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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이야기의 수입·수출은 여러모로 득이 커서 - 지금 한국 제작자들이 국제 공동제작에 뛰어드는 까닭은
남선우 2025-08-29

한-베 합작영화 <러브 바리스타> 현장.

김성훈 감독(<공조> <창궐>)이 연출하고. 이광수 배우가 주연한 로맨틱코미디 <러브 바리스타>가 한국보다 베트남 개봉 날짜를 먼저 확정했다. 시작부터 베트남 시장을 염두에 둔 영화였기 때문이다. 한국인 감독이 구상한 러브 스토리를 베트남 대중의 구미에 맞게 요리하기 위해 한국 제작사 제리굿컴퍼니, 영화사이창, 웨스트월드와 베트남 제작사 SATE(Sidus And Teu Entertainment)가 힘을 합쳤다. 호찌민에서 조우한 한국 톱스타와 베트남 여성의 사랑을 그린 결과물은 10월3일 베트남 관객을 먼저 만난 뒤 올해 하반기 안에 한국 관객을 찾을 예정이다.

<러브 바리스타> 외에도 최근 국내외 영화인들의 협업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안도 사쿠라 배우의 캐스팅으로 화제가 된 정주리 감독 신작 <도라>는 프랑스와 공동제작에 돌입했다. 제이앤씨필름은 스포츠 영화 <블라인드 러너>를 위해 중국과 손잡았다. 하얼빈을 무대로 시각장애인 알파인 스키 선수 이야기를 펼치기 위해서다. 중국염정법제연구회 영상문화센터가 지원과 협력을 약속했다고 한다. 한편 K팝은 당분간 합작영화의 단골 소재가 될 듯하다. 하이브 아메리카와 파라마운트 픽처스는 걸그룹 지망생의 오디션 도전기를 실사로 찍는다. 이 프로젝트에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조이 역으로 목소리 출연한 배우 유지영이 합류했다. 아티스트스튜디오도 영국의 이매지네리엄 프로덕션과 아이돌 연습생으로 위장한 비밀 요원을 주인공 삼은 첩보물을 기획 중이다. 스크린뿐 아니라 드라마 공동제작도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디즈니+ 시리즈 <무빙>을 만든 미스터로맨스는 프랑스의 스튜디오 카날과 <암흑가의 세 사람>을, SBS 자회사 스튜디오S는 일본 최대 통신사 NTT도코모와 요시모토흥업의 합작법인과 함께 <스토브리그>를 리메이크한다. 지난해 가을부터 올여름까지 들려온 뉴스만 나열해도 이 정도다.

한국 밖 기회의 땅을 찾아서

<암흑가의 세 사람> 리메이크하는 미스터로맨스와 스튜디오 카날.

국제 공동제작은 새로운 사건이 아니다. 다만 이전 사례들과 지금의 접근법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일본, 중국 등 시장 규모가 큰 국가와 대작 위주로 협업했고, 20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한류를 등에 업고 공동제작 유형 및 국가를 다변화하며 해외 진출을 꾀했다면, 현재 공동제작에 나서고 있는 제작자들은 “더 이상 한국 시장에서 활로를 찾기 어려워” 타국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극장가가 좀처럼 회복세를 보이지 않는 데다 AI나 플랫폼 사업과 같은 미래 산업에 자본이 쏠리면서 영화를 위한 펀드 결성이 늦어지고 있다. 영화가 더는 투자가치가 높은 상품으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드라마도 비슷한 상황이다. 국내 히트작을 수출해 해외 각지에서 수익을 낼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으로부터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보전받지 않는 이상 제작비 자체를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OTT의 득세로 TV 영향력이 줄어 PPL의 효력이 의심받는 현실도 제작비 조달에 악영향을 끼친다. 다시 말해 포화 상태였던 한국 영상업계의 거품이 팬데믹을 계기로 꺼졌다. 제작자들은 새 싹을 틔울 기회의 땅을 물색해야만 하는 것이다.

