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이후 2년 만의 개봉이다. 기분이 어떤가.
= <정순> 단톡방이 있어서 늘 인사는 나누지만 다 같이 얼굴 보고 만나기가 어렵긴 하다. 개봉도 개봉인데 오랜만에 감독님이랑 배우들을 만나서 기쁘다.
- 오랜만에 영화를 보니 정순이 왜 영수를 좋아하게 됐을지가 문득 궁금하더라. 영화를 보면 처음부터 묘한 시선을 주고받는 것 같기도 하다. 첫눈에 반한 건지.
= 글쎄… 아무래도 첫눈에 얼굴 보고 반한 것 같진 않고. (웃음) 아마 같은 중년으로서 느끼는 연민에 가깝지 않았을까. 영수가 워낙 숫기도 없고 일도 배워야 하는 위치지 않나. 등산 갔을 때나 백숙 먹을 때 영수의 어려운 개인사를 들었고 집에 가보니 여관 달방에 혼자 사는 것도 보게 된다. 동병상련의 느낌으로 사랑을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첫눈에 반했든 연민의 사랑이든 사랑은 늘 어렵다.
- 초반부의 정순이 탈의실에서 화장 중인 공장 동료에게 “누구한테 그렇게 잘 보이려고 하냐?”라며 능글맞게 놀리는 장면이 있다. 이런 걸 보면 정순은 마냥 선하거나 호감형의 인물이 아니라 주위에서 쉽게 볼 법한 자연스러운 인물이란 느낌이 든다.
= 그렇다.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는 중년의 여인이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똑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똑같은 시간에 딸의 출퇴근을 도와주는, 가끔 등산을 가는 그런 인물이다. 실제 내 성격과 비슷한 면이 있어서 더욱더 그런 자연스러움을 잘 표현할 수 있던 것 같다.
- 어떤 점이 닮아 있나. 지난 인터뷰에선 화를 내는 대신 허허실실 웃어버리는 점을 언급했다.
= 맞다. 그렇게 웃으며 넘기다가 갑자기 쌓여 있던 마음속 깊이 맺힌 마음을 한번에 분출하는 유형이다. 주위 사람들은 좀 놀랄 수도 있다. 또 하나 닮은 점은 사랑에 빠지면 약해진다는 거. (웃음)
- 얼마 전 개봉한 <울산의 별>에선 주인공 윤화를 연기했다. 윤화는 정순과 정반대로 한순간도 목소리를 줄이지 않고 호통만 치는 인물이라는 게 재밌었다.
= 윤화 그 친구는 완전히 활화산이다. 정순이 좀더 섬세하고 여린 캐릭터라면 윤화는 완전히 다른 거지. 두 연기 중에 어느 쪽이 더 편하거나 하진 않았다. 연기야 늘 힘드니까. 에너지를 어떻게 저울질해야 하는지가 워낙 다르다 보니 양쪽의 고충이 다 있었다.
- 정순은 딸에게 져주기도 하는데 윤화는 자식에게 화만 낸다. 실제론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 아들들이 <울산의 별>을 보고 진짜 엄마랑 비슷하다고 말하더라. (웃음) 조용히 하라고 했다.
- 영화에선 정순이 디지털성범죄를 저지른 영수의 잘못을 다소 용서하는 태도를 보였을 때 딸 유진과 가장 크게 다툰다. 이때 정순이 가장 서럽게 울기도 하고.
= 아마 영수의 현실적인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의 차이였던 것 같다. 영수가 이제 자기 빨간 줄 그어지면 일도 못하고 인생이 힘들 거라고 하니까… 중년의 연민으로 시작한 사랑이니만큼 정순도 많이 고민했겠지. 여하간 자식이 엄마 대신 일을 도맡아준다는 게 사실 창피하긴 했을 거다. 게다가 정순 마음대로 어떤 선택을 했다가 딸한테 욕까지 먹으니 얼마나 서러웠겠나.
- 그럼에도 다시 조금 밝은 얘기를 하자면, 정순이 영수와 출근 전에 한 호숫가에 들러서 조용하게 아침 풍경을 만끽하는 장면이 무척 인상 깊었다. 별다른 대사가 없는데도 분명한 애정이 느껴진다.
= 중년을 넘어가면 굳이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 두 사람이 뭐 며칠 계획을 잡아서 어디 여행을 떠날 정도로 풍족한 상황은 아니지 않나. 아침에 그렇게 잠깐 시간을 내서라도 알콩달콩 그냥 사랑을 했다고 생각한다.
- <정순> 이후에 정순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
= 글쎄. 다시 사랑하긴 쉽지 않겠지. 사랑보단 일에 더 집중하지 않을까. 그 동네에만 너무 오래 살았고 운전을 새로 배우기도 했으니, 바깥으로 엄청나게 돌아다니지 않을까. 좋아하는 일도 새로 찾을 것 같고. 아마 해외에 가서 일을 구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어디 외국 남자와 비극 없이 평온한 사랑에 빠질 수도 있고. (웃음)
- <정순> 이후 중년의 사랑을 대표하는 배우가 된 느낌도 든다. 얼마 전 <LTNS>에서 젊은 유부남과 바람 피우는 은미를 연기했다. “누나는 LG랑 기아 다 좋아해”라고 불륜 상대를 혼내는 기막힌 인물이었다.
= 진짜 대사하기 민망하고 미안해서 죽는 줄 알았잖아. (웃음) 하필이면 상대역인 (이)학주씨랑은 다른 작품에서 고모랑 조카 사이로 연기했던 사이여서 서로 더 웃음이 빵빵 터졌다. 언제 어디서나 중년의 사랑은 쉽지 않아.
- <살인자ㅇ난감>에선 영수 역의 조현우 배우와 함께 다시 한번 사랑하는 사이로 나온다. <정순>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흠칫했을 거다.
= 그때도 자꾸 <정순> 생각이 나서 작품에 몰입이 안되더라. 너무 힘들었지. (웃음)
- <정순> 이후 워낙 많은 작품에 참여하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 것 같다. 차후 연기 계획은.
= 얼마 전 촬영 현장에서 고두심 선배님에게 갱년기를 어떻게 지냈는지 여쭤본 적이 있다. 선배는 “일하기 바빴던 터라 그런 거 신경 쓸 새가 있었겠냐”라고 하시더라. 나도 아직 아들 둘 뒷바라지를 더 해야 한다. 자식들을 원망하는 건 절대 아니고. (웃음) 오히려 고맙다. 연기 활동의 가장 좋고 확실한 원동력이 돼주는 것 같다. 허리가 아파도 소처럼 일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