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복? 중복? 말복 지나고 입추도 지나갔다. 이 지긋지긋한 천연 찜질방도 조금만 더 견디면 가을이다. 다들 산으로 바다로 산소 충전을 하고 오셨는지. 아니면 태평양, 대서양 넘어 스펙터클한 원정을 다녀오셨는지. 그나저나 휴가 끝물에 여행자 10계명이라니, 웬 뒷북이냐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극장가에는 여름 휴가의 기운이 어느 정도 남아 있으니 이해해주시길. 그중에서도 배낭여행의 므흣한 판타지를 와르르 무너뜨린 놈이 하나 나왔으니, 바로 그 이름도 정직한 <호스텔>이다. 하여 낭만 찾으러 갔다가 비명횡사한 미소년들을 기리는 차원에서, 소심한 A씨를 모셔 영화에서 얻은 안전여행 10계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최근 동남아 순회여행을 다녀온 A씨는, 오늘의 태양보다 내일 뜰 태양을 더 걱정하고, 로마에 가도 꿋꿋하게 서울법을 고수하는 소심+우아+안전제일주의자. 당신이 오지 탐험가보다는 A씨와 같은 프랑스 철학자 스타일에 더 가깝다면, 기억해뒀다가 다음 휴가 때 다시 숙지하시라. 재미는 보장 못해도 안전은 보장한다(스포일러 주의!).
제1은, 너 자신만 믿어라
휴갓길에 오르기 전, 일행이 믿을 만한 사람들인지 꼼꼼하게 따져봐라. 전과는 없는지, 혹시 지금 가명을 쓰고 있는 건 아닌지, 나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찜찜하면 아예 같이 안 가는 게 차라리 낫다. <더 홀>을 보고 나서 나는 친구도 100%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10대 남녀 4명이 파티하러 갔다가 무려 18일간이나 지하 방공호에 갇힌다는 이야기인데, 결국엔 도라 버치의 자작극으로 드러났다. 10대의 뒤틀린 심리상태 어쩌고 하는 비평은 귀에도 안 들어온다. 그저 시치미 떼고 있던 그 맹랑한 아이가 무서웠을 뿐. 온라인상으로만 만난 이들이라면 더더욱 믿을 수 없다. <해변으로 가다>를 봐라.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갔는데, 사시미 쑤시는 해변이 돼버렸다. ‘소년탐정 김전일’의 외침처럼 범인은 8명의 일행 중에 있었다. 게다가 통신동호회에서 왕따당한 ‘샌드맨’이란 놈, 살벌한 칼부림 쇼를 벌이기엔 동기가 살짝 유치했다는 걸 인정하셔야지. 뭐? <리버 와일드>? 친절한 일행이 강도로 돌변하는 그 래프팅영화? 생각만 해도 끔찍해. 나는 수영도 못하고, 메릴 스트립처럼 대담한 사람도 아니란 말이다.
제2는, 낯선 길을 섬기지 말라
성경에서 좁은 길로 가라고 했다고, 진짜 좁은 길을 택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 쭉쭉 뻗은 고속도로 놔두고 지도에도 없는 길을 따라갔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다. 하긴 묘하게 운치있고 지름길이기까지 하면, 혹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낯선 여행지에선 조심 또 조심이다. <더 로드>의 일가족 사망사건을 잊었는가? 몇분 빨리 가겠다고 생전처음 보는 지름길로 향했다가 변을 당하지 않았던가. <데드캠프>의 ‘마운틴 맨’처럼 눈에 보이는 살인마라도 있으면 차라리 낫지. 이건 가도가도 도착지점은 보이지 않고 다양한 시체만 눈에 띌 뿐이다. <블레어 윗치>에서도 죽을 맛이다. 이틀 야영하겠다고 갔는데, 식량은 떨어지고 걸어도 걸어도 제자리걸음이다. 나라면 공포에 질려 심장마비로 죽느니, 차라리 누군가가 단칼에 죽여주는 쪽을 택할 것이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죽음을 부르는 길’은 직감으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모험심 발동시키지 말고, 가이드북이 권하는 안전한 길로 갈지어다.
제3은, 자연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ref. <킹콩> <비치> <아귀레, 신의 분노>
혹여 오지 탐험을 계획하고 있다면, 낭만적인 생각을 버려라. 지상낙원이라 불리는 곳도 알고 보면 구린 데가 있는 법이며, 마냥 아름다워 보이는 자연도 당신에게 해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문화적 쇼크사를 당하고 싶지 않다면 지력과 체력, 담력을 기르는 게 필수(선크림과 모기약, 아스피린도 필수!). <킹콩>에서 해골섬의 원주민들을 기억하는가? 그들은 킹콩보다 더 강력한 포스를 뿜어냈으며, 몽타주로 말할 것 같으면 국가간 우호적 교류를 감안하더라도 몹시 견디기 힘들었다. 또한 <비치>에서는 왕년의 미소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지상낙원을 찾았다가 변을 당하고, <아귀레, 신의 분노>에서는 황금의 땅, 엘도라도를 찾기 위해 식인귀가 우글거리는 아마존을 헤맨다. 충고하건대 여행은 로또 당첨되길 바라는 심정으로 가는 게 아니다. 부디 ‘하면 된다’는 헝그리 정신을 버려라. 자연과 동화되겠다는, 동양적인 마인드로 임한다면 최소한 ‘신의 분노’는 피할 수 있겠지.
