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 네오의 첫 번째 장편 극영화인 <해피엔드>가 관객수 10만명을 돌파해 감독과 배우들이 다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관객들만이 아니라, 평단 역시 이 영화의 성취에 고무된 분위기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재난 세대’의 신선한 감각과 정치의식을 고루 갖춘 청춘물로서 최근 주목받는 ‘젊은’ 일본영화 중 하나로 기꺼이 호명될 만한 작품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해피엔드>를 향한 호의적 감상들에 의문을 느끼며, 이견을 적어보려고 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라는 자막이 화면에 선명히 새겨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세계의 배경을 굳이 근미래로 제시한 도입부의 선언에 의아함이 생긴다. AI 시스템 ‘판옵티’가 학생들을 감시, 통제한다는 주요 설정을 근미래의 근거로 들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화두는 오래된 것일뿐더러 복도 구석구석에 위치한 CCTV 카메라가 학생 각각을 스캔해서 벌점을 매기는 상황, 영화가 그 시스템을 재현하는 방식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딱히 ‘미래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인터뷰에서 소라 네오 감독은 이러한 인상에 대해 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을 인용해 이 영화가 “미래는 이미 도래했다. 다만 모두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생각을 구현한 결과이자 일본이 자기반성 없이 미래에 이른 상태에 대한 상상이라고 밝힌다. 그는 덧붙여 <해피엔드>의 ‘근미래성’이 미래보다 과거와 접속하는 듯한 느낌은 아마도 그가 추종해온 1990년대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면모에 얼마간 빚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한다(<씨네21> 1505호).
근미래를 바탕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감각을 혼종하려는 <해피엔드>는 그러나 감독의 야심과 달리 이상하게도 낡아 보인다. 사회에 대한 단순한 논평, 인물들의 일차원적인 대사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주목을 요하는 건 근미래의 현실에 정치성을 소환하는 방식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부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인물인 후미(이노리 기라라)는 이와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음악 동아리 구성원들이 일으키는 활기와 확연히 구별되는 후미의 위상은 청춘의 시간에 정치적인 울림을 일으키려는 목적으로 구상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그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학생들의 철없는 유희로 떠들썩한 장면에서 그는 “경찰은 국가와 부유층을 위해 무장한 관료야”라는 직설적인 대사로 난데없이 끼어들며 교실 한구석 끝에서 고고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코우(히다카 유키토)가 그 말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소라 네오가 후미를 영화의 정치성을 발화하는 역할로 내세워 청춘의 세계에 각성을 의도할수록 그는 마치 자신이 죽은 줄 모른 채, 잘못된 시공간에 착륙해 맹목적인 신념만 반복해서 읊조리는 음성처럼 다가온다.
평자들이 지적하듯 <해피엔드>에 1960년대 일본 학생운동의 그림자가 얼마간 부유한다면, 이는 상당 부분 후미의 존재감에 서 기인하지만, 후미는 과거의 전투적 활력을 현재로 계승한 인물이기보다는 그에 대한 향수로 불려온 형상에 더 가까워 보인다. 말하자면 소라 네오는 자신의 세대가 가져본 적 없고, 그리하여 상실한 적 없는 시대적 공기를 ‘향수’하는 실로 어색한 위치에서 이 영화의 정치성을 구한다. 후미에게서 풍기는 시대착오적인 분위기는 이에 기인할 것이다. 후미는 제대로 활동하기도 전에 이미 향수되는 존재다. 후미의 발언들과 영화가 그를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쟁점이기보다는 구체적인 시대성이 결여된 추상적이고 일견 구태의연한 말들로 들리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이 영화의 근미래는 과거에 대한 향수로 작동한다.
