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에서 그가 연기한 수많은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이 스쳐 지나간다. 먼저 <설국열차>에서 ‘불’이 필요한 절체절명의 순간, 그의 팬들이라면 <판타스틱4>(2005)를 떠올렸을 것이다. 속편인 <판타스틱4: 실버 서퍼의 위협>(2007)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유자재로 불을 다루는 ‘불꽃 남자’ 자니 스톰이었다. 화려한 불길과 함께 하늘을 날던 캐릭터였으니 설국열차의 닫힌 문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도끼와 망치를 들고 복면을 쓴 수십명의 적들이 난데없이 등장했을 때도 <퍼스트 어벤져>(2011)와 <어벤져스>(2012)의 슈퍼 솔저 ‘캡틴 아메리카’였다면 ‘히드라’ 조직원들을 주먹과 방패로 박살내듯 쓸어버렸을 것이다. 홍콩을 배경으로 했던 <푸시>(2009)에서도 손을 대지 않고 물건을 움직이는 염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처럼 주요 필모그래피의 절반 가까이에서 이른바 ‘초능력자’로 등장하는 배우가 있을까 싶다. 슈퍼히어로 코믹스보다는 <톰과 제리>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던 소년의 미래가 이러할 것이라고는 그 역시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설국열차>에서는 불(<판타스틱4>)과 방패(<퍼스트 어벤져>)를 버리고, 철저히 ‘불완전한 개인’이 되는 것이 중요했다. 말하자면 <설국열차>에 이르러서야 그는 비로소 ‘사람’이 됐다. 실제로 그는 현장에서 “난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난 철저히 인간이다”라며 마인드컨트롤을 거듭했다. 엔진으로 향하면서 겪게 되는 피로와 무력감은 ‘직진’과 ‘실시간’이라는 <설국열차>의 드라마에서 무척 중요하다. 당연히 애초의 투쟁심도 옅어지기 시작한다. 동시에 과거 기차에서 벌어졌던 몇번의 굵직한 봉기의 순간,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실패의 기억이 엄습해온다. 바로 그런 순간에 윌포드의 유혹과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지나온 열차칸을 되돌아보게 된다. “커티스는 지금껏 내가 연기한 인물들 중 가장 어두운 캐릭터다. <설국열차>는 내가 배우로서 어떤 ‘심연’을 경험한 작품이다.” 그래서일까, 인터뷰 내내 그가 즐겨 사용한 단어는 ‘particular’다. 감독에 대해, 영화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계속 빠지지 않는 단어였다. 그만큼 <설국열차>는 그에게 ‘특별한’ 영화로 남았다.
크리스 에반스의 최근 행로는 무척 흥미롭다. 1981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나 이른바 ‘엄친아’스러운 길을 걸어왔던 그는, 연기자가 되기 위해 돌연 뉴욕으로 떠났다. 이후 단역과 조연을 오가며 그 스스로 말하길 ‘창피하고 끔찍한 몇몇 작품들’을 거친 다음 <판타스틱4>와 <선샤인>(2007) 등을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그 달라진 위상의 키워드가 ‘캡틴 아메리카’였다면 이제 그는 <설국열차>를 전후로 변신을 꿈꾸고 있다. <펑처>(2011)의 마약 중독 변호사에 이어 <아이스맨>(2012)에서 악명 높은 실존 킬러 리처드 커클린스키(마이클 섀넌)의 동료 킬러, 그리고 <설국열차>가 바로 그것이다. 게다가 그는 곧 연출에도 도전한다. 흥미롭게도 “두 남녀가 기차에서 만나 밤새 뉴욕을 돌아다니는, <비포 선라이즈>(1995)의 뉴욕 버전 같은 영화”다. 현재 출연 중인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를 마무리 짓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의 직진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