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좋았던 과거가 아니라 나쁜 오늘의 것들에서 시작해야 한다.” 브레히트의 경구가 말해주듯이, 과거의 실천을 미화하는 충동을 예방하는 것은 동시대를 사유하기 위한 전제 조건 중 하나다. 그러나 수많은 ‘리부트’들이 암시하는 것처럼 과거를 통한 마취 없이 오늘날을 대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좋았던 것들이 과거에 있다는 식의 향수 어린 진단은 무엇보다도 영화의 존재론적 곤경을 설명하는 말에 곧잘 들어맞는다. 영화는 필름이라는 지지체를 잃었고,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무성영화의 가능성을 잃었다. 자주영화의 활기를 잃었고, 극장의 소동과 불온함, 미숙함, 소음, 합치되지 않음, 파솔리니식의 시적 현실을 잃었다. 오늘에 주어진 것은 매끈한 표면의 디바이스와 노이즈캔슬링이다. 거대 이야기가 해체되고 기댈 수 있는 상징과 가치의 모델이 사라진 자리에는 스스로도 무엇인지 모를 무언가를 회복하려 하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켜켜이 쌓아올려지는 무력감이 남아 있다. 이것은 멀리서 어렴풋이 감지되는 미래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 바로 뒤에 바싹 붙어 있는 풍경”(이미래, <미래의 고향>)이다.
‘자기’를 구성하는 작업에 대하여
‘나쁜 오늘의 것들’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불안, 일시적인 것에 대한 불신과 모순이라면, ‘동시대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동시대 영화란 불안과 모순을 깔끔하게 말소해버리는 신화의 영화가 아니라, 나쁜 것들과 직면하면서 그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올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내력을 기르게끔 하는 면역의 영화일 수밖에 없다. 동시대 영화라는 말이 주는 이상한 무력감의 정체는 바로 이 때문이다. 영화가 특정한 시대상이나 담론을 묘사하거나 재현함으로써 동시대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동시대성에 관한 가장 큰 오해다. 매스컴과 미디어에서 반복해서 떠오르는 소재나 증상에 대한 묘사로 ‘지금’을 대체하려는 시도는 단일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뿐, 개인과 사회 사이의 불화와 그 구조를 고발하지 못한다. 시대라는 공통의 네트워크가 있고 그것의 표면을 드러내기만 하면 시대가 구현된다는 안일한 믿음으로는 동시대를 사유할 수 없다. 오히려 오늘날 영화가 발굴해야 할 장소는 시대가 아니라 시대의 부산물로 여겨진 무수한 ‘자기’들이다.
장프랑수아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포스트모던의 사회에서는 자기가 결코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자기는 다양한 메시지들이 교차하는 장소라고 설명한다. 자기는 타인과의 대화에서 스스로를 수화자, 발화자, 수신 대상으로 위치시키는 메시지들에 대해 결코 무력하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사적인 고백을 자기 언어로 발화하는 에세이 장르뿐 아니라 관찰다큐멘터리처럼 듣기와 보기를 수단으로 한 제작 방식 또한 자기를 구성하는 작업과 떼어낼 수 없게 된다. 관련하여 흥미롭게 여기는 사례 중 하나는 양지훈의 다큐멘터리 <포수>다. <포수>는 4·3사건의 피해자였던 할아버지를 인터뷰하며 증언과 경험을 수집한다. 여러 차례 인터뷰가 이어지고, 어느 날 술에 취한 할아버지는 자신이 토벌대였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외견상 <포수>는 카메라를 매개로 전쟁과 학살을 경험한 위 세대의 구술을 수집하고, 거대 서사로서 편집된 역사가 아니라 미시적인 경험을 조명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발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 증언의 충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 증언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손자와 할아버지 사이의 술상이라는 점이다. 작가는 할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이일 뿐 아니라 손자로서 카메라 앞에서 능숙하게 할아버지의 술잔을 채우고, 그의 생활 가까이에 붙어 경계가 풀리기를 기다린다. 라포르 형성을 위해 카메라 뒤에서 이루어졌을 절차들을 카메라 앞으로 가져다둔 셈이다. 그는 할아버지가 친척에게 전화를 걸어 손자가 자신을 영화처럼 촬영해준다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을 넌지시 듣는다. 양지훈 작가는 손자라는 상징적 관계를 통해 ‘듣는 세대’의 계보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할아버지의 과거로부터 역사를 재발견하는 과정에서 매개로서의 자기의 상을 구체화한다. 