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중천> <박물관이 살아있다!> <수면의 과학>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등 각종 판타지영화들이 줄을 잇고 있다. 물론 판타지영화들이 갑자기 뜬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우리가 꿈꿔온 ‘만약’의 세계, 예컨대 하늘을 난다거나 하는 식의 꿈들을 현실처럼 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모두 판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판타지영화의 매력은 뭘까? 판타지영화에서는 어떤 꿈들이 현실화되었을까? 여기 몽상 소녀 ‘옥희’가 있다. 유난히 잠을 많이 자는 그녀는 오늘도 희한한 꿈들을 꾸며 희한한 몽상에 빠진다는데….
안녕! 내 이름은 ‘옥희’야. 나이는 12살인데 한약을 잘못 먹고 몸무게가 100kg이 되었어. 언젠가부터 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집 안에만 처박히고 말았지. 하지만 심심하진 않아. 내겐 꿈의 미로가 있으니까. 쉿! 이건 절대 비밀이야. 내가 사라진 마법 왕국의 공주라는 것 말야! 사람들은 참 이상해. 나처럼 뚱뚱한 여자애는 절대 공주가 못 될 거라고 생각하나봐. 근데 난 공주가 틀림없어. 내 어깨에는 해리 포터나 오필리아처럼 특별한 사람들만 갖고 있었던 초승달 문신이 분명 있으니까! 직접 보여주고 싶지만, 어깨를 드러내면 15세 관람가가 되어버리니까 사양할게. 아이들은 나더러 미쳤대. 햄버거나 초콜릿을 잔뜩 처먹고 침대에 누워 쿨쿨 잠을 자고, 입만 열면 거짓말을 늘어놓는 뚱돼지라나? 괜찮아, 공주는 외로운 법이니까, 쳇!
key 1.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그리기만 하면 문이 되는 분필을 갖는다면
내가 공주란 사실을 못 믿는 너희를 위해 증거를 하나 보여줄게. 짜자잔~! 바로 이 분필이야! 너흰 교실에서 많이 봤지? 하지만 난 왕궁에서 많이 봤는걸. 어떻게 쓰는 거냐고? 후훗. 놀라지 마! 이건 마술분필이야. 벽에 대고 들어가고 싶은 곳을 생각하며 그리면 진짜 그곳으로 가는 문이 생겨. 와우! 이런 경험 해봤어? 내 펜팔 친구 중에 루시라는 애가 있는데 걔도 비슷한 걸 겪었대. 심심해서 옷장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글쎄 하얀 눈밭이 펼쳐진 숲이 나왔단 거야! 물론 그게 사실이라고 믿진 않아. 그 앤 책을 아주 많이 읽어서 입만 열면 거짓부렁이거든. 자기네 집 화장실에서 매일 서커스를 열어주는 요정이 있다고 한 적도 있어. 그래 갖고 어디 변기에 앉아 힘이나 제대로 줄 수 있겠니!
그나저나 마법의 분필을 어디서 얻었냐고? 이건 정말 비밀이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실은 우리 학교 앞 ‘판돌이’ 아저씨한테서 공짜로 받았어. 그 아저씨는 산양처럼 생기고 하체 부실인데다 성격도 괴팍하지. 원래 꿈이 DJ였는데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고 문구점을 열었대. 근데 그 아저씨가 어느 날 내게 몹시 친절하게 구는 거야!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내가 공주란 사실을 알고 있더군. 내가 문구점 앞에 앉아 떡꼬치를 먹으며 게임하는 걸 보고 단번에 알았대. 그 사람은 내게 분필을 주면서 꿈을 꾸라고 했어. 그리고 세 가지 미션을 수행해내야 한다고 했지. 그렇게 난 꿈속의 여행을 시작하게 된 거야.
key 2.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하늘을 날 수 있다면
앗차! 난 처음부터 크나큰 실수를 하고 말았어. 문을 열심히 그린다고 그렸는데 다 그리고 보니 문이 내 머리 위 20m 높이에 그려진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꿈이니까 가능하지. 가끔 꿈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마구 일어나잖아. 그때 난 예전에 본 애니메이션이 떠올랐어.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다!’ 난 날기로 했어. 말도 안 된다고? 너희가 잘 몰라서 그런가본데, 나는 인간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슈퍼맨, 원더우먼, 독수리 오형제, 후레쉬맨… 아유, 셀 수 없이 많아! 하지만 난 그들과 좀 달라. 과학의 힘으로 날거든. 잘 봐. 이렇게 버선을 양발에 끼우고 바닥에 엎드려. 그런 다음 파리처럼 양발을 계속 비비는 거지. 그럼 자기부상 열차의 원리대로 내 몸이 뜨는 거야! 신기하지? 지금 무전기로 연락이 왔는데 전세계 어린이의 57%가 이 실험에 성공했대. 아직도 날아본 적이 없다는 건 네가 발이 잘렸거나 발 비비는 센스가 부족해서야. 부우웅~! 와, 날았다, 날았어! 와우, 담배 생각나네. 난 비행할 때마다 이상하게 담배를 빨고 싶더라. 어쩐지 한 모금 쪽쪽 빨고 나면 인생이 다 허망하게 느껴져. 내 생각에 난 너무 일찍 어른이 되었나봐. 어쨌든 난 그렇게 날아서 첫째 문 안으로 들어갔어.
