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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에게
사랑하는 여인 권(서영화)을 찾아 방문한 여행자라는 사실 정도가 당신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솔직히 말해 뭘 더 알겠습니까. 그래서 당신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인상적인 장면들에 대해서만 허물없이 몇자 적습니다.
당신이 술자리에서 서양 친구에게 “당신 처는 정말 훌륭하다”고 거듭 말하면서 “누구라도 이 가정을 파괴하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고 있지도 않은 심각성을 과장하여 말할 때, 붉어진 당신의 얼굴과 우왕좌왕하는 그 말과 시선과 몸짓과 거기서 느껴지는 상실감은 당신을 조금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아주 측은하게 보이게 했습니다. 반면에 상원(김의성)과 함께 술을 마신 뒤 어깨를 겯고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올 때에는 동네의 골목대장들처럼 구는 그 순진한 우정의 행세가 보는 사람까지도 괜히 기분 좋고 으쓱하게 해주었습니다. 물론입니다. 당신의 확고한 성찰도 기억합니다. 영선(문소리)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당신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건 사실 우리의 뇌가 만든 틀
당신은 제게 몰(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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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언덕>의 모리(가세 료)는 일본인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한국인 권(서영화)입니다. 둘은 2년 전 서울의 한 어학원에서 강사를 하면서 만났습니다. 그때 모리는 권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모리는 일본으로 돌아갔고 권은 몸이 아파 요양을 갔습니다. 하지만 모리가 권을 찾아 다시 북촌에 왔습니다. 그가 권의 집 인근 게스트 하우스에서 머물며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돌아온 권은 모리가 어학원에 맡겨놓은 편지를 읽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권을 기다리는 동안에 있었던 모리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모리는 몇 사람을 만납니다. 게스트 하우스의 여주인(윤여정), 그녀의 조카 상원(김의성)과는 마음을 터놓는 친구가 됩니다. 인근 카페의 여주인 영선(문소리)과는 특히 더 가까워집니다. 모리가 길 잃은 영선의 강아지 꾸미를 찾아주면서 둘의 관계는 더 깊어지는데 모리는 주저하면서도 영선의 쾌활함과 상냥함에 반하게 됩니다. 한편, 모리의
따로 또같이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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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뀔 때쯤 홍상수의 영화를 기다리는 건 이제 우리의 어떤 삶의 방식이 되었다. 올가을에는 <자유의 언덕>이라는 홍상수 영화가 온다. 그 <자유의 언덕>에 관한 네개의 편지를 여기 묶었다. 서로 다른 필자가 <자유의 언덕>의 사물과 인물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다. 네개의 편지글을 안내하기 위한 전문이 별도로 있기는 하지만 영화를 보기 전 읽는 당신이라면 궁금한 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될 거라고 우린 생각하지 않았다. 이 특집 기사는 두 부류의 감상자를 적극 고려했다. 기사를 읽고 궁금증 때문에 극장으로 향할 감상자와 영화를 보고 나와 무언가 풍성한 글을 읽고 싶은 감상자들을 고려하여 작성했다. 그리고 감독 홍상수, 배우 가세 료와 나눈 값진 필담을 덧붙였다. 여러분의 가을을 <자유의 언덕>으로 시작하기를 진심으로 권한다.
당신의 가을과 동행하길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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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시양(1987년생)
가까이서 보니 용주보다 훨씬 날카로운 얼굴선을 가졌다. 첫 작품 <야간비행>을 끝내고 살이 많이 빠진 탓이다. “어떻게 해야 연기를 더 잘할 수 있을까 그 생각밖에 안 들어요. 힘겹게 계단 하나를 올랐는데 금세 또 계단을 만난 것 같아요. 근데 신기하죠. 연기가, 현장이 너무 재밌어요.” 어디에 몰두해 재미를 느끼면 더 파고드는 성격이라는 그는 “평생 하고 싶은” 즐거움, 연기와 이제 막 만났다.
