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스 카락스는 자전적인 영화이자, 영화 세계를 정리하는 영화에 <잇츠 낫 미>라는 역설적인 제목을 붙인다. 부정의 진술은 언뜻 자전적 측면과 충돌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둘은 평화롭게 공존한다. 자전적 영화에 <잇츠 낫 미>라는 표제를 붙인 것은 흡사 명백한 파이프 그림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자를 새기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불러온다. 파이프 그림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힌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은 회화를 보충 설명하는 역할에 머물던 활자를 작품의 일부로 포함한다. 마그리트가 푸코에게 서신과 함께 보낸 그림 사본 뒷면에는 ‘제목은 그림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긍정한다’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여기에는 부정이 부정하는 대상만이 아니라 부정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역설이 담겨 있다.
부정을 감독의 세계에 관한 논의로 끌어올 때, 그것은 지속과 변화에 관한 논의로 변형된다. 감독의 작품에서 무언가는 연속되지만, 무언가는 달라진다. 감독론은 대개 이에 대한 해명으로 채워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잇츠 낫 미’라는 제목은 연속성 대신 변화를 보라는 자기 비평적 선언으로 들리기도 한다. 푸티지들이 얽힌 <잇츠 낫 미>에는 과거와 현재의 정치적인 목소리가 끼어든다. 그러나 이것이 레오스 카락스의 변화라든가, 새삼 그의 영화 세계가 정치적이었다고 평가하는 매개가 되지는 않는다. 지난 세기의 사람이라는 자평의 자조적 함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이유는, 여전히 그 시대는 힘이 세기 때문이다. <잇츠 낫 미>에서 과거의 영화 푸티지와 21세기 현실 정치의 맥락을 담은 영상을 비교하면 살아남는 것은 20세기의 영화다. <나쁜 피>에서 질주하는 쥘리에트 비노슈의 모습은 투쟁하는 여성의 격렬함으로 온전히 대체되지 않는 잔상을 남긴다.
질주와 걸음마 <잇츠 낫 미>
<나쁜 피>는 잊을 수 없는 엔딩 시퀀스로 기억되는 영화다. 총상을 입고 죽어가는 알렉스(드니 라방)의 피를 한쪽 뺨에 묻힌 채, 안나(쥘리에트 비노슈)는 활주로 위를 뛰기 시작한다. 날지 못한 채 추락한 알렉스를 위한 것일까. 팔을 벌린 채 카메라를 마주하며 달려오는 배우의 몸과 얼굴은 기계의 속도와 맞물려 비인간적인 속도로 도약한다. 그 모습은 마치 누군가에게 빙의한 존재, 혹은 팔을 벌린 채 다가오는 천사의 현현처럼 경이로우면서도 두렵다.
알렉스와 리즈(줄리 델피)의 도망과 추적 시퀀스를 비롯해 <나쁜 피> 속 질주는 달리는 얼굴의 인상적인 묘사를 특징으로 한다. 알렉스와 리즈의 질주는 겹친 얼굴의 싸움으로 요약된다. 하나의 얼굴이 다른 얼굴을 밀어내며 서로의 흔적을 지우는 동시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비노슈가 연기한 안나의 질주는 비정상적으로 빠른 속도에 의해 얼굴이 흐릿하게 지워지고 헝클어진다. 반면 드니 라방이 혼자 달리거나 걷는 모습은 대부분 측면 트래킹숏으로 드러난다. <나쁜 피>에서 알렉스가 <Modern Love>에 맞춰 거리를 질주할 때의 걸음은 춤에 가까운데, 그의 움직임을 측면에서 따르는 카메라는 한편의 뮤직비디오에 가까운 장면의 독립성을 인정한다. <잇츠 낫 미>에는 드니 라방과 레오스 카락스가 나란히 걷는 장면이 등장한다.
<도쿄!>에서 광인을 연기할 때의 모습으로 등장한 드니 라방 옆에서 카락스가 과장된 걸음걸이를 흉내내며 나란히 걸어 내려온다. 나란한 위치는 둘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카락스의 본명인 알렉스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드니 라방은 카락스의 페르소나이자 분신으로 함께해왔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 있던 카락스는 드니 라방의 동행자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며 이제는 자신이 그의 분신이 되었음을 인정한다.