청춘들은 화가 나 있고, 어른들 역시 화가 나 있지만, 이 영화에서 의외로 모자란 것은 분노다. <해피엔드>는 자신의 기조를 폭력적인 제도와의 불화로 내세우나 정작 여기엔 액션으로든, 리액션으로든 폭력을 의식하고 대면하고 재현하는 힘이 부족하다. 그러한 성향을 압축적으로 형상화하는 장면이 영화의 인장처럼 초반에 나온다. 클럽에서 학교로 돌아온 친구들은 교장이 관료에게 접대를 받고 스포츠카를 과시하는 모습을 훔쳐본 뒤, 경비원의 눈을 피해 동아리방에서 놀며 밤을 지새운다. 날이 밝자, 유타(구리하라 하야토)와 코우는 학교 옥상에서 교장의 차를 내려다보다가 위험한 작당을 모의한다. 그날 오전, 등교한 학생들이 마주한 것은 교장의 스포츠카가 수직으로 선 광경이다. 영화는 옥상 장면에서 스포츠카 근처에 놓인 지게차를 잠시 보여주기도 하지만, 유타와 코우가 차를 세우는 과정은 생략한다. 그런 이유로 학교 앞마당에서 기이한 각도로 자태를 뽐내는 노란색 스포츠카는 두 학생의 반항적인 행동의 결과로 다가오기보다는 불가해하고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화면을 장식한다. 노란 수직의 형상은 제도에 균열을 일으킨 행위로 의미화되기 전에 희귀하고 매끄러운 이미지의 욕망을 발산한다. 나중에 후미는 교장의 차를 “예술적이고 급진적으로” 만들어놨다며 코우를 격려하고, 교장은 “테러”라 규정하며 노발대발하지만, 당연하게도 둘 다 이 과시적인 이미지에 어울리는 평은 아니다. 유타와 코우는 이 차를 예쁘게, 색다른 모양새로 세웠을 뿐이다. 교장의 고급 스포츠카는 해체되지도, 박살 나지도 않았다.
<해피엔드>가 뜻밖에도 충돌과 적대를 꺼린다는 인상은 영화가 두번의 시위 장면을 화면에 불러들이는 방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유타와 코우가 카페 안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동안, 통창 바깥으로는 재일조선인 혐오 시위가 한창이고, 후미는 차별 선동자들을 옹호하는 경찰에 홀로 맞서는 중이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코우처럼 카메라 역시 밖으로 나가 현장에 휩쓸리지 않고 마치 스크린 위 배경 이미지의 소동을 지켜보듯 카페 안에 위치한다. 이 장면은 그런 상태로 끝난다. 유리창 바깥으로 시위 장면이 다시 등장하는 건, 유타가 악기점에서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는 대목에서다. 유타와 점주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때,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가게가 흔들린 직후, 도망가던 시위대 일원이 악기점 창을 두드려 자동문이 열리고, 이내 경찰에 잡혀 사라지는 모습을 두 사람은 가만히 쳐다본다. 재난의 진동과 사회의 진동을 연동시키려는 연출이겠지만 이 장면에서 도드라지는 사실은 따로 있다. 거리의 소란은 역시나 창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투명한 유리막 바깥의 파편적 이미지로 스쳐 지나간다. 영화는 이번에도 ‘안’에 머무른다. 이 ‘안’은 무엇을 할 수 있는 자리일까.
유타가 악기점에서 지켜본 정권 반대 시위대에 후미와 코우가 동참한 사실은 학교 내부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두 학생이 교장의 추궁을 받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아무래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악기점과 학교 장면 사이에 후미와 코우의 데모 장면이 부재한다는 점이다. “시위하면 세상이 변해요?”라고 묻던 코우가 처음으로 경험한 싸움이자 어쩌면 서사적 분기점이 될 수도 있을 투쟁의 장소에 영화는 따라나서지 않는다. 다만 학교 울타리 안으로 돌아와 시위를 비난하는 교장, 그에게 대항하는 두 학생, 이들을 변호하는 담임, 자식의 과오를 사과하는 부모를 비춘다. 제도와 격렬히 마찰하는 현장의 현재성을 영화는 카페나 악기점 장면에서처럼 곁눈질로 지나치거나 후미와 코우의 시위 장면처럼 아예 삭제한다. 현장의 거친 현재성을 마주하거나 그에 개입하는 일에 소극적인 영화의 일관된 태도는 짚고 넘어갈 만한 것이다.
영화가 건너뛴 후미와 코우의 데모 장면을 예견하며 두 사람이 시위 참여를 결연하게 다짐하던 술자리의 풍경은 그런 맥락에서 주시할 만하다. 비좁은 술집, 기성세대로 보이는 이들이 저마다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코우는 흥미롭게 바라본다. 그들이 “똥이나 처먹어라”라는 가사를 주고받으며 함께 흥에 젖는 노래는 실제로 1960년대 후반 일본의 포크 가수 오카바야시 노부야스가 부른 곡으로 알려져 있다. 저항의 말들이 시끌벅적하게 울려 퍼지며 마치 과거 운동권의 골방이 환생한 듯한 이 장면에는 카페나 악기점에서 현실의 잔상이 맺히던 창이 없다. 밖으로 통하지 않는 이곳의 풍경은 과거의 싸움을 갈망하는 향수의 정취로 그득하고, 같은 이유로 고루하다. <해피엔드>의 카메라는 후미와 코우의 시위 현장에 뛰어드는 대신, 회고담의 색채가 짙은 시공간의 기운에 취한다.
