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 번째 단편집 <빨간구두당>은 고전 동화의 면면을 반영해 새롭게 변주한 여덟편의 단편 모음이다. 구병모는 안데르센의 <빨간구두> 마지막에서 이야기를 더 밀어붙이고, 그림 형제의 <개구리 왕자 혹은 철의 하인리히>를 신하 하인리히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거나, <영리한 엘제>를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다시 썼다. 동화로서의 뚜렷한 제스처와 ‘창비청소년문학’이라는 시리즈명 때문에 얼핏 데뷔작 <위저드 베이커리>를 떠올리게 하지만, 두 책 사이에 닮은 구석은 거의 없다. 다만 자신의 뿌리는 유지한 채 전혀 다른 작법을 적용시켰다는 점에서 <빨간구두당>은 구병모의 문학이 새로운 경지로 뛰어오를 수 있는 발판이 되는 책이다. 작가는 옛이야기들을 경유한 <빨간구두당>을 쓴 시간에 대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으로, 그 어느 때보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작업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한편 <빨간구두당>은 기존의 이야기를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가공시켰기 때문에, 작가가 현재 품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통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록으로 ‘도움받은 글들’ 목록을 정리한 데 이어,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 <빨간구두당> 속 민담과 동화를 모은 전자책 <빨간구두당: 이야기의 뿌리들>이 무료 배포되고 있으니 함께 챙겨보자.
새롭게 가공된 이야기들
이쯤에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수부의 이야기에 하나 빠진 게 있다. 예언의 아이가 돌아가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역순으로 짚자면 강을 떠나니는 수부였다. (…) 그걸 논리가 아닌 본능으로 알고 있다는 점에서 수부는 이미 뛰어난 시인이었다.(91쪽)
그것은 깊은 의심과 확신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흥미 본위의 상상에 가까웠다. 바닥이 좁은 탓에 역동적인 추문이나 사건을 접하기 힘든 농촌에서 모락모락 피워 올릴 만한 호기심이었다. 야심 찬 청년과 귀부인들 사이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있게 마련이고, 그러한 행각을 다루는 신문과 소설을 비롯한 각종 읽을거리도 유행했으므로 나는 그런 데까지 미루어 짐작해보았다.(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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