key 3. <존 말코비치 되기>
다른 사람의 머릿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난 깜짝 놀라고 말았어. 계단의 통로에 ‘7.5층’이라고 적혀 있는 거야. 세상에 7.5층이 다 있다니까. 그곳에서 꼭두각시로 코흘리개 돈을 싹쓸이하는 크레이그 아저씨를 만났지. 아저씨는 놀라운 사실을 말해줬지. 그곳이 배우 ‘변희봉’의 뇌로 가는 통로라는 거야. 첫째 미션은 바로 ‘변희봉 되기’였어. 15분 동안 변희봉의 뇌 속에 머물 수 있고, 그의 감각을 모두 느낄 수 있다는 얘기에 솔깃한 난 주저없이 그곳으로 들어갔지. 변희봉 아저씨의 뇌는 상당히 축축했어. 인간적이고 따뜻한 아저씨의 뇌가 실은 축축하다니 이상한 일이야. 난 그 축축함의 정체가 궁금했어. 그래서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액체를 따라갔지. 근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거야. 악! 혹시 한강에 나타났다는 그 괴물이 아닐까? 난 몹시 무서워서 눈을 감고 뒤를 돌았어. 그랬더니 변희봉 아저씨가 눈물을 잔뜩 흘리며 서 있는 거야. 그 끈적한 액체는 바로 희봉이 아저씨의 눈물이더군. 아저씨, 왜 우세요? 난 물었어. 그랬더니 아저씨는 말도 안 되는 얘길 했어. 난 이미 죽은 사람이며 우리가 만난 그곳은 죽은 영혼들이 49일간 머무는 ‘중천’이란 거야!
key 4. <중천>
죽은 영혼들이 머무는 곳이 있다면
말도 안 돼요! 난 소리쳤지. 하지만 희봉 아저씨의 표정은 진지했어. 그는 사실 이승에서 나와 사랑하던 사이였는데 내가 자기 대신 죽고 말았다며 날 끌어안았어. 아저씨가 눈물을 흘리며 날 안고 있으니까,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져 붕어빵이 먹고 싶어졌지. 하지만 저승에는 붕어빵을 팔지 않는대. 난 몹시 슬퍼서 뱃살을 부여잡은 채 눈물을 흘렸어. 허기가 지니까 다 귀찮아져서 희봉 아저씨의 말을 다 믿어버리게 되더라. 그런 데 머리 쓰면 또 배고프거든. 아저씨는 내가 기억이 완전히 지워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거랬어. 난 갑자기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어. 드라마도 아니고 기억상실증을 핑계로 원조교제를 하려 하다니, 정말 진부하잖아. 아저씬, 이미 알고 있었대. 내가 자신의 뇌로 들어오리란 걸. 대체 어떻게요? 너도 내 꿈을 꿨잖니? 네 꿈속에 내가 나타난 걸 내가 꿈에서 봤거든.
key 5. <수면의 과학>
서로의 꿈이 연결돼 있다면
그런 일이 가당키나 해? 내가 변희봉 아저씨 꿈을 꿨는지 안 꿨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아. 근데 어떻게 희봉 아저씨는 내 꿈을 기억한단 말야. 혹시 내 꿈을 훔쳐간 건 아닐까? 난 겨우 12살이란 말야. 몸무게가 100kg이고 공부를 못하고 얼굴이 좀 안 예쁜 것만 빼면 앞길이 구만오천육백삼십리인 아가씨란 말야! 근데 어떻게 저 늙수그레한 아저씨와 연인이 되어야 한단 말야. 게다가 아저씨가 내 꿈속을 몰래 훔쳐본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 난 둘째 미션을 떠올렸어. 기억을 제거할 것!
key 6. <이터널 선샤인>
기억을 제거할 수 있다면
이미 내게선 아저씨에 관한 기억이 지워진 지 오래야. 아저씨만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아저씨가 미쳤거나, 내 기억을 누군가 망가뜨린 게 분명하다고! 난 3박4일 동네를 돌아다니며 각종 소문을 수집했어. 4일째 되는 날, 난 엄마를 만나러 우리 동네에게 가장 잘나가는 정신병원에 갔다가 사진 한장을 발견했어. 바로 정신치료 과학자인 신들린 박사와 변희봉 아저씨가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신문기사 속 사진이었어. 난 당장 신 박사를 찾아갔지. 그는 나를 보자마자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 감기에 걸렸대. 하지만 난 신 박사의 악행을 잘 알아. 그는 정신과 의사인 주제에 12년 전 내 탯줄을 끊어줬거든. 그리고는 ‘튼튼하고 잘 생긴 왕자님이에요!’ 하고 뻥을 쳤어. 내가 100kg짜리 여자애로 성장하자, 우리 엄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시고 말았지. 어쨌든 난 신 박사를 의심하며 계속 변희봉 아저씨와의 관계를 추궁했지. 망치와 칼, 쇠꼬챙이로 위협하자 신 박사는 그제야 이실직고를 하더군. 15년 전, 내가 죽기 직전에 기억삭제기로 내 머릿속의 기억을 전부 지워버렸다는 거야. 후훗. 난 웃으며 말했지. 그럼 희봉 아저씨의 기억도 전부 지워주세요. 후회하지 않아? 후회하지 않을 자신있어? 정말 후회하지 않을 거지? 그는 내게 세번이나 물었어. 난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지. 신 박사는 ‘희봉 아저씨와의 기억 파일’ 옆에 있던 OK 버튼을 꾹 눌렀지. 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어.