필모그래피
뮤직비디오 박봄 <You And I>, 드라마 <기분 좋은 날>
<야간비행> 이 장면
포장마차에서 용주가 엄마와 마주 앉았다. 아들의 속내를 전해들은 엄마가 용주에게 전하는 말이 울림을 준다.
이재준(1990년생)
못 알아볼 뻔했다. 짧은 머리에 거뭇한 수염이 난 차가운 얼굴의 기웅을 생각했는데 해사하게 웃는 이재준이다. “실제로 보면 되게 착해 보여요. 온실 속의 화초 같달까.” 감독의 말대로다. 세
<야간비행>의 배우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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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에는 <야간비행>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 폭력을 줄기차게 말해온 이송희일 감독이 <야간비행>으로 학교 속 폭력의 먹이사슬을 들여다봤다. 그곳의 학교는 폐쇄되어 있고 그 속의 소년들은 모두 다 외롭고 아프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들은 모두 잘 살아가고 있을까. 영화 속 소년들을 대신해 누구보다도 그들을 이해하려 애썼을 출연배우 다섯명을 만나보기로 했다. 청춘배우들의 입을 빌려 그들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듣다보면 자연스레 <야간비행>의 아이들도 살아 움직이지 않을까. 이송희일 감독이 전해준 영화에 관한 짧은 코멘터리와 배우 5인방이 꼽은 <야간비행> 명장면도 덧붙인다.
우등생 용주(곽시양)는 같은 반 친구이자 일진인 기웅(이재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다. 이들과 중학생 때부터 친구였던 기택(최준하)은 반장 성진(김창환) 무리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한편 용주를 마음 깊이 아끼는 준우(이익준)
결핍을 채우는 건 결국 우정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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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시키지 않는다. 본인은 특별히 잘하는 장르는 없다고 겸양을 보이지만 어떤 장르라도 본인의 색으로 소화해버린다. 적어도 오락영화가 지녀야 할 감에 있어서 이만큼 확실히 믿음이 가는 감독도 드물다. <타짜-신의 손>(이하 <타짜2>)으로 돌아온 강형철 감독은 또 한번 본인의 감각을 증명했다. 젊고 새롭게 태어난 <타짜2>에는 강형철 감독 특유의 인장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강형철의 <타짜2>가 장르의 장벽을 넘나들며 잘 만든 오락영화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을 들어본다.
-2편이 나오기까지 8년이 걸렸다. 전작의 흥행은 물론이고 스타일이 워낙 명확해 부담이 적지 않았을 텐데 <타짜2>의 연출을 결심한 계기가 무엇인가.
=딱히 말 못할 우여곡절을 거치진 않았다. 처음 <타짜>를 봤을 때부터 시리즈로 만들어져야 할 영화라고 생각했고 기회가 된다면 그중 한편을 맡아보고 싶었다. <과속스캔들> 끝날 무렵부터 이안나
3편 감독님, 고생 좀 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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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고 등장할 것 같았던 이하늬가 흰색 단화를 신고 사뿐사뿐 걸어왔다. “하이힐은 불편해서 못 신어요.” 그렇게 말하는 이하늬의 왼쪽 뺨에 보조개가 팼다. 굳이 힐에 의존할 필요 없는 173cm의 키. “어릴 적부터 한번도 작아본 적이 없어서” 되레 아담한 것들에 끌린다는 이하늬는 섹시하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지 오래되지 않았다고 했다. <타짜>가 개봉한 2006년에 미스코리아 왕관을 쓴 이하늬는 호피무늬 수영복을 입고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강렬하게 등장했다. 20대 초•중반의 나이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성적인 시선”이 힘들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그것조차도 긍정적으로 바꾸어 받아들일 수 있는 내공이 쌓였다. “가만히 있어도 야하니까 붙는 옷 입지 말라던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섹시하다는 말은 건강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인 것 같다고. 이젠, 꽃이 가장 붉게 물들었을 때, 석류가 가장 잘 익었을 때를 표현하는 말이 섹시하다는