<잇츠 낫 미>의 엔딩크레딧 이후에 등장한 일종의 쿠키영상은 <나쁜 피>에서 드니 라방이 <Modern Love>에 맞춰 걷는 장면을 패러디한다. 드니 라방이 즉흥적인 몸짓으로 움직이던 곳에 <아네트>에 등장한 마리오네트의 서툰 걸음이 자리한다. 아네트 인형은 드니 라방이라는 대체할 수 없는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존재다. 질주할 때 흐트러지는 얼굴과 달리 마리오네트의 얼굴은 지워지지 않는 고정된 얼굴이다. 한편 고정된 얼굴 뒤에는 지워져야 할 투명한 얼굴이 늘 동행한다. 마리오네트는 그의 움직임을 조작하고 보조하는 동행자를 필요로 한다. 검은 그림자 속에 자리한 보조자와 더불어 마리오네트는 걸음마를 떼는 데서 벗어나 무릎을 높여 달리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마리오네트는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 세계에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는 동시에,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영화 만들기의 조건을 드러낸다.
붙잡기와 놓아주기 <해피엔드>
교복을 입은 학생 무리가 경찰의 단속을 피해 도망가는 <해피엔드>의 한 장면은 청 춘과 질주라는 고전적인 관계를 재방문한다. 이때 고정된 카메라는 밴드부 친구들이 도망치는 뒷모습을 비춘다. 카메라는 짓궂게도 이들이 카메라를 채 빠져나가기 전에 화면 위에 잠시 정지된 채로 붙잡아둔다. 이들은 마치 공중에서 나는 것처럼 뜬 채로 잠시 멈췄다가 그대로 카메라 밖으로 빠져나간다. 인물의 움직임을 붙잡아두는 프리즈프레임은 영화의 엔딩 무렵에 다시 등장한다. 소라 네오는 이같은 편집 방식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초반의 프리즈프레임은 후반부와 대구를 위해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씨네21> 1505호). 하지만 명확한 의도가 없이 사용한 방식이어도 그것이 영화에 포함되는 한 분명한 의미와 의도를 지니게 마련이다.
프리즈프레임 화면은 대개 영화 바깥과 안이 소통하는 비현실적인 서사 장치로 쓰이거나 영화의 오프닝이나 엔딩 시퀀스에서 인물을 소개하거나 끝나지 않는 영속성을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해피엔드>의 오프닝에 쓰인 프리즈프레임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다만 무언가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끝’을 예고하는 느낌을 준다. 아직 인물이나 서사에 관해 알지 못하는 관객은 이 장면이 주는 느낌을 나름대로 추상하게 된다. 예컨대 화면 위에 붙잡힌 것은 청춘이라는 영속할 수 없는 시간이다.
화면이 중단되고, 다시 시작되는 동안 관객은 각자가 붙잡고 싶었던 것과 끝내 놓친 것을 시간의 공백 안에 채워넣는다. 영화를 통과한 뒤에 다시 마주하게 된 프리즈프레임은 두 주인공인 유타(구리하라 하야토)와 코우(히다카 유키토)의 관계를 함께 통과한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같은 꿈을 꾸고 비슷한 길을 갔지만, 어느 순간 갈라진 두 친구가 막 졸업식이 끝나고 각자의 길로 향하기 직전에 마주한 마지막 갈림길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유타가 코우를 슬쩍 건드리는 손길에는 어쩔 수 없는 ‘끝’의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이 장면은 읽어내기보다는 가능한 한 둘만의 시간으로 남겨두고 싶어진다. 그 순간을 붙든 것은 정보에의 요구가 아니라 감정이기 때문이다.
순간을 포획한 뒤 놓아주는 카메라의 인간성은 학생들의 일탈을 감시하는 카메라 시스템의 속성과 비슷하고도 다르다. 실시간 감시 카메라는 학생의 신원을 추출하고, 그의 행위가 교칙에 저촉되는지를 평가한다. 카메라 위에 움직이는 존재의 얼굴을 바탕으로 신원을 조회하면 개인정보가 노출된다. 학생의 행위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교칙에 어긋나는지를 파악한 뒤, 그 자리에서 벌점이 자동 부과된다. 시스템은 단순함으로 인해 한계를 지닌다. 학생들은 카메라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교칙을 위반할 수 있고, 누군가의 장난에 의해 일시적으로 손에 쥔 담배가 벌점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내는 다른 대상은 지진이다. 지진은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지만, 스스로 오보를 내거나 누군가에 의해 오류가 조작되기도 한다. 영화에서 지진은 때때로 청춘의 흔들림 혹은 사랑의 감정으로 즐겨 번역되고는 했다. 하지만 최근 일본영화에서 지진은 영화적 표현보다는 동일본대지진처럼 현실 재난의 반영이고, 그 자체로, 세계로부터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해피엔드>의 지진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거대한 지진으로도, 청춘의 비유로도 온전히 번역되지 않는다. 지진 역시 학교의 감시 체제처럼 통제와 관리를 받는 정보의 일종일 뿐이다. 세계에 흔들림을 빼앗긴 청춘은 세계에 따라 흔들리는 존재이기보다는 세계의 흔들림 속에서 각자의 중심을 찾으려는 존재처럼 보인다.
