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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선명한 해방의 순간, 오진우 평론가의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오진우(평론가) 2025-06-25

“당신은 절대 용납 못해요. 있는 그대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명대사 중 하나다. 우린 스스로를 속여가며 살아간다. 속이 문드러져도 웃는 얼굴, 늙어가며 나는 체취를 가리기 위한 향수, 마음에도 없는 말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것들이 없다면 우리네 인생은 성립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삿되지 않은 사람도 많다. 하나 홍상수의 영화적 세계엔 그런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사 그대로 과연 있는 그대로를 우린 감당할 수 있을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가히 홍상수의 모든 영화를 꿰뚫는 단 하나의 외침이다. 이 영화에서 구경남(김태우)은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한다. 하지만 그가 구경 못한 장면들이 존재한다. 자신이 보지 못한 일에 대해 그는 전해 듣는다. 그는 이야기를 들으며 같이 격분하기도 하고 때론 나 몰라라 버릇없게 굴기도 한다. 구경남은 자신이 들었던 사건들과 비슷한 일을 저지르고 분란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되고야 만다. 그럼에도 그는 깨닫지 못하고 방황한다. 관객인 우리 역시 그 장면을 함께 구경한다. 동네 주민 조씨는 화백 양천수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의 아내가 구경남과 잤다고 말해준다. 하지만 양천수는 크게 개의치 않은 태도로 오히려 아내를 걱정한다. 그는 자신이 눈으로 보지 않은 것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며 초연한 태도를 보인다. 반면 구경남은 이름 따라간다고 보는 것에 매달린다. 개천의 상류를 오르는 <수유천>의 전임(김민희)처럼 구경남은 메마른 강의 하류를 따라 미친 듯이 달려가 기어코 바다를 본다. 그때 그가 바다를 보며 느꼈을 일말의 성취감과는 다르게 마지막에 마주하는 바다는 특정할 수 없는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장소가 된다. 그 순간 바다는 있는 그대로의 바다가 아니다. 온갖 정념이 수렴하는 장소가 되어 구경남을 집어삼키는 하나의 형상으로 자리한다. 여기서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그 자연이 그에게 뭐라고 하는 것일까?

그녀는 나무처럼 영화 내의 구심점이다

홍상수 감독의 33번째 영화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이하 <그 자연>)는 그간 자연과의 교감을 펼친 그의 근작들을 갈무리하는 질문을 제목으로 채택한 듯 보인다. 시인 동화(하성국)가 마주하는 자연이란 무엇인가? <그 자연>과 함께 지난 홍상수 영화 속에서 자연은 어떻게 활용됐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자연은 말이 없다. 그저 우리 앞에 존재할 뿐이다. 자신이 생각한 말이 자연을 통해 되돌아올 뿐이다. 홍상수의 영화 속 자연은 절대적인 시선으로 모든 것을 내다보는 하나의 정령으로 등장했다. 그렇게 자연을 본다면 그 범위는 넓게 상정할 수 있다. 산이 보이는 풍경뿐만 아니라 바다, 나무, 꽃, 식물 그리고 영화 내 비인간적인 존재도 포함시킬 수 있다.

김민희 배우가 처음 등장했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의 나무가 그런 존재다. 영화가 시작할 때, 심지어 영화가 둘로 나뉠 때도 카메라는 나무를 올려다본다. 나무만이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나무는 <강변호텔>에서도 등장한다. 두 아들과 아버지는 호텔 카페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만나지 못하고 엇갈린다. 카페는 뚫린 공간이지만 장막이라도 있는 듯 소리가 숏 안에서만 머무른다. 큰 소리로 떠들어도 소리는 다음 숏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각각의 숏은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처럼 구성한다. 그것을 겨우 이어주는 연결고리로서 카페 안의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무와 더불어 상희(김민희)와 연주(송선미)는 비인간적인 존재처럼 이들을 바라본다. 둘은 ‘천사’처럼 호텔 방 건너 영환(기주봉)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애도하듯 흐느낀다. 이때 역시 소리는 숏을 넘지 못한다.

오직 디졸브만으로 이들은 연결된다. 이러한 비슷한 구성은 <풀잎들>에서 이미 나타났다. 협소한 카페의 공간을 폐쇄적으로 담아내 전체 공간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여기서 카페는 무한하면서 동시에 유한한 모순성을 지닌 세계다.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건 숏과 숏 사이의 장막이 한 꺼풀 걷어질 때다. 사운드가 다음 숏으로 침투하여 두숏의 연결성이 생기거나 카메라가 패닝하여 옆 테이블을 비출 때다. 그렇게 함으로써 숏에 부여된 고립성과 신비함이 상쇄된다. 그러한 인물이 아름(김민희)이다. 그녀는 숏과 숏 사이의 목격자이자 기록관이다. 구석에 앉아 전체를 조망하는 그녀는 나무처럼 영화 내의 구심점이다.

