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처럼 지적이면서 냉철한 사람들은 할리우드적 욕망이 가진 무모함과 위험성을 익히 알기 때문에 후배나 동료들의 할리우드적 꿈과 희망을 깨는 데 최선을 다한다. “네 여자친구가 진짜 널 좋아한다고 생각해? 월급 통장 보여주면 당장 도망갈걸”이라거나 “어차피 좀 있으면 회사 잘리고 공공근로사업에 나가게 될 텐데 뭘 그렇게 열심히 일해”라는 등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면서 말이다.
그래서 인생의 정답이 할리우드 엔딩에 대한 냉소에 있는가 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도 성공하기는 힘들며 원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렇다고 진정한 사랑은 없다거나 가족은 ‘불 쉿’이라거나, 성공은 역겨운 허상일 뿐이라고 단정지으며 방어막 50겹을 쌓는 것도 사는 데 별 도움 안 되긴 마찬가지다.
<원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세상을 너무 할리우드적인 것과 반할리우드적인 것으로 갈라서 고개를 양쪽으로 돌리며 살아온 건 아닐까. 물론 가난한 제작비로만 따지면 <원스>는 반할리우드적인 인디영화다. 하지만 <원스>는 할리우드영화처럼 허장성세를 부리지도 않으면서도 ‘어차피 안 되게 돼 있어’라고 징징거리지도 않는다. 다만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곁에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에 조용히 집중하고 묵묵히 걸어간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렇기 때문에 <원스>를 따라가는 건 나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동안 할리우드적 세계와 반할리우드적 세계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찌들어 살아온 탓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아름다운 음악에 감동받으며 그 정직하고 순수한 영화적 리듬을 따라가기보다는 내내 할리우드적 기대와 반할리우드적 근심으로 전전긍긍했다. 약에 취한 찌질이가 남자의 기타가방 속 돈을 훔쳐갔을 때 그것이 뭔가 이 영화의 대단한 복선이 될 거라 걱정했고, 여자의 집에 가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게다가 난데없이 건너뛴 것 같은 장면에서 남자가 “정말 결혼했냐”고 말했을 때 둘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을까 불안했고, 대여료가 엄청나게 비싼 녹음 스튜디오에서 태도 불량인 엔지니어가 등장했을 때 주인공 남자가 ‘어차피 녹음, 음반 발매 이딴 건 다 무의미해’라며 스튜디오를 뛰쳐나올까 초조했다. 심지어 스튜디오 녹음을 마치고 녹음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트렁크에까지 꾸역꾸역 밴드를 태우고 낡은 벤츠가 떠났을 때 이 차가 뒤집혀서 모든 게 다 끝나버리는 게 아닐까라는 걱정까지 했더랬다. 시쳇말로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다. 젠장!
하지만 내가 했던 반할리우드적 우려는 영화에서 현실이 되지 않았고 당연히도 할리우드적인 소망- 두 주인공은 사랑으로 맺어지며 음반은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역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결말은 또 아니다. 두 주인공의 삶은 서로를 만나기 전과는 확실하게 달라졌으니까.
누구나 할리우드 엔딩을 바라지만 그런 엔딩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엔딩이 없더라도 인생의 빛나는 순간까지 없는 건 아니다. <원스>에서 피로와 허기와 목마름의 시간을 마치고 달려간 바닷가에서의 짧은 휴식이 아마도 그렇게 빛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그런 순간들이 삶에서 조금 다른 선택,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을 하게끔 이끄는 용기가 되는 것 같다. 인생의 극적 반전은 이뤄지지 않더라도 삶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하나의 모양새를 갖춰나가는 것이다.
마지막 연재글을 쓰면서도 어떤 의미에서 ‘할리우드 엔딩’을 기대했던 것 같다. 내 글을 보며 ‘이런 쓰레기가’라고 개탄했던 독자도 눈물을 흘릴 정도로 한방의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역시나 할리우드 엔딩은 없다(그것도 실력이 돼야 한다는 --;;). 하지만 오랫동안 연재를 하면서 빛났던 순간이 짧게나마 있었을 거라고 자위하련다. 모두 건강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