타자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이제 자신의 상을 구축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매개자로서의 자기의 형상 없이는 타자의 목소리를 듣거나 기입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것은 사적 경험만이 동시대를 사유하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자기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를 새롭게 탐구하는 영화의 장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90년대생 출생 감독 야마나카 요코의 신작 <나미비아의 사막>은 세대론을 포착하겠다는 야심이 아니라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매개로서의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동시대를 감각한다. <나미비아의 사막>은 카나(가와이 유미)의 얼굴에서 시작되는 영화다. 영화의 첫 장면은 도심 속에서 아케이드를 걷고 있는 카나의 얼굴을 향해 천천히 클로즈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20대 초반의 여성 카나는 늘 주변과 함께 있다. 동창의 자살 소식을 전하며 울적해하는 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조차 카나는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의식한다. 이때 카나의 얼굴은 산만함을 숨기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로 많은 것들이 드나든다. 그 얼굴은 술 마시고 구토하고, 피어싱을 뚫고, 코피를 흘린다. 이 영화에서 카나의 얼굴은 감정으로 인한 표정이 드러나는 장소이기 이전에, 구멍이다. 더럽거나 위험한 것이 새어나가고 흘러들어오는 구멍. 카나의 얼굴은 도시의 소음, 산만함, 죽음에 대한 무심함처럼 나쁜 오늘의 것들을 무방비상태로 통과시키고, 망가진 자신을 상대방에게 다시 드러낸다. 카나의 얼굴을 좇는다는 것은 단지 그녀를 응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녀가 세계에 노출되는 방식을 지켜보는 일과 같다.
여성적 에세이라는 실천적 계보에 가까운
카나에 대해 우리가 알게 되는 두세 가지 것들. 카나는 제모클리닉에서 보조위생사로 일하지만, 대체로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고 잠드는 것처럼 보인다. 카나는 배가 고프면 연인을 독촉하면서 직접 식사를 차리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에 누구보다 솔직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채로 결정의 주도권을 은근히 상대방에게 떠넘긴다. 그리고 상대가 주도적으로 행동하려 하면 이를 저지하는 데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한다. 카나의 자율성은 언제나 상대방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다.
이런 여자를 지켜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카나가 제멋대로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제멋대로’ 하는 것처럼 느끼기 위해 카나가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카나는 동거 중인 하야시(가네코 다이치)와 다툰 뒤 하야시가 집을 나가려고 하자, 집을 나가는 건 자기여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며 거칠게 뛰쳐나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다. 하야시는 다리와 목에 깁스를 한 카나를 돌보며 한동안 수발을 든다. 이때 카나가 다친 것은 순전히 우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상대를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해친 것과 다름없다. 그녀는 자신이 수동적인 위치라는 사실에 자존심 상해하면서도 그 수동성이 들키지 않도록 상대의 죄책감으로 위장하려 한다. 자신의 모순에 시달리면서 그 모순의 구조로부터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은 그 모순이 더 큰 불능과 얽혀 있기 때문이다. 카나는 하야시를 필요로 하는 동시에 불화하고, 그 모순은 무한 피드백 구조를 형성해 마치 빠져나갈 수 없는 관계의 ‘자연’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많은 필자들이 지적했듯이 <나미비아의 사막>은 동시대 일본영화의 계보에서 다소 예외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우선 카나가 일본의 전형적인 순종적 여성상에 해당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영화는 지진이나 재난이라는 집단적인 상실과 트라우마를 제시하고 치유라는 공통의 언어를 통해 일본을 동시대적 무대로 만드려는 영화의 경향들과 확실히 다른 노선을 취한다. 영화는 카나의 얼굴에 주목하지만, 한 사람의 사적 진실에 파고들기 위함이 아니라, 한 사람이 스스로를 의식하는 방식과 세계에 비쳐진 방식의 공약 불가능한 차이를 표면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는 여성의 몸에서 증대되는 경향이 있다. 즉, <나미비아의 사막>이 따르는 것은 일본영화의 계보라기보다는 여성적 에세이라는 실천적 계보에 가까워 보인다. 카메라에 매개됨으로써 스스로의 몸과 정체성을 의식하는, 투박하지만 솔직한 방법.
