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트루먼 쇼>에서 주인공은 30년간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거대한 세트장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 모든 것이 연출되고, 모든 사람이 배우이며, 심지어 날씨조차 조작되는 완벽한 가짜 세상. 하지만 주인공에게 세트 안의 세상은 더 진짜 같은 현실이었다.
“여기 메이저 없어요? 메이저 언론부터 질문하란 말이야.”
4월24일 여의도 자유통일당 당사에서 열린 전광훈 대선 출마 기자회견. 자신에게 비판적인 기자를 끌어내라는 전광훈 목사의 호통이 이어졌다. “너 나가! 나가라고! 오늘은 내가 주인공이야.”
숨겨진 카메라가 트루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국회에서도 수십대의 렌즈가 돌아가고 있었다. 여당 원내대표가 여기자의 손목을 잡고 20~30m를 끌고 가는 장면. 뷰파인더 너머로 보이는 피사체의 민낯. 카메라는 그 순간을 정확히 포착했다. 누군가는 이것을 ‘뉴스’라고 부른다.
“방탄유리를 설치하고 연설하는 제 마음은 편할 것 같나.”
5월21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비판에 대해 직접 항변하며, 점퍼 속에 입은 방탄조끼를 공개했다. 이에 대해 국민의힘 대선후보 김문수는 “국민 여러분이 제 방탄조끼라고 생각한다”고 에둘러 비판 했다.
김문수 후보의 “국민이 방탄조끼” 발언 역시 자신이 진짜 국민 후보라는 상징성과 동시에 이재명이 위험한 정치인임을 부각하려는 전략이다. 하지만 이 발언 역시 ‘이재명’을 상징화된 인물로 만든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처럼 실제 피습 사건을 겪은 인물이다. 방탄조끼와 방탄유리로 무장한 유세는 ‘정치적 폭력의 피해자’라는 내러티브를 강화한다.
“감독님, 오늘 촬영이 마지막일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생각의 흐름이 멈춰버렸다.
탄핵 이후 지루해하는 스태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하듯 정치의 무대에서도 같은 서사가 끊임없이 재연된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주인공만 바뀔 뿐이다. 결국 반복에서 오는 작은 차이들이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겨울이 가고 다시 한남동으로 왔다. 하나의 계절일 뿐이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관저 앞으로 이동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작별 인사를 위해 모여 있다. 손안에 작은 선물을 가지고 들떠 있는 지지자도 보였다. 윤 전 대통령은 잠시 멈추고 차량에서 내려 여성 지지자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넘겨받은 빨간 모자를 눌러 썼다. ‘Make Korea Great Again.’
순간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울고 있는 한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의 눈물을 보며 놀란 아이가 따라 울기 시작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찬바람에 섞여 메마르게 들렸다.
5월23일, 대선 2차 토론회.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가 동덕여대 사태를 언급하며 민주당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3차 토론회, 문제의 ‘젓가락 발언’이 터져나왔다.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에게 던진 유도 질문이었지만 방송사 카메라들이 일제히 이재명을 향했다. 그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가, 이내 미소를 되찾았다.
세트장의 벽에 부딪혀 가짜 세상의 경계를 발견하는 순간처럼, 계엄이 주도한 21대 대선 토론회는 ‘정치’라는 거대한 무대의 균열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순간들이었다. 완벽하게 연출된 듯한 정치적 수사들 사이로 예상치 못한 진실의 파편들이 새어나왔다.
“위대한 국민이 위대한 승리를 만들어주셨습니다.”
6월3일, 여의도광장 앞은 당선인 지지자들로 가득 찼다. 거리는 응원 봉의 물결로 이어졌다. 당선 유력에서 확정으로 표기가 바뀌자 불빛 역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길어지며 국회 로텐더홀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비대칭과 형으로 둘러싸인 그 공간에서,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위해 오른손을 들었다. “나 이재명은… 굿모닝, 굿애프터눈, 굿이브닝.”
대통령의 취임사가 시작되자 주변의 진동이 시작되었다. 그 울림 때문에 카메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국회라는 세트장에서, 계엄이라는 거대한 쇼가 끝나고, 새로운 트루먼 쇼가 시작된 것이다.
취임식을 마치고 대통령이 국회 밖으로 이동하자, 유튜브 라이브를 지켜보던 경비원들이 김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다. “다른 데 뭐 하지?” 클릭. “몰라.” 클릭. 그들은 빠르게 다른 채널로 눈길을 돌렸다. 클릭.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