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이 나이든 의사 선생님은 차림새부터가 심상치 않다. 하얀 양복, 하얀 중절모, 검은 나비 넥타이, 그리고 검은 가방은 태평양전쟁의 후방기지 구실로 피폐한 바닷가 마을 한복판을 누비기에 왠지 어색하다. 게다가 그는 머리 속으로 중얼거리며 끊임없이 달린다. “의사는 발이 생명이다. 한 다리가 부러지면 다른 다리로 달리고, 두 다리가 부러지면 손으로 달리고, 죽기살기로 달리고 또 달리고 죽을 때까지 달려야한다.”
<간장 선생>의 기묘한 주인공 아카기 선생이 배고픔과 노동에 지친 마을 환자를 돌보는 마음씨는 이처럼 극진하고 한결같다. 너무 올곧아서 재미없다 싶은 인물이지만 머리가 아니라 발이 의사의 생명이라는 지론이 범상치 않다. 도쿄대 의대 출신의 그는 보는 사람마다 간염 진단을 내리는 바람에 돌팔이라고 오해 받는데, 무더기 간염 진단의 진위가 밝혀질 무렵 영화는 새로운 전선을 만들며 흥미를 더해간다. 그 한쪽이 아카기 선생과 한가족처럼 지내는 인물들인데, 한결같이 문제적 인간이다.
천진함과 관능미를 동시에 가진 처녀 소노코는 게이샤였던 어머니의 평소 가르침에 따라 딱 한명의 사랑하는 남자를 빼놓고는 절대 공짜로 자지 않는다. 소노코는 아카기 선생의 조수로 일하게 되는데 점차 중년의 그를 `딱 한명의 남자'로 여기게 된다. 우메모토는 승려이지만 지독한 술꾼에 매춘부 출신의 여인을 아내로 두고 있고, 토리우미는 뛰어난 외과의사이지만 몰핀에 중독돼 흐느적거리며 산다.
또 일본군 장교들의 전용술집을 운영하는 마담 토미코는 소노코에게 서슴없이 매춘을 알선하는 장사꾼이지만 아카기 선생 일행이 위기에 처했을 때 온몸을 던져 구해내는 정의로운 속내를 갖고 있다. 이들의 반대쪽 무리는 군국주의와 속물근성, 변태로 뒤범벅된 일본군 장교들로 간염이란 전염병을 일으키는 병균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75)의 <간장 선생>은 경쾌한 유머로 일관하지만 그 속에서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마약과 매춘과 파계를 정당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구도 때문이다. 이 긴장을 유머와 부드럽게 조화시키는 건 인생의 황혼기에 선 감독의 넉넉한 시선이다. 감독은 돌팔이라 오해받을지언정 병의 근원을 꿰뚫어보는 또 다른 아카기 선생이 되어 `진짜 아름다운 삶은 이런거야'라고 백일몽같은 장면을 과감하게 펼쳐보인다.
이런 근거는 <나라야마 부시코>(198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분명해진다. 늙은 부모를 내다버리고, 음식을 훔친 일가족을 생매장해야 자기 생존이 가능한, 인간의 잔혹한 실체에 대한 탐구는 충격적이었다. 또 동물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묘사된 인간의 성관계는 처절했다. <우나기>(1997년)에서 인간의 관계맺음에 대한 짙은 회의는 여전했지만 차분한 화면 속에 조그만 희망을 담더니, <간장 선생>(1998년)에 이르면 인간사의 온갖 풍파를 오래도록 지켜봐온 거장의 지혜로운 숨결이 샘솟는다.
<간장 선생>에 여유로 녹여낸 그 정신은 올해 칸영화제 경쟁작으로 내놨던 <붉은 다리 밑의 따뜻한 물>에서 절정을 이뤘다. 현인같은 노숙자를 통해 인간의 굴레를 비웃는 유머는 더욱 거리낌없어졌고, 절로 웃음짓게 만드는 정사 장면을 통해 순수한 쾌락은 가능하다며 이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간장 선생>은 비극적인 <나라야마 부시코>와 낙천적인 <붉은 다리…>의 먼 거리를 잇는 징검다리다. 16일 개봉.
이성욱 기자lewoo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