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은 그것이 어떤 감정이든 관계든, 한 사람이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의 영역이 너무 비좁아진 상태에 주목한다.
=나는 그게 결국 가난에서 생긴다고 봤다. <가시> 때부터 그렇게 생각해왔다. 항상 궁금한 건 다 같이 가난한데 누구는 더 가난해 보이고 어떤 사람은 덜 가난하고 행복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가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재학시절에 말하고 다니면 다들 너무 진부하다고 했다. 소재만 보면 진부한 건 사실이다. 결국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 가난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견디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면 괜찮을 것 같더라.
-고시생 민경 캐릭터는 김훈의 소설 <영자>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적 있다.
=그렇다. 그 소설에서 가난한 고시생이 어떤 혹독한 시기를 견디는 모습이 민경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극단적인 선택을 줄곧 하면서도 절대 죽지는 않는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영자>를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어른이 바라보는 아이 같다는 인상도 받았다. <이월>을 쓰면서 어떻게든 나 자신이 민경이 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경은 타인에게 모진 말을 내뱉거나 악의와 거짓을 일삼으며 생존하기도 한다. 쉽사리 미워할 수도 그렇다고 동정할 수도 없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존엄하다. 캐릭터를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했나.
=종종 내게 정서적으로 어떤 두려움이나 화를 남긴 사람들의 얼굴이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다시 떠오를 때가 있다. 내 감정에 휩싸여 있다가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실체가 서서히 인지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도 그들과 비슷하기 때문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혐오하고 싫어하는 모습을 내게서 발견했을 때의 충격을 떠올리면서 시나리오를 썼다. 가급적 조민경 배우에게는 이런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민경의 친구 여진이 자기 집 앞 작은 웅덩이 앞에서 그곳에 빠져 죽은 증조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준다. 민경은 그 웅덩이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나중에는 큰 돌들을 던져넣기도 한다. <이월>은 민경이 자기 마음의 웅덩이를 메꿔보려 하는 과정의 이야기 같았다.
=실제로 어린 시절에 작은 웅덩이를 보면서 한번 빠지면 절대 못 나올 것 같아 공포를 느낀 적 있다. 나중에 커서 보니까 참 작고 초라하더라. 웅덩이를 대하는 민경의 태도가 그녀의 상태를 잘 말해줄 것 같았다.
-물에 비친 민경의 얼굴 인서트가 나온다. 대개 건조한 시선을 유지하는 영화 톤에 비해 이질적인 장면이다.
=문명환 촬영감독의 아이디어였다. 사실 나는 담백하게 찍고 싶었다. 감정이입을 많이 한 채 쓴 시나리오라 영화가 감정에 젖은 채로 나올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다. 가능한 한 건조하게 거리감을 두고 찍으려 했는데 문 촬영감독이 이러다 영화에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고 몇개라도 찍어두자고 권하더라. 나중에 안 쓸 요량으로 일단 찍은 건데 편집하면서 이런 이미지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걸 절감했다. (웃음)
-월세 낼 돈이 없어 이곳저곳 전전하는 민경의 여정이 펼쳐지지만, 공간을 이동하는 과정을 담은 장면이 거의 없다. 마치 순간 이동을 하는 것처럼 다른 공간들이 툭툭 연결된다.
=어떤 면에서 <이월>은 민경의 로드무비이기도 해서 처음엔 이동하는 장면을 몇개 찍기도 했다. 근데 내게는 이 이미지들이 마치 생각할 여유나 감정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주더라. 그래서 빼버렸다. 어딘가를 응시한다거나 걷는다거나 하는 이동 장면이 쓸데없이 감상적이 될 거라는 걱정이 있었다.
-사람의 충동적 감정에 관심을 둔다. 진규의 아들 성훈(박시완)을 두고 갑자기 도망가는 민경의 행동은 그녀의 버거운 심리 상태를 환기시키기도 했다.
=경험에서 온 관심사인 것 같다. 나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던 나 자신이나 주변 사람의 행동을 곱씹었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대체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에 빠지게 된다. 아마도 무서워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일 앞에서 내린 선택이 아니었을까. 나 역시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졌을 때 비슷한 상태였던 것도 같다. 누군가 진심으로 나를 위해줄 때도 혼란스럽고 버거운 적이 있었다. <이월>의 제작사 무비락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준 이한 감독님(<증인>)도 내게 인간적으로 너무 잘해주셨는데, 그때도 불쑥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더라. 그 호의에 대한 책임감을 고려하게 되니까 마음이 너무 무거워지는 거다.
-민경의 위악적인 태도는 실은 그보다 훨씬 더 모진 세상에 대한 역설일까.
=어릴 땐 세상 탓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나이를 먹었는지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분명히 민경과 똑같은 처지에 있으면서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전작 <가시>에 비해 조금은 밝아졌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답이 없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무언가 희망적인 부분을 보여주는 게 거짓말 같다는 생각을 늘 했는데, 이번엔 결말에서나마 조금 여지를 주면 어떨까 싶었다. 물론 마음 한편에는 비극적인 생각이 더 많았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처음 공개했을 땐, 관객과의 대화(GV)에서 어두운 결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객석에서 당황하는 반응도 나왔다. 지나고 생각해보니까 처음 쓸 때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더라. 어떻게든 제발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한편으로 <이월>은 집필 당시의 감독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같다.
=일기처럼 써나간 시나리오였다. 쓴 일기 중에선 그나마 가장 그럴듯한 일기랄까. 스탭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영화제 수상 등의 결과가 얼떨떨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 자신을 민경과 많은 부분 동일시했다.
-준비 중인 차기작은.
=<이월>의 제작사 무비락과 새 영화를 진행 중이다. 미스터리가 결합된 드라마 장르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내 얘기를 쓰는 건 편하지만, 이제는 만족시켜야 할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니 확실히 부담감이 크다. 쉽게 말하면 잘 못 쓰는 거지. (웃음) 내게 잘 맞는 옷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사이의 괴리를 좁혀가는 일은 늘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