감시 카메라가 포착하는 움직임이 정보의 추출을 의미한다면 <해피엔드>가 싸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보의 이해다. 인물의 움직임을 멈춘 프리즈프레임 화면은 정보로 환원되지 않는다. 프리즈프레임 화면에서 보게 되는 건 무언가를 멈추었다 재생하는 표면의 움직임 그 자체로, 그 움직임에는 인물 혹은 특정한 시기를 붙들고 싶은 마음이 깃든다. 거기에 담긴 내용은 말로 설명하면 지나치게 소박해지고 만다. 순간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는 이유는 그 순간을 온전히 인물들에게 맡겨두고 싶기 때문이다. 관객에게는 정보의 접근에서 소외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때때로 소외될 자유가 필요하다.
미끄러지다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보는 이로 하여금 종종 모른다는 고백을 촉발해온 홍상수의 신작에는 무지에의 자각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시인 동화(하성국)는 오래된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며 ‘그냥 일어나는 거고 우린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내뱉는다.
그의 연인 준희(강소이)는 ‘왜 그렇게 모른다는 것을 좋아하냐’며 ‘모르는 걸로 도피하는 것 같다’라고 지적한다. 모름에 관한 논의는 한 사찰 근처의 이름 모를 탑 앞에서도 펼쳐진다. 누구를 기리는지 알 수 없지만, 기리기 위해 존재하는 탑 앞에서 세 사람은 모른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받아들인다.
영화 속에는 하나의 상황 이후, 이에 대응하는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동화는 술을 곁들인 식사 자리에서 ‘밤에 핀 꽃’을 소재로 한 짧은 시를 읊는다. 그가 읊은 시는 시인이라는 직업이 무색할 정도의 습작이다. 하지만 밤중에 홀로 깬 동화가 마치 그의 시의 현현처럼 어둠 속에 핀 꽃을 마주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보잘것없던 시를 돌아보게 된다.
꽃을 마주하는 장면은 흥취를 깨는 동작으로 마무리된다. 동화는 지난밤 술자리에서 일으킨 부끄러운 소란으로부터 스스로를 다독이듯, 짐짓 벤치에 누워 담배를 피우는 여유를 만끽하며 주인의 안내와 간섭에서 벗어난 혼자만의 밤 산책을 즐긴다. 하지만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산책로를 내려오던 그는 별안간 미끄러지고 만다. 동화가 미끄러지는 장면은 카메라 위에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화면 밖에서 들리는 비명과 다음날 팔에 남은 선명한 상처를 통해 드러난다. 본 것조차 안다고 말할 수 없는 홍상수의 세계에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소박한 순간 하나를 얻은 셈이다.
미끄러짐의 순간은 닭장 속 닭들이 주인을 피해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가장 격렬한 움직임이라고 상상된다. 미끄러지는 동작은 제대로 달리지 못한 동화의 자동차가 주는 이동 불가능성과 대조된다. 청춘의 질주를 매개해야 할 동화의 자동차는 불능의 매개로 드러난다. 산뜻한 질주의 순간은 준희의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계획에 없던 낮술은 운전대를 연인에게 넘겨주도록 만들며, 미끄러지면서 다친 팔은 운전에 장애를 만든다.
미끄러지는 행위는 동화가 몽유병자와 같은 움직임으로 경험한 비밀스러운 시간의 감흥을 깨뜨림과 동시에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의 격렬함의 낙차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팔에는 넘어져서 긁힌 상처가 붉게 새겨져 있는데, 홍상수 영화에서 이례적인 분장으로 탄생한 상처는 마치 좀비에게라도 물린 것처럼 과장돼 보인다. 상처는 그가 꿈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여전히 꿈속에 있다고 상상하게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곤경에 처한 동화의 얼굴께로 줌인한 뒤 프리즈프레임으로 동결한다. 이때의 프리즈프레임은 순간의 영속을 염원하는 방식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그 순간은 벗어나고 싶은 악몽 같은 순간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때 동화는 담배를 내뿜으며, ‘이제 차는 좀 팔아야겠다’는 자조적인 혼잣말을 내뱉는다. 그의 말은 홍상수 영화에서 내레이션으로 처리되곤 했던 일인칭의 속마음 소리와 흡사하다. 그렇다면 여기는 회피의 욕망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환상으로도 채 벗어나지 못한 현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