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뭐하냐는 당신의 물음에, 공연 다 끝난 거 같던데 대체 뭣 때문에 바쁘냐는 그 말에, 저는 몇년째 같은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음악… 그놈의 영화음악이요….
Q. 영화 새로 들어가셨어요? A. 아뇨 그전에 하던 것입니다.
Q. 그걸 아직도 해요? A. 그러니까요…. ^^
Q. 대체 언제 끝나요?
죽어야 끝나… 영화음악이 끝나거나 내 인생이 끝나거나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납니다. 분명 지난번에 제 손으로 녀석을 마감시켰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보면 그는 또다시 무덤에서 걸어나와 수정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영화 <화양연화> 속 장만옥 배우가 입고 나오는 아름다운 치파오를 위해 의상팀은 그녀의 몸에 완전히 맞춤인 스물한벌의 의상을 제작했으며 그중 일부는 화면에 예쁘게 나오기 위해 종이로 만들어졌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그 정도의 기술은 없지만, 우리 영화에 딱 맞는 옷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만은 매한가지이기에 돌쇠처럼 일하고 있습니다. 편집의 변화로 어떤 장면의 길이가 짧아지거나 길어지면 그에 맞춰 음악의 기장도 수선합니다. 음악이 들어가는 시작 지점을 정할 때면 인물이 안광을 띠는 순간으로 할지,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일 때로 맞출지 같은 고민을 하며 프레임을 한장 한장 훑어보기도 하고요, 가끔은 화면이 아주 조금 변한 것 같아도 작곡의 틀을 뜯어고치거나 음악 자체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해보고 나니 결국 처음 버전이 제일 좋았다는 걸 확인하며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기도 하지요.
영화라는 세계가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려면 생각보다 인공적인 레이어들이 필요합니다. 색보정, 후시녹음 등이 얹어지니 비로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장면들을 보다 보면 어쩐지 쌩얼처럼 보이기 위해 공들여 하는 투명 메이크업 같은 걸 떠올리게 됩니다. 게다가 CG는 무슨 요괴나 몬스터 같은 게 튀어나오는 장면이 있어야 쓰는 건 줄 알았는데 일반적인 극영화에서도 우리가 인지 못하는 컴퓨터그래픽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약간의 화면 편집 수정에도 후반 스태프들 처지에서는 밥을 새로 지어야 하고 옷을 다시 짜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제가 3년째 작업하고 있는 이 작품은 처음엔 2시간쯤 되는 러닝타임이었으나 몇번의 과정을 거쳐 20분 가까이 잘라낸 최종 버전으로 완성되고 있으니 제가 그동안 새 밥상을 얼마나 많이 차려 갔을지는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쯤 되면 열심히 참여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거지요. 주인의식을 넘어서서 이 영화는 이제 제 겁니다. 그냥 제 작품이라 볼 수 있는 겁니다.
오늘 음악 최종 미팅이 있지만 여기서 통과되지 못하면 다음 최종 미팅에서 이걸 다시 손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최종에서만 만납니다. 아니 매번 최종인 듯이 만나지요. 수정한 음악을 확인받기 위해 저는 프로젝트를 띄운 작업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고 제 뒤의 소파에는 감독님이 앉아 있습니다. “여기서는 추가 아이디어를 조금 넣어봤는데… 일단 한번 보시죠.” 설명을 많이 하면 감상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말을 아낍니다. 인생의 많은 경우 쓸데없는 말은 덜하는 게 준비를 잘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감독님이야말로 편집본을 마르고 닳도록 보셨기에 지금 플레이 바가 멈춰 있는 지점만 봐도 여기가 어딘지,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음악을 만들며 이 장면에 필요한 분위기를, 약간의 해석을, 가끔은 연기를 추가하고요, 감독님은 제 버전의 영화를 처음으로 감상합니다. “어떠셨나요?” 하고 여쭤보면 많은 경우 “음감님!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웃음)”의 상태지만 가끔 “너무 좋아요! 이거인 것 같아요!”라는 피드백도 받습니다. 그럴 때 저는 신이 나서 “사실… 저 신의 어쩌고를 이 신이 도와주기 위해서 여기를 어쩌고 한 건데…”를 오타쿠처럼 줄줄 늘어놓으며 늦게 깨달은 인생의 진리를 내동댕이칩니다.
이 작업은 단기적으로는 세상에 단 한 사람, 감독님만 오케이하면 되는 일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할 때 다소 걱정되더라도 감독님만 괜찮다면 여기서는 정답인 것입니다. 어느 쪽이 더 무서운지 더 할 만한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모두에게 사랑받기 위해 치장했다가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하는 상황을 겪기도 하는 싱어송라이터 입장에서는 약간 해방감도 느낍니다. 내가 만든 것이 다소 구리다 하더라도 어떤 한 사람이 진정 좋아할 수 있다면 그걸로 괜찮지 않을까요? 세상에 너와 나, 겨우 두 사람만 좋아할 것을 만들겠다는 것이 좀 나이브하게 느껴지겠지만 지금 저에게는 무려 두 사람이나 좋아할 음악을 만드는 것이 정말로 어렵게 느껴지는데요. 결국, 제가 하는 일이란 어딘가에 있을 ‘너’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을 만들어내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철저히 한 사람에게 허락받고 거절당하고 협상하는 것…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