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단계부터 장편으로 제작된 건 <이 별에 필요한>이 처음이다. 넷플릭스와 함께하게 되었는데.
= 국내 애니메이션 프로젝트가 OTT에 편성된 사례가 많지 않아서 잘 안되더라도 속상해하지 말자고 계속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넷플릭스와 함께한 영문 계약서가 있는데 그걸 작업 공간에 붙여놨다. (웃음)
- <이 별에 필요한>은 할머니와 우주인이 되고 싶은 손녀의 이야기를 다룬 브랜드 필름 <뭐든 될 수 있을 거야>에서 조각을 빌려왔다. 제작사 클라이맥스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고.
= 주인공 캐릭터가 지금의 난영과 비슷했다. 우주인을 꿈꾸고 주근깨가 있고 내추럴하게 생겼다는 설정 같은 것. 다만 우주인의 꿈을 계승받은 할머니가 <이 별에 필요한>에서는 엄마의 자리로 나타난다.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가 난영과 제이의 사랑으로 전환된 건 제작사에서 로맨스물이면 좋겠다고 강력한 의지를 전해주어서다. 그런데 최근 몇년간 내게도 사랑이란 화두가 무척 중요했던 터라 좋은 기회로 다가왔다. 과거에 깊은 상실을 경험한 여자가 타인을 만나 슬픔을 뒤늦게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우리 모두에게 유년 시절의 연약하지만 섬세했던 기억이 있지 않나. 엄마는 집을 잠깐 비웠을 뿐인데 내겐 너무나 큰 공포처럼 다가왔던 순간들. 나도 모르게 생겨난 결핍을 새로 이해하고 화해해나가는 과정을 그리고자 했다. 사랑이 지닌 인간의 생애주기적 서사랄까. 단순한 연애담이 아닌, 애착 관계의 땅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 영화는 2051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6년 뒤다. 2000년에 상상한 2025년은 여전하기도, 완전히 바뀌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26년 뒤를 상상하면 친숙함 속에 생경함이 묻어날 듯한다. 먼 미래가 아닌 근미래를 상상하는 게 더 어렵지 않았는지.
= 맞다. 초반에 컨셉 회의를 할 때에도 미래를 어느 정도로 설정할 것인지를 두고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다. 다만 나는 변함없이 남아 있는 정서, 그러나 근소한 차이를 지닌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동차가 날아다니는 낯선 미래가 아닌, 너무 익숙한데 한끗이 살짝 달라진 것들에 가깝다. 물론 미래적인 면모도 있다. 특히 움직이는 옷장. 이건 내가 너무 갖고 싶었다. 옷장을 눈에 안 보이는 데 놔두고 싶어서. (웃음) 자율주행 자동차의 경우 현실에서도 실용화 단계에 가까워진 상태다. 사람이 직접 운전을 안 하는 만큼 그 안에서 넷플릭스를 보도록 영화관처럼 디자인하거나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의자 구조를 바꾸는 등 적극적인 컨셉이 제안되고 있다고 한다. 차량이나 도시의 생김새는 완전 제로 베이스에서 상상하기보다 실제 변화하는 트렌드를 참고했다.
- 난영이 제이를 처음 만난 건 자신의 턴테이블을 고치기 위해 종로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부딪히면서다. SF지만 여전히 턴테이블을 수리하려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좇는다.
= 2000년대의 것들이 지금 다시 유행하는 것처럼,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들은 여전히 사랑받고 그리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난영은 턴테이블을 고치러 종로 일대를 돌아다니지만 부품이 없다는 말만 반복해 듣는다. 내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필름 카메라나 턴테이블을 고치려는데 부품이 없으면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소용이 없다. 최첨단 세계에서도 이 지점은 여전히 작용할 것 같았다.
- 이번 작품도 빛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본래는 2D 셀애니메이션을 작업하는데 이번에는 3D 기술을 접목했다.
= 최종 형태는 2D이지만 프리비즈 단계에서 3D를 활용해 여러 예시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앉아 있는 인물 위로 빛이 돌아갈 때 이 풍경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빛의 움직임이나 질감을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지 계속 체크했다. 혼자였다면 불가능한 과정이었다. 이전에는 빛의 형태를 내가 직접 그릴 수 있는 반경 안에서 표현했다. 심지어 플레어라는 빛 효과도 전부 손으로 그렸다. (웃음) 근데 이제는 촬영 전문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2D 그림에 3D를 오가면서 보완하는 방식으로 업그레이드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하늘빛은 제이와 난영이 옥탑에서 메모장을 주고받는 장면. 뒤에 붉은 전광판이 있고 모노레일이 지나가면서 빛이 닿는데, 이건 정말 이번 작품에 꼭 넣고 싶었던 찰나다.
