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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숙(리타)의 장르의 감정] 희망은 만화책이다, 퀴어 유토피아 영화로서의 <로건>

<로건>

<로건>(2017)은 굉장히 속상한 영화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늙고 초라한 로건이 생계를 목적으로 리무진 택시 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게다가 험한 세월로 인해 그의 클로와 회복 능력은 성치 않다. 자신을 공격한 동네 갱들을 힘겹게 죽인 그는 피를 흘리고 비틀대며 그가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어느 폐공장을 개조한 거처로 돌아간다. 그의 가족은 총 2명으로 치매 노인이 된 찰스 자비에와 “로건의 속옷을 개고 노인의 죽을 끓이는” 칼리반이다. 때는 2029년으로 인간에 의해 대부분의 뮤턴트가 죽었고 또한 25년간 뮤턴트 아기가 하나도 태어나지 않아 뮤턴트는 종족 절멸을 겪고 있다. 심지어 그중 몇몇은 핵무기 수준의 살상 능력을 가졌지만 정신이 온전치 못해 발작적 폭주를 하는 찰스 옆에 있다가 괜히 죽은 것으로 암시된다. 신체적으로는 90대 노인이지만 그는 여전히 위험하다. 로건과 칼리반은 대량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아픈 찰스를 거의 감금하다시피 해 그가 최소한 죽지는 않도록 관리한다. 찰스는 로건에 의해 강제로 진정제를 주사당한 뒤 꺼져가는 정신을 붙잡고 “이건 삶이 아니야”라고 중얼거린다. 물론 로건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택시 기사를 해 악착같이 돈을 모아 배를 사서 바다로 떠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다뿐만 아니라 어디에도 가난하고 늙고 병든 뮤턴트 셋에게 준비된 미래 가능성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처럼 영화는 고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몸뚱이를 끌고 뮤턴트라는 낙인 아래 평생을 쫓기며 제대로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세 ‘엑스맨’의 현실을 건조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로라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엑스맨’ 만화책을 가방에 들고 다니며 ‘에덴’에 데려다 달라고 요구하는 이 흉포한 짐승 소녀는 로건이 잊어버린 걸 기억한다. 그건 다름 아닌 희망이다.

<셀룰로이드 클로짓>

<엑스맨> 시리즈는 퀴어 관객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명예 퀴어영화 중 하나다. 물론 퀴어 관객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 어떤 영화에서나 퀴어 코드를 찾아내기 위해 고도의 선택적 집중력을 발휘한다. 이 관객들은 희한하게도 자신이 처음부터 배제된 장르에서도 어떻게든 즐길 구석을 찾아내는데 이는 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비토 루소가 쓴 동명의 원작을 토대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셀룰로이드 클로짓>(1995)은 할리우드 영화사 100년 전체를 숨겨진 게이-레즈비언 코드의 역사로, 또한 이를 찾아낸 게이-레즈비언 관객의 역사로 재맥락화한다. 이를테면 안드레아 와이스가 썼듯이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퀴어한’ 배역과 연기는 어떤 관객으로 하여금 레즈비언으로서 정체성을 깨닫게 하기도 했다. <모로코>(1930)가 그 예다. 이 영화에서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동성간 키스신을 연기하며 부러 자신을 둘러싼 레즈비언 스캔들에 미끼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당연하지만 안전한 이성애 로맨스라는 엔딩으로 귀결된다. 절대적 재현 부족에 시달리는 레즈비언 관객은 기꺼이 그런 엔딩을 감내하고 극장으로 향한다. 아니, 오히려 이런 관객은 허락되지 않은 부적절한 대상에 동일시하기를 즐기며 영화를 원래 의도와 다르게 해석하기를 즐긴다. 그래야만 그런 경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로라 멀비의 표현에 따르면 피학적인- 그러나 실제로는 살기 위해 나머지를 버릴 줄 알았던 실용적인 관객이었다. 오늘날 여러모로 상황이 다소 나아졌지만 그럼에도 퀴어 관객들은 여전히 버릇처럼 악착같이 초대받지도 않은 파티에 참여해 기어코 퀴어 코드를 찾아내 접속한다. 기본적으로 는 이것이 <엑스맨> 시리즈 같은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가 퀴어 관객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이유다. 하지만 <엑스맨> 시리즈에는 실제로 퀴어 코드가 풍부하게 들어 있기도 하다. 예컨대 뮤턴트라는 존재가 그렇다. 어느 시점에 특별한 능력을 각성하게 되었지만 시선이 두려워 이를 부정하고 숨기는 뮤턴트의 모습은 성소수자의 자기 서사를 연상하게 만든다. 또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가 대립하는 형국은 마치 동성애자 권리 운동의 동화주의와 분리주의간 갈등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욱이 시리즈를 거듭하며 날로 화려해지는 <엑스맨>의 기술과 코스튬은 퀴어 퍼레이드의 시각적 시끌벅적함을 뮤턴트 버전으로 번역해놓은 것만 같다.

<모로코>

그런데 이 시리즈가 명예 퀴어영화가 되는 데 뮤턴트보다 중요한 게 또 있다. 그건 바로 표면에 직접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대안 가족’이라는 주제다. 퀴어 친족 공동체에서 자주 쓰이는 ‘선택한 가족’(chosen family)과 비슷한 용례를 가지는 대안 가족은 결혼을 통해 결합한 커플을 중심으로 한 가족이 아닌 다른 모든 형태의 가족을 포괄하는 용어다. 또 다른 명예 퀴어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나 드라마 <더 보이즈> <엄브렐라 아카데미>와 더불어 <엑스맨> 시리즈는 소위 정상 사회에서 밀려나고 추방된 뮤턴트들이 모여 살며 우주 단위로 지지고 볶는 전형적인 대안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시리즈에서 역대급으로 우울한 영화일 <로건>에서 뮤턴트라는 정체성은 더이상 중요하지도 않다. 그저 늙고 지치고 병든 중년과 노인으로 이뤄진 공동체가 사회적 돌봄 인프라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조용하게 묘사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대안 가족은 소피 루이스가 썼듯이 “돌봄을 사적인 영역에 가두는” 한계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다 로라가 끼어든다. 뮤턴트를 배양하고 실험하는 연구소에서 탈출한 야생의 퀴어 아이(child) 로라는 찰스에 따르면 로건과 많이 닮았다. 로건처럼 로라 역시 폭력적이고 공격적이지만 가족이 있다. 바로 그와 함께 연구소에 있었던 다른 뮤턴트 실험체 아이들이다. 로라는 80년대 <엑스맨> 만화책에 나오는 가상의 장소인 에덴의 좌표에서 무사히 탈출했을 친구들을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지점, 대안 가족이라는 사적 돌봄 공동체의 개념을 넘어서는 변종(mutant)과 별종(queer)의 미래 가능성을 보여주는 지점이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로건과 찰스는 명백히 ‘가짜’지만 로라에게는 유일한 “진짜”인 에덴에 로라를 데려다주기로 한 것이다. 이는 물론 미래로 표상되는 아이의 동심을 보호하기 위한 미래 없는 두 어른의 어른 노릇이자 희생정신일 수 있다. 그렇게만 봐도 <로건>은 이미 훌륭한 퀴어 대안 가족 영화다. 하지만 <로건>을 퀴어 유토피아 영화로 만드는 건 바로 비웃지도 못할 정도로 순진해빠진 희망, 도착할 수 없는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거는 압도적으로 무용한 희망이다. 그들은 에덴을 향해 출발했고, 바로 그들이 출발했기 때문에 에덴은 거기에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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