여성적 에세이의 가장 큰 특징은 자전적 서사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이 순수한 자아의 재현이 아니라 타자와 얽힌 관계의 감각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카메라 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던 바르다를 떠올려보자.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는 밀레의 <만종>으로부터 시작해 도시와 거리에서 ‘줍는’ 사람들의 계보를 따라가는 영화이지만, 오롯이 타인의 몸짓과 이야기를 수집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바르다는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줍는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틈틈이 자신을 기입한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일상을 다시 들여다보고, 얼굴을 촬영하고, 하얗게 센 머리와 주름진 손을 바라본다. 그녀는 골동품점에서 버려진 물건을 줍는 것을 직접 실천해보기도 하면서 자신이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 ‘이미지를 줍는 일’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다시 말해서,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바르다가 자기를 구성하는 방식은 ‘줍는 사람들’ 속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줍는다’는 동작이 대상으로부터 자신에게 옮겨오면서, 바르다는 자신의 영화적 수행과 노화하는 몸을 연결 지을 수 있게 된다.
<나미비아의 사막>은 물론 연출자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사적 에세이가 아니다. 그러나 카나의 얼굴을 표면으로 강조하는 영화의 형식은 마치 그 얼굴이 수많은 여성들과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카나의 얼굴은 사적 경험과 공적 경험이 교차하는 에세이의 역량을 지닌 장소다. 카나가 스스로를 지각하게 되는 것은 혼다(간이치로)와 하야시 사이의 연인 관계에서보다도, 다른 여성들을 통해서다. 이때 ‘다른 여성들’이라 함은 영화에 구체적인 얼굴과 이름을 갖고 등장하는 여성들이나, 이웃 여자와 상담사처럼 조력하는 여성들만이 아니라 카나가 자신의 정체화를 위해 무의식적으로 연결 짓는 익명의 여성들까지도 포함한다. 카나가 하야시와 만나기 전 동거하고 있던 혼다는 출장에서 돌아와서 유흥가에 다녀왔다고 고백한다. 혼다는 카나의 눈치를 보다가 유흥업소 여자가 기분 나빴다고 말한다. 그러자 카나는 “그 말은 실례이지 않아?”라고 반문하고, 혼다가 수긍하자 “별로 상관없어”라고 덧붙인다. 카나가 일면식도 없는 여성에게 반응하는 이유는, 카나가 그 여성을 매개로 자신을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비슷한 방식의 대화가 하야시와의 관계에서도 되풀이된다. 카나가 하야시의 이삿짐에서 발견한 초음파 사진에 대해 따지자 하야시는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하지만, 카나는 납득하지 못한다. 카나에게 그것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감각 중 하나는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과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예감이다. 익명의 여성에게 일어난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카나의 방식은 그녀 자신을 잠재적 픽션의 장소로서 재구성함으로써 타자와 연결된다.
동시대 영화는 나쁜 것들과 대면해야 한다
<나미비아의 사막>의 마지막 장면. 카나는 엄마가 중국에서 걸어온 영상통화를 받는다. 중국어로 말을 건네는 친척들을 향해 그녀는 “모르겠다”고 답한다. 그 얼굴은 어떤 의미도 아닌, 그저 ‘모르겠다’고 말하는 얼굴이다. 영화는 끝내 카나의 얼굴을 채우거나 완성하지 않으며 표면으로 남겨둔다. 더이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고, 주변의 것들로 자신의 공허를 수선하는 세대의 감각은 치유해야 할 증상이 아니다. 동시대 영화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오늘의 나쁜 것들과 대면해야 하고, 타인과 접속하기 위해서 자기를 호출할 수밖에 없지만, 그 불가피함이 쉽사리 풀어낼 수 없는 모순으로 얽혀 있는 한 우리는 언제든 이 운명을 정치적으로 전복해보자고 요청할 수 있다. 나와 당신 사이를 잇는 불완전한 매개가 되어, 서로에게 잠재적 픽션으로 연루됨으로써 말이다. 글을 쓰는 내내 염두에 두고 있었던, 차재민 작가의 <사운드 가든>에 등장했던 어느 여성 심리 상담사의 내레이션으로 글의 마무리를 대신하고자 한다. “우리는 타자와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근원적 나약함을, 서로의 필요와 결핍을, 완벽한 충족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조력하는 정치성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