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지만, 마음속엔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히데코. 알 듯 모를 듯 신비한 일본의 귀족 아가씨가 되기 위해 김민희는 일본인 선생에게 일본어와 예법을 익혔다. “다도부터 자세, 걸음걸이, 문 여는 법까지 배웠다. 몸가짐과 행동거지가 달라지더라. 수십벌의 기모노와 드레스들을 착용했는데, 양식 드레스도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이는 의상이라 항상 꼿꼿한 자세로 있는 습관을 들였다.” 처음 배운 일본어는 반복된 노력 끝에 즐길 수 있는 수준이 됐다. “극중 낭독회가 있어, 혼자 일본어 대사를 길게 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자꾸 외다보니 일본어 음성이 귀엽고,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리듬감이 있어 계속 흥얼거리게 되더라.” 히데코를 외화시키는 동시에, 내면에서 체화시키는 것도 그녀의 과제였다. 숙희(김태리) 시점의 1장, 히데코 시점의 2장 그리고 전지적 시점의 3장으로 구성된 <아가씨>에서 히데코는 가장 다양한 스펙트럼을 선보이는 캐릭터다. 그 과정에서 히데코는 여러 시점에서의 모자이크들로 구성되지만, 김민희는 “그 모든 면이 히데코의 진실한 모습”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이런 마음을 갖고 있다가도 저런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혼란에 빠져 감정들이 충돌할 수 있지 않나. 관계와 감정의 미묘한 변화들을 관객이 눈여겨봐주면 좋겠다.”
속고 속이고, 얽히고설킨 관계들 속에서 은밀히 피어나는 동성간의 사랑은 이 영화의 핵심일 것이다. “인물들의 긴장 관계 속에서 든든한 의지의 마음, 고마움, 애증, 여러 감정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어떤 지점에 도달한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이 그안에 다 응축돼 있다.” 히데코가 되어 영화와 호흡한 그녀는 영화에서 교감을 나누는 숙희 역의 김태리에게 애정을 표현했다. “처음부터 태리에게 정이 갔다”는 그녀는 아가씨의 옷을 입혀주고 벗겨주고 씻겨주는 하녀와의 연기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태리는 자기가 먹던 음료의 빨대를 ‘언니, 물?’ 하며 입에 쏙 넣어주곤 했다. 처음엔 ‘어라?’ 하고 받아먹었는데(웃음), 어릴 때는 친구들끼리 아이스크림도 나눠먹지 않나. 태리에겐 그런 순수한 면이 있고, 나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하니 기쁘더라. 연기를 할 때도 서로에게 큰 의지가 됐다.”
파트너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박찬욱 감독과의 호흡도 좋았다. “감독님은 디렉션을 많이 주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해주셨다. 감정을 변주해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고, 좋으면 좋다, 이상하면 이상하다, 명확하게 말씀해주셨다. (웃음) 감독은 배우의 첫 관객이지 않나. 의견이 일치하고 감독님도 만족스러워할 때 기쁘더라.” 박찬욱 감독의 방식은 그녀가 지닌 연기론과도 잘 어우러진다. “나는 연기를 할 때 어떤 틀이나 목표점을 만들어놓지 않는다. 그런 걸 만들어놓게 되면 그 안에 강박적으로 갇히게 되니까. 대신 나는 현장에서 새로운 것들을 폭넓게 흡수하고 감을 느끼며 그 순간순간에 집중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운’을 중요시 여기는 것도 있다. 내가 갖고 가는 것은 언제나 ‘굿 럭, 잘해보자’ 하는 마인드다.”
정해진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대신, 순간에 충실한 그녀는 연기뿐 아니라 연기 인생도 그런 관점에서 접근한다. “나에겐 다음에 뭔가를 해보고 싶다, 어디로 가고 싶다는 목표가 없다. 어떤 것에 특별한 의미를 두기보다는 앞으로도 나에게 오는 기회, 주어지는 것, 만나게 되는 인연들을 감사히 여기려 한다.” 현재 칸에 있는 그녀는 이자벨 위페르 주연, 홍상수 감독의 차기작을 촬영할 예정이다. 이 작품에서의 역할 역시 아직 촬영 순간이 오기 전까진 미정이다. “감독님께서 당일 아침에 시나리오를 쓰시니 내 분량에 대해 아직 잘 모른다. (웃음)” 선 대신 빛과 색채가 여러 번 덧입혀져 질감과 형상을 만드는 인상파의 그림처럼, 스쳐지나간 혹은 아직 당도하지 않은 그녀의 순간순간들은 김민희라는 배우를 빚어내고 있다. 클로드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 속 아스라한 얼굴과도 같이, 본 적 없어도 잊히지 않는 그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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