<그 자연>에서 구심점은 바로 산이다. 여기서 산은 절대적인 시선으로 영화 전체를 내려다보는 것 같지 않다. 이유는 산의 전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도망친 여자>에서 각각의 에피소드 끝에 비추는 산처럼 마치 영화를 주재하는 풍경으로서 산은 <그 자연>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절대적인 시선이 느껴진다. 그것은 감독 홍상수의 시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연식이 오래된 차를 몰고 산에 지은 애인의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는 시인 동화는 부처님 손바닥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꼴이다. 따라서 <그 자연>에서 자연은 멀리서 바라보며 관념을 투사하는 하나의 스크린이 아니라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가 체험하는 공간이다. 흡사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다. <수유천>에서 전임도 마찬가지로 개천의 상류로 잠시 사라졌다가 돌아온다. 블랙홀의 반대편이라도 보고 온 듯 ‘무위’의 세계와 깨달음의 순간을 전임만이 목격한다. <그 자연>은 마치 볼 수 없는 블랙홀의 반대편을 보여주는 것 같다. <수유천>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마지막 전임의 프리즈프레임에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함을 부여했다면, <그 자연>은 적나라하게 실체를 드러내며 동화의 민낯을 마주하게 한다. 홍상수 영화에서 남자주인공의 각성의 순간은 언제나 그렇듯 모멸 차다.

시인 동화는 애인 준희(강소이)를 바래다주고 가려던 참에 우연히 준희네 부모님 집에 들른다. 이 집은 준희의 아버지 오령(권해효)이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산을 깎아 만든 집이다. 산이 품은 이 집은 ‘부모’라는 존재를 끌어내는 영화적 장치다. 그것은 부재하는 것을 현재로 소환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시의 방식이자 몽타주의 원리다. <여행자의 필요>에서 이리스(이자벨 위페르)가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리스 역시 불시착한 외계인처럼 모든 인물을 만나는 구심점으로 산에서 등장했고 초록색을 두른 자연과 다름없는 형상이다. 동화 역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시를 짓는다. 그가 이곳에 와서 적었던 시상은 아이러니하게도 효심에 관한 것이다. 동화는 이 집을 지은 오령과 함께 집과 산을 구경한다. 동화는 수목장을 치른 오령의 어머니의 산소에 절까지 하며 예의를 갖춘다. 산에서 둘은 막걸리를 나눠 마신다. 동화는 오령의 지극한 효심과 자식에 대한 사랑에 영감을 받아 시상을 적는다. 하지만 동화에게 효심은 상당히 표면적인 주제다. 산 전체를 통째로 바꿀 정도의 물리적인 힘이 동원된 오령의 사랑은 동화의 내면을 통과하진 못했다. 이유는 동화는 계속해서 그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멀리하려는 존재는 다름 아닌 아버지다. 모든 것을 다 갖춘 잘나가는 변호사 아버지로부터 그는 도망치려는 자다.

