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언감생심, 나는 하루키를 질투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전세계 어디서든 베스트셀러 작가가 재즈 뮤지션보다 유명한 것은 당연하며, 그렇다면 그 작가의 눈을 통해 사람들이 재즈를 바라보는 것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닌데도, 재즈가 하나의 독자적인 음악으로 인정받고 재즈 연주자 자체가 논의의 대상이 되길 바라는 나로서는(간단히 말해 재즈 동네에서 밥 먹고 살아야 하는 나로서는) 듀크 엘링턴, 찰리 파커,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키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심사가 괜히 뒤틀렸다.
재즈팬들은 기억할 거다. 벌써 15년여 전 일이 되었는데 그때 국내에는 재즈 열풍이 불었다. 그런데 그 열풍이란 영화 <아마데우스>로 모차르트 열풍이 불었던 것에 비해도 그 내용이 턱없이 빈약했다. 카페, 드라마, 화장품 등 일상의 곳곳에서 재즈라는 이름이 들리는데 정작 그 안에 재즈 음악은 없었다. 모두 재즈를 듣는다고 하는데 우리 입에 오르내리는 작품과 연주자는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하루키의 소설이 한구석을 차지했다. 재즈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하루 종일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하고 해 저물 무렵 집 근처 카페에 앉아 맥주 한잔 앞에 놓고 TV로 야구 경기를 관람하며 듣는 음악이었다. 그가 외로울 때 콧노래로 흥얼거릴 수 있는 색소포니스트 레스터 영의 멜로디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더이상 집단의 명분(그것이 가족이든 회사든 아니면 정치적 결사체든)에 얽매이기 싫은 당시 90년대 새로운 인간의 영혼이었다.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때 재즈, 재즈 한 것이다. 당시는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었으며 그것을 이해하면서도 하루키를 질투한다면 그것은 괜한 푸념일 뿐이다.
사실, 하루키에 대한 진짜 질투는 그 다음에 시작되었다. 와다 마코토가 그린 그림에 하루키가 짧은 에세이를 붙인 <재즈의 초상>(당시에는 <재즈 에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이 처음 국내에 소개되었을 때 나는 애써 외면하려고 했지만, 그가 재즈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각 아티스트를 묘사한 아름다운 문장이야 감히 내가 탐낼 경지가 아니었지만, 밥만 먹고 하루 종일 음악만 듣는 나로서도 놀랄 정도로 그는 음악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었다. 더욱이 나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 내가 책을 통해 읽고 음악을 통해 추체험했던 것. 바로 1950~60년대 모던재즈의 전성기를 동시대의 감수성으로 부딪힐 수 있던 기회가, ‘단카이 세대’의 짙은 체험이 그에겐 배어 있었다. 그가 작정하고 쓴 본격적인 음악 에세이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는 이미 질투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처럼 솔직하면서도 밀도있는 음악 에세이는 정말이지 읽어도, 읽어도 물리지 않는다. 아직 안 보셨다면 꼭 읽어보시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2006년에 소개된 이 책을 통해 재즈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렇다. 10여년의 세월 속에 우린 변했다. ‘스펙 쌓기’의 이 시대에 개인의 자유란 화두는 물론이고 진지한 음악 이야기란 저 멀리에 처박힌 것이다. 아쉽다. 이래저래 하루키를 질투할 일도 이젠 없어져버렸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