸짓의 언어다. 하지만 몸짓을 그대로 기록한다고 해서 ‘사회적인’ 감정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납품 기한을 정해놓은 뒤, 소수자와 타자란 이름을 덧씌운 그들을 나의 책상 앞으로 부르는 것은 창작자의 머리를 기록하는 것이지, 소수자와 타자의 몸짓을 기록하는 것은 아니다. 창작자의 머리보다 카메라가 더 정직하다. 머리로 만든 다큐멘터리를 머리로 함께 보는 영화제들은 대상과 카메라의 몸짓, 대상과의 관계를 감각하지 못한다. 영화 다큐멘터리의 미학은 창작자의 윤리성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에서의 ‘미학’은 이 사회의 어떤 소수자를 소재로 하고 있는지 아닌지로 판단되는 듯하다. 랑시에르가 <프롤레타리아의 밤> 에서 발견한 것은 자본에 의해 낮의 시간을 박탈당한 노동자들의 시 쓰기였다. 내일 다시 자본에 복무하기 위한 늦은 밤의 휴식 시간에 시를 지으며 자본이 규정한 시간의 위치를 전복하는 정치적인 무대의 자리 옮김이었다. <기계의 나라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의 정치적 무대의 자리 옮김인가, 아니면 제작자와 영화제 자신들의 정치적 자리를 지키기 위함인가.
묻지 않는 질문들: 미학 없는 지원, 윤리 없는 산업
국내 영화제에서 가장 많이 상영되는 다큐멘터리의 감독은 왕빙과 제임스 베닝일 듯싶다. 왜 한국 다큐멘터리계에는 왕빙이나 제임스 베닝 같은 감독이 나오지 않을까? 이에 관해 영화제와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의 미학과 다큐멘터리 창작자의 윤리성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져보았는지 궁금하다. 다큐멘터리영화에서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창작자의 머릿속이 아니다. 카메라가 향한 타자들. 그 타자들의 몸짓을 카메라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서 있는가다. 다큐멘터리영화는 책상에 앉아서 조사하고 취재하고 생각한 것들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카메라를 든 창작자가 자기의 몸으로 대상의 몸짓과 만났을 때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우연적 이미지들의 결과다. 고정하려 해도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벗어나는 이미지들을 몸으로 포착하고 만나는 것이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의 미학이 아닐까? 2000년대 초, 펑크와 풍자의 에너지로 한국 사회를 뒤집던 최진성 감독의 <뻑큐멘터리-박통진리교>(2001), 변증법적 사운드와 이질적 몽타주로 한국 다큐멘터리의 미학적 혁신을 이뤄낸 이강현 감독의 <파산의 기술>(2006), 관조와 기다림으로 디지털시네마의 정수를 보여준 정재훈 감독의 <호수길>(2009) 등 뜨겁고 자유로웠던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방송다큐멘터리식 기획 구성’이라는 단어가 유령처럼 떠돌기 시작했고, 그 무렵부터 <기계의 나라에서> 로 논란이 된 제작자의 이름도 듣게 되었다. 이쯤부터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이미지 미학에 관한 질문이 사라졌다.
<기계의 나라에서>는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안에 얼마 되지 않는 제작 지원금을 세곳 이상에서 받았다고 한다. 그 지원금을 받기 위한 노력은 대단하고, 제작자로서 능력은 놀랍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독립다큐멘터리 제작 지원금을 ‘나눠 먹기’하는 한국의 제작 현실에서, 한 작품이 지원금을 독식하고 제작자가 그 지원금으로 ‘제작자-고용 감독’이라는 위계를 내세우는 것이 옳은지는 의문이다.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면서 그 지원금으로 다큐 방송 프로덕션처럼 연출자를 고용하고, 연출자는 그 고용을 받아들이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과연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창작자로서의 존엄과 노동의 정당성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는지 묻게 된다. 독립영화 안에서도 지원금을 받은 원청이 있고, 그것을 받아 촬영 업무를 수행하는 하청 감독이 있어야 하는 걸까. 산업 자본에서 고용된 독립다큐멘터리 연출자가 자신의 노동자성을 정당하게 요구하는 일이 이 생태계에 어떤 의미인지를 이번 크레딧 논쟁이 분명히 보여준다. 주변 독립다큐멘터리 영화감독들이 제작 지원을 받지 못한 채 펜션에서 청소하고 일용직 일을 하며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이번 논란은 한국 독립다큐멘터리 창작 환경의 구조적 문제를 더욱 여실히 드러낸다. 영화진흥위원회의 2025년 하반기 독립예술영화 제작 지원 다큐멘터리 부문 최종 심사위원 7명 중에는 다큐멘터리 관련 창작자나 평론가가 단 한명도 없다. 두명의 극영화 감독과 세명의 제작 프로듀서, 배급과 영화제 관계자가 각각 한명씩 있다. 15줄의 유난히 짧은 심사평에는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단어가 단 하나도 없다. 한국의 많은 영화제와 영화진흥위원회, 독립다큐멘터리 신, 독립 영화인들 모두가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이미지 미학적 고민이나 반성 없이 서로의 정치적 올바름에만 만족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가장 정치적인 영화를 추구했던 파솔리니는 추상화를 두고 갈등을 표현하지 않고, 모순을 숨기는 예술이라고 평했다. 추상화가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이라는 자기 목적적인 예술이라며 비판한 것이다.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소수성이란 이름으로 ‘소재’만을 소비하거나, 혹은 ‘독립’이라는 형식적 틀에 갇혀 자기 만족적인 예술로 흘러가는 것을 경계한다. ‘몸짓의 언어’를 외면하지 않는, 진정으로 ‘정치적인’ 영화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국의 독립다큐멘터리가 더는 파솔리니가 말했던 추상화가 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