주요 타깃은 한국 콘텐츠에 대한 신뢰가 뿌리내린 동시에 성장 가능성이 큰 시장. 그 대표 격인 나라가 바로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이다. 두 국가는 2024년 국내 최고 흥행작인 <파묘>가 한국 다음으로 관객 몰이를 한 곳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1190만 관객을 기록한 <파묘>가 인도네시아에서 260만, 베트남에서 240만 관객을 돌파한 덕분에 <파묘> 제작자 김영민 프로듀서는 해당 지역 영화계로부터 많은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베트남과 공동제작해 올해 하반기 개봉을 앞둔 작품이 <개묘>(가제)다. 김영민 프로듀서에 따르면 지금 베트남, 인도네시아 영화계는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를 연상”시킨다. 인구가 젊고, 극장이 확대되는 양상이 또렷해 자국영화가 호황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마더> <옥자> 프로듀서이자 드라마 <태양의 후예> <힘쎈여자 강남순> 제작자인 서우식 바른손C&C 대표 또한 같은 이유로 인도네시아를 1차로 눈여겨볼 시장으로 꼽았다.그가 다음으로 거론한 곳은 중국 그리고 중동 지역이다. 지난 8월19일, 일명 ‘광전총국’으로 불리는 중국의 미디어 감독기관 국가광파전시총국이 해외 우수 콘텐츠의 도입 및 방송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국내 콘텐츠 업계 관계자들은 사드(THAAD) 배치로 인한 갈등 탓에 암암리에 퍼진 한한령(限韩令)이 완화되는 것 아니냐는 희망을 품고 있다. 더불어 중동은 동남아시아 시장과 마찬가지로 젊은 인구의 씀씀이가 크다는 점, 기후로 인해 쇼핑몰을 중심으로 한 멀티플렉스 관람 문화가 여전하다는 점, 자국영화계 성장세도 가파르다는 점에서 각광받고 있다. 이슬람 규율에 입각해 상업적인 영화 상영을 금지한 35년의 세월을 지나 2018년부터 극장 문을 다시 연 사우디아라비아가 한 예다. 정부 차원에서 자국영화 제작을 뒷받침하고자 설립한 레드씨영화재단(Red Sea Film Foundation)은 중동·북아프리카(MENA)를 비롯한 세계 전역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공동제작을 도모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오래전부터 유럽, 중동 국가들이 그래왔듯 한국 또한 2개 이상 국가의 공동제작 흐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진단도 잇따른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간한 ‘2024 아시아 영화공동제작 현황과 지원방안’ 보고서는 “2020년대 이후 ‘IP와 인적자원’을 중심으로 4~8개국의 다국적인 국제 공동제작을 진행하는 방식”이 대두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미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이 팬데믹으로 인한 자국영화 시장 침체를 돌파하기 위해 국제 공동제작 기금제도를 마련했다. 이는 유럽의 프로젝트 마켓, 소프트머니 기금 등과 연결돼 독립영화 신의 다국적 합작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단순 리메이크 아닌 신선한 전략 필요

PGK와 APROFI의 MOU 체결식 현장.

한국의 공동제작 파트너 선택지가 늘어나는 동안 공동제작 유형도 다양해지고 있다. <7번방의 선물> <수상한 그녀> <위대한 소원> 등 2010년대 한국 흥행작이 아시아권에서 리메이크돼 성공을 거둔 경우가 주목받았지만 이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감돈다. 당장 8월 베트남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엄마를 버리러 갑니다>도 한국인 모홍진 감독이 처음부터 베트남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개발한 작품이다. 서우식 대표도 지난해 개봉한 장윤현 감독의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를 인도네시아와 대만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제 단순한 리메이크의 유효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몇년 전부터 한국 IP의 금액대가 올라 현지에서 구매 매력을 못 느끼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가 개발비를 선투자하는 등 현지에서 IP를 공동개발하는 형태로 전략을 바꿨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함께하는 방식은 물론 촬영, VFX, 특수분장 등 한국이 상대적으로 앞선 분야로 부분적인 진출을 이룬 뒤 공동제작으로까지 관계를 발전시키는 대안이 검토되고 있는 것이다.

김영민 프로듀서는 거꾸로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인기를 끈 IP를 한국 관객에게 소개할 수 있는 사례도 만들어보고 싶다고 귀띔했다. “최근 한국에도 해외영화 리메이크작이 많다. 특히 스페인영화가 원작인 <히든페이스>, 캐나다-미국 합작영화가 원작인 <핸섬가이즈>가 호응을 얻었다. 슈퍼 IP를 리메이크할 때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가 있는 반면 덜 알려진, 그러나 해당 국가에서 흥행을 거둔 이야기는 어느 정도 품질이 보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일환으로 5년 전부터 프랑스 코미디 <폴레트의 수상한 베이커리>를 한국에서 리메이크하려고 시도해왔다. 내년에 촬영하려고 준비 중이다.”

<당신이 잠든 사이>

국내외 영화계간 네트워크 확장에는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PGK)이 앞장서고 있다. PGK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국제 공동제작 핫라인’(International Co-production Hotline)을 공개했다. 한국과 공동제작을 원하는 프로젝트를 한 페이지로 요약해 메일로 보내면 PGK가 1주일 안에 회원 250여명에게 배포하고, 이에 관심 있는 PGK 회원이 제안에 직접 응하는 프로세스다. PGK는 인도네시아(APROFI), 홍콩(HKMPEA), 브라질(SICAV)의 영화제작자협회와 각각 MOU를 체결해 양국의 프로듀서들이 공동제작에 협력하자는 약속을 다지기도 했다. 올해 하반기에는 중국, 홍콩 프로듀서들과 ‘Made in Asia’라는 기치 아래 아시아 시장을 목표로 하는 공동제작 프로젝트들을 논의할 계획이라고도 한다.

프랑스와 합작영화 <도라>를 제작하는 영화사 레드피터 대표이자 PGK 대표인 이동하 대표는 “한국에도 국제 공동제작 매칭펀드 등이 만들어진다면 좀더 활발한 교류가 이뤄질 거라고 생각한다”며 기대를 표했다. 그는 지난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찾은 가에탕 브뤼엘 프랑스 국립영화영상센터(CNC) 대표의 말을 인용하며 덧붙였다. “CNC 대표가 부천에서 강조했듯 영화 프로듀서들이 갖고 있는 경험과 위기의식을 공유하는 네트워킹의 장이 필요하다. 한국의 훌륭한 창작자와 배우들이 역량을 펼칠 수 있는 해외 프로젝트들이 많다. 한국 영화시장이 힘든 시기지만 풍부한 제작 경험을 갖춘 프로듀서들이 해외 크리에이터들과 함께 기회를 찾아야 할 때다.”

<폴레트의 수상한 베이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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