- 특히 아침, 오후, 저녁, 새벽 모든 시간대의 빛이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심지어 “악몽은 햇빛으로 날려버려야” 한다는 제이의 말에 빛이 운동하는 느낌마저 준다.
= 제작 초반에는 저녁 풍경이 대부분이었다. 난영의 타임라인을 생각했을 때 낮에는 일하니까 저녁이 되어야 제이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웃음) 그런데 다양한 시간대의 풍경이 나와야 덜 답답할 것 같았다. 미술 단계에서 김성민 감독님과 배두호 작가님의 힘을 많이 빌렸다. 또 목소리 연기를 해준 김태리, 홍경 배우가 자연스러운 애니메이팅 작업을 위해 직접 난영과 제이를 연기해볼 땐 박홍열 촬영감독님이 촬영해주셨다. 두호 작가님, 홍열 감독님과는 하늘을 어떻게 작업해야 할지 새벽 1시까지 얘기하기도 했다. 그게 내 결혼식 전날이었다. (웃음)
- 누군가는 한지원 감독을 두고 제2의 신카이 마코토라는 평을 남기기도 한다. 이 말은 한지원 감독 스타일을 설명하는 데 편리한 표현이지만 동시에 특정한 제한을 만들기도 한다.
= 나 또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무척 좋아한다. 대학생 시절 그의 단편을 자주 보면서 감명받기도 했고. 다만 나는 신 감독님(웃음)과 많이 다르다. 특히 <이 별에 필요한>은 이 작품만의 개성과 생김새를 만들기 위해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장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이기도 했고. 작업 과정에서 우리만의 공정을 만들기 위해 정말 많은 실험과 시도, 고생과 고난을 거쳤다. 우리 팀원들 고유의 특성을 완성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 지점을 많이 읽어봐주면 좋겠다.
- 뮤지션이라는 제이의 설정만큼 음악도 영화의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특히 난영과 제이가 각자의 시간선에서 각자의 사력을 다할 때, 가 흘러나오며 감정을 고조시킨다. 이 노래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 이번 프로젝트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작업했던 게 음악이다.(웃음) 박성준 음악감독님을 처음 뵌 날, 부담 갖지 말라고 말씀드리면서 부담을 막 드렸던 기억이 난다. <이 별에 필요한>은 어떤 점에서 SF보다 음악 영화에 가깝기도 하다. 그런데 너무 신기하게도 박성준 음악감독님과 작업하면서 거의 모든 의견이 일치되었다. 특히 가사 중 “본 보야지”(Bon Voyage)라고 말해주는 부분이 너무나 좋다. 난영과 제이의 많은 것을 담은 것 같아서. 수많은 샘플을 들었지만 이 노래를 듣는 순간 다른 것은 다 수정되어도 이 부분만큼은 멜로디와 대사가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김태리, 홍경 배우와의 작업 과정은 어땠나. 처음 예고편이 공개됐을 땐 더빙에 대한 아쉬운 의견이 많았지만 전편에서는 각 인물의 감정을 그대로 체화해낸다.
= 애니메이션 더빙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 그중에서 실제 이런 사람이 어딘가 존재할 것만 같은 결을 살리고 싶었다. 감정을 아주 섬세하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그런 점에서 김태리, 홍경 배우가 본능적으로 감정을 눈에 보이게 연기해줬다. 영화 감독이 촬영 들어가기 전에 콘티를 짜는 것처럼, 애니메이터도 더빙 전에 많은 장면을 구상한다. 어떤 움직임이 목소리에 반영되면 좋을까, 어느 정도로 소리쳐야 할까. 연기와 기획이 분리될 수 없는 상황에서 두 배우의 현실적인 연기가 녹아들어서 무척 좋았다.
- 두 배우가 진짜 난영과 제이 같았다고 느낀 장면을 꼽는다면.
= 싸우는 장면. 그리고 의외로 일상적으로 장난치는 순간들. 두 배우가 난영과 제이에 정말 깊이 빠져들었다. 홍경 배우는 머릿속에 사람을 빚는 것 같다. 제이라면 이렇게 할 것 같다며 현실적인 모습들을 발전시켜주셨다.
- 마지막으로 다음 차기작은 어떤 작품인가.
= <이 별에 필요한> 마라톤을 함께 완주한 클라이맥스 제작사와 차기작 기획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 별에 필요한>이 SF라고는 하지만 본격 판타지는 아니다. 현실적인 땅을 딛고 있는데, 다음 작품은 정말 본격적인 판타지를 해보려 한다. 모험 활극! 주인공 소녀가 여러 인물을 만나게 되는 과정인데 그 과정에 자신에 억눌린 감정을 표출하게 된다. 여러 크리처와 내면의 여정이 담길 예정이다. 너무 밝거나 착하지만은 않은, 성인 타겟의 작품이 될 예정이다. 또 저희 언니가 람한 작가인데 이번 작품을 함께 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