하지만 동화는 도망칠 수 없다. 이 산에 붙잡혀 있다. 그는 또한 세계로부터 도망치려는 자다. 동화가 오령에게 안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그래서 인상적이다. 그는 안경을 쓸 정도로 시력이 나쁘지만 잘 쓰지 않는다. 그는 태어나서 오랫동안 뿌연 세상을 보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외부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다. 그가 맨눈으로 감각했던 세계에서 뿌옇다는 것은 애초에 없는 거나 다름없다. 그것은 비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감각이다. 그는 분명 안경을 통해 선명한 세상을 보았지만, 흐릿한 세상에 남으려고 한다. 왜 선명한 세상을 거부하는 것일까? 그는 맨눈으로 본 세상을 아름답다고 낭만화한다. 그는 보이는 것이 신기하거나 감동적일 때 맘껏 보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그 기록이 곧 시가 된다고 동화는 자신의 시론을 설파한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그는 눈먼 자일까? 저화질의 <그 자연>은 동화의 맨눈으로 기록한 세계처럼 보인다. 8개의 챕터로 유난히 잘게 나뉜 <그 자연>은 동화의 시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당장은 이런 시를 쓸 수 없다. 이것은 홍상수 감독이 카메라로 만든 시다. 카메라가 줌인하여 비춘 동화의 흐릿한 얼굴과 마지막 대사에 헛웃음을 친다면 너무 쉽게 그를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어쩌면 감독의 의도대로 어느새 우리가 눈먼 자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동화의 흐릿한 얼굴에 동화와 감독과 관객의 시선이 한데 모인다. <인트로덕션>부터 가속화된 저화질의 홍상수 필모그래피에서 <그 자연>은 유일하게 내용과 형식이 가장 맞닿아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저화질의 미학은 홍상수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로도 비친다.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한껏 자유로워진 그의 영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과 은총의 순간에 집중했다. 이때 자연은 깨달음과 정화의 장소(<인트로덕션> <수유천>)이자 예술적 승화의 장소(<물안에서>)였다. <그 자연>에서 동화가 겪는 일련의 사건은 그런 무드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동화는 <해변의 여인>의 중래(김승우)와 닮았다. <해변의 여인>은 지금은 볼 수 없는 특유의 상스러움과 활력이 넘치는 매력적인 작품으로 <그 자연>의 바다 버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모든 것이 이미 이 영화에 존재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자연이 두 사람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점과 이미지와 싸운다는 것. 차이점은 중래는 타인의 이미지와 실체 사이에서 갈등하고 동화는 타인이 판단하는 자신의 이미지와 싸우는 중이다.

동화의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무지’의 철학은 세상을 향한 그리고 자신을 향한 근시안적인 프리즘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대전제는 대상을 알려고 하지 않는 위험성을 지닌다. 그렇기에 시인으로서 그의 관찰은 그저 표면에 머무르는 관념적인 작업으로 보이기에 감동을 줄 수 없다. 모른다는 것으로 세계를 거부하기에 그의 내부로 외부가 침투할 겨를이 없다. 애인 준희가 지적하듯이 동화는 모른다는 것으로 도피해서 알려고 들지 않고 쉽게 답을 내려버린다. 또한 모른다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흐릿한 세계와 무지로의 도피를 통해 동화는 실체를 파악하는 데 실패한다. 그가 식사 자리에서 시상에 관해 이야기하며 오령의 어머니 수목장의 나무와 절에서 본 큰 은행나무를 연결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둘을 잇는 접착제가 부족했거나 아니면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동화와 변호사 아버지는 너무나 달라붙어 있다. 준희의 언니 능희(박미소)가 동화에게 아버지가 뒤에 계신다고 반복해서 말하며 그를 분노케 한다. 동화가 도망가려고 했지만 피할 수 없는 존재인 아버지는 타인이 바라보는 자신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것을 포함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존재는 애인뿐이다. 동화의 해프닝은 밀려오는 졸음과 함께 망각의 위기에 처한다.

달을 보기 위해 산을 오르다

술주정을 부리고 동화는 잠을 잔 뒤 깨서 달을 보기 위해 산을 오른다. 꿈속을 헤매는 듯 동화는 밤이 돼서야 그렇게 도망쳤던 앎과 선명한 세상으로 진입한다. 안경과 스마트폰 플래시라는 인공적인 힘을 빌려 밤에 핀 꽃을 바라본다. 이 시퀀스에서 핵심은 시각보다는 청각에 있다. 준희 부모님은 컨테이너에서 동화를 험담한다. 동화가 컨테이너를 지나갈 때 들리는 건 오령의 기타 연주뿐이다. 험담은 숏을 넘어, 컨테이너를 넘어 그에게 도달했을까? 여전히 알 길은 없다. 미묘하게 엇갈리게 동선을 구성했다. 험담을 들리게 하는 것보다 자연은 그의 몸에 상처를 내는 방식을 택한다. 연식이 오래된 그의 낭만적인 자동차도 함께 멈추게 한다. 그제야 동화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외부의 강제적인 힘들은 그의 내부를 통과하여 입 밖으로 차를 바꿔야겠다고 말하게 만든다. 가는 길에 제동이 걸렸지만, 그는 결코 갇힌 것이 아니다. 그는 다시 출발선에 선 것이다. <그 자연>은 불투명한 한 시인의 얼굴에서 선명한 해방의 순간을 보려 하는 영화다.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를 기다리며 만들었던 비디오 에세이 <Hong SangSoo: Gravity and Grace>가 MUBI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됐다. 이 비디오 에세이는 이 글의 출발점이었다. 비교해서 보시면 흥미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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