꽃보다 멋진 들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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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면 듣는 사람뿐 아니라 말하는 사람도 지치는 법이다. 언론시사회가 끝난 뒤 신세경은 이틀 동안 기자들과 마주 앉아 영화 얘기를 해야 했다. 그 두 번째 날의 늦은 오후 신세경을 만났다. 비축해둔 힘이 바닥나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애정이 큰 캐릭터에 대한 얘기를 하니까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아요. 안 그래도 오늘 밝아 보인다는 얘기 엄청 들었는데, 이제 그만 가라앉혀야 되나? (웃음)” 2년 전 <알투비: 리턴 투 베이스> 때 보았던 신세경의 두눈은 ‘휴식이 필요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사이 그녀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난 걸까. “그때가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 시기였어요. 나를 지탱해주는 받침대가 점점 사라져서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요만큼밖에 남지 않은 기분이었달까. 지금은 다시 지반을 단단하게 다져놨어요. 그리고 다시는 그 지반을 뺏기고 싶지 않아요.” 조그만 입술을 야무지게 달싹이며 지금의 행복을 지키고 싶다고 말하는 신세
첫사랑 혹은 영원한 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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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높아진 기대는 어느새 다음 이야기의 등장을 가로막는 벽이 되었다. 최동훈 감독의 <타짜> 이후 무려 8년, <타짜-신의 손>으로 돌아온 <타짜> 속편은 좋든 싫든 전작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새롭게 메가폰을 잡은 강형철 감독은 전작의 눈치를 보느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경쾌하게 자신의 길을 가며 또 다른 방식의 <타짜>를 선보인다. 제작과정에 있었던 자잘한 에피소드부터 궁금한 장면까지 강형철 감독에게 물었다. 꽃의 전쟁의 주역인 신세경, 이하늬 두 여배우의 솔직한 심경도 함께 전한다. 타짜 vs 타짜, 누가 더 낫냐는 비교가 무의미한 또 다른 재미를 만끽하시라.
앞서 간 이의 흔적이 길잡이가 될 것인지 장벽이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뒤따르는 사람의 태도에 달렸다. <타짜-신의 손>(이하 <타짜2>)의 제작 소식이 들려왔을 때 기대만큼 우려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당연한 일이다. 뛰어난 전작은 관객의
새 판은 새 감독이, 오락영화 타짜들의 바통 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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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간 150여편의 영화를 만든 존 포드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릴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얼굴은 물론 존 웨인, 헨리 폰다, 제임스 스튜어트와 같은 할리우드의 스타들이다. 그런데 존 포드의 영화들을 하나씩 보다보면 조연 역할에 익숙한 얼굴의 배우들이 반복해서 출연하고 있음을, 게다가 그런 배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이 영화에서 비루한 모습으로 출연했던 배우가 다른 영화에서는 말쑥하게 갖춰 입고 점잔을 떤다거나, 천하의 악당이었던 배우가 주인공의 조력자로 출연하는 식으로 말이다. 존 포드는 한번 일했던 배우들과 계속해서 함께 작업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구성된 ‘존 포드의 배우들’은 이미 30년대부터 ‘존 포드 스탁 컴퍼니’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거의 단역으로만 4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잭 페닉 같은 배우를 포함해 존 포드와 다섯편 이상 함께 작업한 배우들의 수만 해도 60명이 훌쩍 넘어가니 존 포드의 필모그래피에서 존 포드 스탁 컴퍼니의 역할이
모뉴먼트 밸리의 거주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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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사실이 밝혀지면, 전설을 기록하라.”(<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중) 여기, 존 포드라는 전설의 기록이 있다. 존 포드의 열렬한 추종자들이 그의 영화에 관해 남긴 말들이다. 재미를 위해 사실의 기록도 몇 개 섞었다. 하지만 이것은 무엇보다 우정의 기록이다. 말년에 찾아온 한 인터뷰어가 자신이 해줄 것은 없냐고 묻자 “당신의 우정을 주시게”라고 답했다는 존 포드. 그가 바란 불멸의 우정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 그의 영화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존 포드, 존 포드, 그리고 존 포드.… 그가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때, 관객은 이 땅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 느낄 수 있다.”
