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땅 위에 사람들이 대형 스피커를 설치한다. 멜로디 없이 반복되는 울림에 맞춰 모두가 춤을 춘다. 인파 사이를 가로지르는 이방인은 단 두 사람. 루이스 부자는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오랜 기간 모로코의 사막을 헤맸다고 말한다. 아마도 다른 파티에 딸이 있을 것이라 말하며 떠나는 일행 뒤를 루이스 부자가 말없이 따라붙는다. ‘시라트’는 이슬람교에서 ‘지옥을 가로지르며 이승과 낙원을 연결하는 다리’를 의미한다. 오직 의로운 사람만이 다리를 건널 수 있으며 불의한 사람은 불에 타는 형벌을 받는다. 올리버 라세 감독은 자기 식대로 시라트를 광활한 사막 위에 펼친다. 교리대로 의과 불의를 가려 형별을 내리는 형식이 아니라 인물들 앞에 지뢰처럼 고통을 심어놓은 뒤 이 고통을 딛고 ‘어떻게’ 다음으로 넘어갈 것인지에 관해 논한다.
<시라트>를 관람할 때 연상되는 작품은 의외로 <매드맥스>다. 사막을 배경으로 곧게 질주하는 차, 전쟁의 가능성이 암시되는 세계에서 훼손된 신체로 배회하는 이들의 광경은 이미 익숙하다. <매드맥스>에서 모두가 물을 위시한 유토피아를 갈망했듯이 <시라트>에서 루이스 부자는 잃어버린 가족 구성원을, 사막에서 만난 동행들은 음악을 즐길 장소를 찾아 헤맨다. 다만 <시라트>의 인물들은 거듭된 사건으로 자신의 목적을 점점 망각하기에 이른다.
일행이 심취해 있는 음악을 들으며 루이스가 “노래로 들리지 않는다”고 말하자 그는 “당연하지.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춤을 추기 위한 것이니까”라고 답변한다. 당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루이스는 자신의 모든 걸 잃은 뒤 비로소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맡긴다. 다수가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던 오프닝 시퀀스와 루이스와 일행이 상실감에 젖은 채 춤을 추는 후반부 시퀀스는 대구를 이룬다. 그러나 후반부에 들어 춤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왜 춤을 추는가. 왜 춤을 출 수밖에 없는가. 살을 베고 뼈를 깎는 고통에도 어째서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는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왜 눈앞의 길을 걸어 나가야 하는가. 인물들의 몸짓은 ‘시라트’에 담긴 실존적 질문을 형태화해 선보인다. 앞서 칸영화제에서 상영된 마샤 슐린스키 감독의 <사운드 오브 폴링>은 4세대를 거쳐 축적된 여성들의 불안을 감각할 수 있는 장치로 음악을 활용한다. 반면 <시라트>에서 음악은 상실을 넘어 죽음으로 들어서는 감각을 형상화한 것에 가깝다. 모든 것을 잃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 광활한 소리와 고통의 몸부림으로 채워진 지옥도에서 <시라트>는 서서히 죽음을 체험하게 만든다.
2025년 칸영화제 개막 3일차, 남은 영화제 기간 동안 <시라트>보다 더 강렬한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