key 7. <트루먼 쇼>
누군가 내 삶을 24시간 생중계한다면
어느 새 난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었어. 머리가 텅 빈 것 같아 병원 밖으로 나갔는데, 거리에 아무도 없었어. 뭔가 이상했지. 사람들이 자꾸 날 피하는 것만 같았어. 외톨이가 된 기분이랄까. 거짓말이야. 난 늘 외톨이였어. 아이들은 내가 뚱뚱하다며 내 근처에 오지도 않았어. 물론 근처에 올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뚱뚱했기 때문이지만. 정말이지 난 친하게 지내고 싶은 친구의 손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뱃살이 두껍다고! 난 슬퍼서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어. 눈물 젖은 실눈으로 하늘을 보는데 구름 사이로 뭔가가 번쩍 했어. 난 이상한 기분이 들어 자꾸 눈을 비볐지. 그 빛은 햇빛과는 분명 달랐어. 0.5초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게 햇빛이 아니라는 것쯤은 아무나 알 수 있다고. 난 뚱뚱이지만 멍청이는 아니란 말야! 난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 할머니나 잡고 물었어. 절 아세요? 할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저 멀리 도망갔지. 무서운 기분이 들어서 엄마가 있는 병실로 달려갔지. 근데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거야. 분필로 문 위에 또 다른 문을 그렸어. 그리고 작은 문틈 사이로 병실 안을 지켜봤지.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 엄마, 신 박사, 변희봉 아저씨, 판돌이 아저씨까지 모두 TV를 지켜보고 있는 거야. ‘24시간 생방송, 스타 탄생 어쩌구’ 하면서 리포터가 호들갑을 떨었지. 난 대체 그게 뭘까 하며 고개를 쑥 내밀었어. 그러자 내 얼굴이 화면에 점점 크게 보이는 거야. 그 순간 병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았어. 악!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를 질렀지. 그건 ‘옥희 쇼’ 였어. 내 일거수일투족을 전세계인들이 생방송으로 지켜보고 있었던 거라고! 난 정말이지 끔찍하고 무서워서 밖으로 도망쳤어. 사람들이 쿵쿵쿵쿵 소리를 내며 날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어. 내 가슴은 쾅쾅쾅쾅 소리를 내고 있었고. 쿵쾅쿵쾅쿵쾅쿵쾅! 난 왜 그동안 늘 외톨이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어. 가족도, 친구도 믿을 사람 하나 없단 생각에 난 눈물을 흘렸어. 내 눈물은 변희봉 아저씨의 눈물처럼 끈적거렸지.
EPILOGUE
난 순간 셋째 미션이 생각났어. 그곳을 탈출할 것! 난 주머니에 있던 분필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사각형을 그렸어. 근데 너무 작게 그린 걸까? 엉덩이가 빠지지 않는 거야! 사람들은 발소리를 내면서 3m 앞으로 다가왔지. 난 엉덩이에 최대한 힘을 주며 ‘흡!’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문 안에 몸을 들이밀었어. 어쨌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날 쫓아오는 사람들을 간발의 차로 따돌리고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 미끄럼을 탈 때처럼 내 몸이 밑으로 쑥 빠지는 기분이 들었어. 어딘가에 쿵 엉덩방아를 찧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어. 눈을 살며시 떠보니, 난 판돌이 아저씨의 무등을 타고 있었어. 아저씨는 서커스에서 접시 돌리기를 하는 것처럼 공책을 한손으로 돌리고 있었고. 깼니? 아저씨가 내게 물었어. 난 눈을 비비며 대답했지. 네, 근데 아저씨, 나 안 무거워요? 전혀, 넌 새털처럼 가볍단다. 난 주위를 둘러보다, 거울에 비친 나를 발견했어. 내 몸은 아주 작고 날씬했어. 30kg도 안 돼 보였지.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난 거울을 보며 호호 웃으며 말했지. 아무래도 영화를 지나치게 많이 봤나봐요, 이상한 꿈을 꿨어요. 아저씨는 날 어깨에서 내려주며 말했어. 어른이 되면 꿈을 잘 꾸지 못한단다. 출출한데 붕어빵이라도 먹으면서 네 꿈 얘기나 들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