오슨 웰스, 포드의 절대적 위대함에 관하여
“그의 영화는 전부 의례의 영화들이다. 그것이 미국 전통에 관한 의례이건, 아일랜드의 의례이건, 다코타 원주민 문화의 의례이건, 어느 책에 나온 길들여지지 않은 서부에 관한 의례이건.”
스티븐 스필버그, 포드가 혹스나 월시보다 중요한 감독인
그에게서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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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드는 어록 반대론자였다. “영화를 만드는 건 좋아하지만 영화에 관하여 떠드는 건 질색이다”라고 말한 그는 의미심장한 대답을 기대하는 인터뷰어들을 골려주는 데 특출한 재능을 자랑했다. 그중에서도 필살기는 단답형 답변이었다고. 그런 맥락에서 그가 영화에 관하여 남긴 중요한 말들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다분히 ‘반’포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깨알같이 모아봤다. 그 촌철살인의 말들이, 그의 영화를 더 잘 느끼고 싶은 우리의 필살기로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나한테 예술 운운하지 말게. 난 집세 내려고 영화 만드는 사람이니까.”
영화를 하는 이유에 관하여
“기차로 왔네.”
어떻게 할리우드에 오게 됐냐고 묻자
“카메라로 찍었네.”
<3인의 악당>은 어떻게 촬영했냐고 묻자
“가장 훌륭한 영화는 액션이 많고 대사는 적은 영화요. 그걸 보여주기에 서부극만큼 적합한 건 없지.”
영화 매체와 서부극의 성격에 관하여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의 눈을 찍어
내 서부극의 진정한 스타는 모뉴먼트 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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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 드레이어, 프리츠 랑, F. W. 무르나우, 앨프리드 히치콕, 에른스트 루비치,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은 영화의 시원적인 형태를 기억하고 있다. 이들의 영화는 움직임과 정지, 빛과 어둠, 풍경의 아름다움과 배우의 제스처에서 드러나는 미세한 감정들을 모아 특별한 영화의 기운을 만들어낸다. 그들의 영화들은 ‘영화’ 그 자체로 향하는 가장 고귀한 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존 포드의 영화가 그러하다.
2.
장르의 기원처럼 우뚝 솟은 포드 서부극의 풍경 모뉴먼트 밸리의 감흥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그의 위대한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면 서부극만 손에 꼽기는 힘들 것이다. 포드가 여전히 위대한 감독으로 남는 것은 인간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풍경과 공존하는 인간다움과 품위를 새기지 않은 그의 영화를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장르를 떠나서 자연과 인간의 조우, 공동체의 생존의 약속 등을 영화의 원재료를 통해 제시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의 영화들은 그를 닮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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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드와 서부극의 관계에는 좀 기묘한 점이 있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대체로 대중적 성공을 거뒀지만 당대에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가 받은 6번의 아카데미상은 모두 비서부극에 주어졌다. 당대의 주류 평자들에게 포드는 상업적인 서부극에 능했지만 수준 높은 드라마도 곧잘 만든 감독이었다. 존 포드 사후에는 이 관계가 역전된다. 이제 그의 이름은 대개 위대한 서부극과 연관되어 거론된다. <사이트 앤드 사운드> 2012년 12월호에 실린 올타임 베스트 목록에는 포드의 영화 가운데 <수색자>(1956)만 100위 안(6위)에 올라 있고, 서부극 10 베스트에는 그의 서부극 네편이 올라 있다(<수색자>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황야의 결투> <웨건 마스터>).
‘보는 것’의 (불가피한) 실패
물론 어느 쪽도 온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존 포드는 위대한 서부극을 만들었지만, 그가 유성영화 시기에 만든 15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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