물론 이 영화에도 학생들이 일으킨 사건은 있다. 학교가 자위대원의 특강을 마련하자, 후미를 필두로 일본에 귀화하지 않은 학생들이 AI 감시 시스템에 반기를 들며 교장을 인질로 잡아 교장실을 점거하고 문을 잠근다. <해피엔드>의 클라이맥스라고도 불릴 만한 이 대목에서 교장이 학생들 무리에 가로막혀 그대로 갇힌다는 설정은 희극적이다. 힘의 강제나 위협, 그에 대한 저항 같은 물리적인 부딪침은 없다. 교장이 그의 권력과 간교함을 이용하지 않고 학생들의 요구를 그냥 받아들이는 상황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교장실의 문이 음식을 챙겨온 교장의 심복이나 김밥을 가져온 코우에게 순순히 열린 것처럼, 이곳은 애초 강력한 감금의 장소도 아니다. 이 장면을 작동시키는 건 서사적 개연성이나 캐릭터의 일관성이 아니라, 영화의 순진한 이상일 것이다. 폭력 없이, 심지어 어느새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결국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하는 곳. 이곳은 경찰에 쫓기는 거리보다 평온하며, ‘우리’의 적은 거리의 혐오주의자들보다 쉽다. 교장실에서 밤새운 학생들은 의기양양하게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학교를 나선다. 영화는 익명의 존재들이 아우성치는 거리의 시위대에 섞이길 주저하지만 이 작은 방에서의 작위적이며 안전한 저항은 옹호하고 과장한다. 학교는 타개할 제도가 아니라,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장소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해피엔드>가 희구하는 세계는 혼돈과 충돌과 균열과 적대가 타협되고 조율된 지평이다. 지진이 발생하는 순간을 재현하는 방식도 그 예가 될 만하다. 학교 안에서 유타와 코우가 흔들림을 감지하고 책상 밑으로 들어가 대피하는 긴박한 모습이 이어지는 동안, 세계는 불시에 침묵에 잠긴다. 감독은 행여 지진을 경험한 이들의 트라우마를 건드릴지 모른다는 염려에 사운드를 배제했다고 말하지만 그의 바람과 별개로 소리를 지운 일촉즉발의 움직임은 그 순간의 불안, 동요, 위험이 제거된 이미지로, 왠지 꿈결처럼 느린 속도로 펼쳐지는 듯한 착각 속에 전시된다. 적어도 이미지의 차원에서 이 장면의 강도는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거실에서 유타가 잠에서 깨는 아침의 잔잔한 공기, 그곳에서 밤새 널브러져 자던 친구들이 하나씩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해피엔드> 는 현실의 폭력성과 불안전성과 혼란이 자신의 토대라고 거듭 환기하지만 이 영화의 시선, 리듬, 운동성, 보폭 등은 그 울퉁불퉁한 상태를 순화하는 과정에 복무한다. 시시각각 어두운 도심을 부유하는 “긴급사태조항 발령” 문구나 고층빌딩에 비친 총리의 얼굴은 근미래의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텅 빈 이미지의 기술이며, 폭력은 그저 신기루처럼 다뤄진다. 그것은 신기루일 뿐인데, 이 영화의 청춘들은 무엇과 싸우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신기루일 뿐이므로, 밤거리를 오가는 청춘들의 풍경에는 한적하고 나른한 낭만이 깃든다.
<해피엔드>를 <태풍클럽>(감독 소마이 신지, 1985)이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감독 에드워드 양, 1991)의 영향 안에서 거론하는 감상에는 그러므로 동의하기 어렵다. <태풍클럽>과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폭력성과 불안전성과 혼란을 저돌적으로 껴안고 불온하게 밀어붙여 그 자신도 부서지길 두려워하지 않는 힘으로 청춘과 세계를 증명하는 영화다. 이들의 기동력은 과거를 향수하거나 미래를 상상할 겨를이 없는 절박하고 구체적인 현재성에 근거한다. <해피엔드>의 현재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 세계가 뿌리를 내린 곳은 어디일까. 나는 대답을 찾지 못한다. 졸업식이 끝나고, 인물들이 뒤돌아보지 않고 각자의 길로 떠난 육교에 여전히 남아,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라고 공허하게 반문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