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호 감독이 돌아왔다. 80년대 최고의 흥행사에서 90년대 고독한 작가주의 감독으로 선회했던 배창호 감독이 이제 먼 길을 돌아 다시 젊은 관객들과 만난다. 배창호 감독의 표현을 빌자면, <흑수선>은 ‘대형 벽화’인 셈이다. 그 사이 초상화(<러브스토리>)도 그려보고 풍경화(<정>)도 그려 봤으니, 이제 대형벽화를 그리고 싶다는 것. <흑수선>에 대한 배창호 감독의 각별한 사랑 이야기를 들어 봤다.
부산영화제 예매 개시 직후에 매진돼 화제가 됐다. 감회가 새로울 텐데.
- 기분 좋지만, 좀 우려가 된다. ‘재미’만을 추구한 영화는 아닌데, 관객이 그것만 기대하는 건 아닐까 해서. 미스테리 스릴러라는 장르적 운반수단을 통해서 조금 진지한 얘기를 전달하고자 했다.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는 것이 감독 개인에겐 어떤 의미인지.
- 부산영화제가 해를 거듭하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그런만큼 국내외적인 관심이 쏠리는 자리라서, 영화의 위상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대중성은 물론이고, 작품성에 있어서도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개막작 선정 사실이 좋은 자극이 됐다. 그 때문에 후반작업도 더 열심히 하게 된 것 같고.
제작 발표 당시, ‘배창호 감독이 블록버스터를 만든다’는 사실에 관심이 집중됐었다. 뭔가 다를 거라는 기대에서다.
-한상준 프로그래머가 90% 가편집본을 보고 그러더라. 배창호 감독 영화라고. 어떤 스케일로 또 어떤 스타일로 만들더라도, 내가 인간을 보는 시각, 형식적인 리듬감, 절제적인 요소들, 자연을 이용하는 방식 같은 것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이번 영화에서도 달빛이나 햇살, 그림자, 바람, 안개, 비 같은 자연적인 요소들에도 이야기와 감정을 담으려고 했다. 같은 액션이라도 인간의 정서와 연결지어 보여주려 했고.
미스테리 스릴러라는 장르와 휴먼 드라마적인 메시지를 어우러지게 하는 일이 연출의 관건이었을 것 같다.
- 촬영 당시에도 이야기했듯이 ‘종합문제’를 푸는 심정이었다. 이 영화에는 드라마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 사건도 많고, 시대도 왔다 갔다 하고, 캐릭터 소개도 해 줘야 하고, 복선도 갈등도 많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처음 생각보다 ‘깊이’가 생겼다. 이상하게 제작자도 그걸 바라더라. 진국을 끓여서 기름기를 걷어냈다고 할까.
큰 촬영이 많았는데, 어떤 신이 특히 힘들었나.
- 탈출 포로들이 폐교 바닥의 땅을 파다가 수맥을 건드리는 장면이 있다. 2분 분량인데, 그 장면을 일주일 동안 찍었다. 배우들이 수영을 못해서 많이 힘들어 했고, 감독이 물 속에 들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이라,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배우들과의 호흡은 잘 맞았나.
- 안성기씨를 제외하곤, 서로 잘 모르는 상태라, 처음엔 좀 서먹했다. 그런데 미연씨도 좋은 의견을 많이 내 줬고, 정재씨도 감독을 신뢰해주고 잘 따랐다. 안성기씨 덕에 내가 좀 편했다. 현장에서 솔선수범하니까, 내가 편했지. 우리 부감독이었다.(웃음)
<최후의 증인>이라는 소설과 영화가 원작이라고 들었다. 원작의 어떤 점에 끌려서 영화화를 결정했나. 각색 포인트가 있었다면.
- 이야기의 뼈대는 같지만, 범인은 다르다. 원작의 허무적인 분위기를 지우고, 역사에 상처받고 희생당한 두 남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원작은 이야기의 주공간이 빨치산인 반면, <흑수선>은 거제포로수용소로 접근했다는 점도 다르다. <텔미썸딩> 같은 형사영화가 대중적 인기 장르로 자리잡고,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전쟁이 낳은 남과 북의 현실, 그런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를 다룬 영화가 등장하는 걸 보면서, ‘이제 때가 됐다’는 생각을 했었다.
거제포로수용소를 이야기의 주공간으로 끌어들인 이유도 그런 맥락인가.
- 처음엔 우연히 그렇게 됐다. 작년 8월에 거제도로 여행을 와서, 포로수용소 기념관에 들렀는데, 다시 지어 놓은 막사들을 보면서,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최후의 증인>이 떠오르더라.
<제17포로수용소>나 <콰이강의 다리>나 <대탈주>처럼 2차대전을 다룬 고전영화들이 있잖나. 이 공간이라면 그처럼 의미도 담기고 시각적으로도 충분히 강렬한 영화를 찍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엔 어느 정도 만족하는지.
- 만족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때론 능력이 부족해서, 때론 시간이 부족해서, 때론 판단이 성급해서, 제대로 못한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느냐, 열정을 갖고 임했느냐의 잣대로 답하자면, 만족한다. 대중영화 속으로 7년만에 들어왔다. 관객이 많이 까다로워졌다는 걸 느낀다. 그동안 내가 안일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이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차기작 계획을 묻기엔 좀 이르지만, 다음 행보가 정말 궁금하다.
- <흑수선>의 결과에 관계없이, 또 내가 하고 싶은 영화를 할 거다. 아주 강렬한 영화가 될 거다. <흑수선>처럼 현대적인 기법이면서, 한국적인 색깔을 지닌 그런 작품.
글 박은영·사진 오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