제4는, 자동차 점검시기를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ref. <구타유발자들> <울프 크릭> <살인마 가족>
아무리 비싼 벤츠면 뭐하나. 낯선 곳에만 가면 고장이 나버리는데. 공포영화 하면 늘 등장하는 고장난 자동차. ‘공포영화 헌법 제1조’마냥 빠지지 않고 등장하니, 근심걱정 많은 나로서는 자동차 여행에 대한 불신이 나날이 불어나는 것을 어쩔 도리가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영화 <구타유발자들>에서는 그 원수 같은 벤츠가 고장나는 바람에 근엄하신 교수님조차 극한 체험을 하지 않았던가. 땅덩어리 넓은 호주나 미국에서는 더 문제가 심각하다. 부르면 재까닥 오는 하이카, 애니카가 있다면 또 모를까. <울프 크릭>이나 <살인마 가족>에서는 애니카 대신 오래 굶은 살인마가 기다리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차가 고장난 순간 고개를 돌리면 반드시 다른 자동차나 쉬어갈 만한 오두막이 보인다는 것. 짜여진 각본에 따라 살인마의 기쁨조가 되고 싶지 않다면, 만반의 점검을 마쳐라. 그리고 휴대폰 배터리도 넉넉하게 챙겨두는 센스, 잊지 말자.
제5는, 네 직감을 공경하라
모두가 “설마…”라고 말할 때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말하는 자세. 신중하고 안전한 여행을 위한 기본자세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예민하고 직감이 뛰어난 사람은 여행시 상당히 괴롭다. 예측 못했던 사건사고도 여행의 묘미라면 묘미인데, 막연한 불안함이 엄습해오니 피로감은 보통 사람 두배 이상 느껴진다. 비행기 사고날까 걱정, 운전사가 길 돌아갈까봐 걱정, 테러범의 인질이 될까봐 걱정…. 어쩔 수 없다. 생겨먹은 품성이 이러니 직감에 의존하는 수밖에. <데스티네이션>에서처럼 비행기가 폭파되는 데자뷰를 봤다면 안 타면 되고, <자살관광버스>에서처럼 승객들이 모두 죽을상을 하고 있으면 재빨리 눈치채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면 된다. 그렇다면 <배틀로얄>에서 얻은 교훈은? 버스 안에서 잠에 빠져들지 않는 정도? 이런! 이젠 고등학교 수학여행조차 의심해야 하는 건가?
제6은, 원한 살 짓은 삼갈지니라
ref.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세이 예스> <령>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 나가면 더 샌다고, 집 밖을 벗어날수록 더 일탈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다. 이때 조심해야 한다. 들뜬 마음에 오버한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지도 모르니까. 먼저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의 팔팔한 애들을 보면, 음주운전에, 살인에, 시체유기까지… 음… 이건 극단적인 케이스니 열외로 치자. 살인은 뭐 아무나 하나. 대신 사소한 일로 남에게 해코지한 적은 없었는지 잘 생각해보라. <령>에서는 ‘일진 언니’들이 계곡 나들이까지 가서 한 여자애를 괴롭혔고, <세이 예스>의 스토커는 단지 ‘행복해 보인다’는 이유로 신혼부부를 집요하게 따라다녔단다. 여행 중 느낀 분노는 그곳에 대한 인상, 특징과 어우러져 더 뚜렷하게 기억되게 마련. 어느 날 갑자기 괴편지를 받고 싶지 않다면, 적당히 중용을 지킬 것. 술은 적당히 마시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표정관리 해가면서. 아… 어렵다 어려워.
제7은, 색(色)을 밝히지 말지니라
ref. <호스텔> <황혼에서 새벽까지> <사이드웨이>
‘원 나이트 스탠드’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하자. 설마 당신도 여행을 섹스 쇼핑의 기회로 삼는 사람은 아니겠지? 너무 아귀처럼 달려들면 보기에도 추접스럽거니와 탈이 나기 십상이다. 슬로바키아로 여행온 배낭족 이야기 <호스텔>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 제발 <비포 선라이즈> 같은 뽀샤시한 만남은 기대하지 말 것. 같은 유럽이라도 <호스텔>의 유럽은 고문, 살인, 피로 가득한 회색지대다. 물론 소문대로 동유럽 여자들은 엄청나게 섹시했다. 하지만 예상 외로 너무 쉽게 넘어오는 게 이상하다 싶더니, 역시나 끔찍한 지옥으로 가는 함정이었다.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 뇌쇄적으로 춤추던 여인, 샐마 헤이엑이 뱀파이어로 변하는 장면도 잊지 않았겠지?(현실에서 일어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사이드웨이>에서 멋모르고 껄떡대다가 코뼈 부러진 사나이도 있었군.
제8은, 비행기 안에서는 항시 긴장할지니라
ref. <나이트 플라이트> <플라이트 플랜> <다이 하드2>
<로스트>처럼 비행기가 추락할 경우, <다이 하드2>처럼 하필 내가 탄 비행기에 테러범이 탈 경우가 생긴다면? 운좋게 맥클레인 형사 같은 사람이 함께 타면 모를까, 내 힘으론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하긴 비행기 사고는 개인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부분이 없군. <나이트 플라이트>도 마찬가지다. 공항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다가 비행기 안에서 다시 만난 두 남녀. 로맨틱한 역사가 이루어지나 싶더니, 금방 본색을 드러내고 협박하던 옆자리 그놈! 3만 피트 상공, 2등석 창가 좌석에서 여자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순발력을 발휘해, 볼펜으로 냅다 놈의 목구멍을 가격한 건 박수받을 만했어! 그나저나 <플라이트 플랜>의 경우 조디 포스터가 깜빡 잠들지 않았다면, 딸아이가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천만에. 스튜어디스와 범인이 치밀하게 짜고 치는 고스톱에, 아무리 고수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을 거다. 그럼 아예 비행기를 타지 않는 수밖에 없을까? 배를 탄다면? 타이타닉호처럼 침몰하면 어쩌지? 기차는? 만화 <드래곤헤드>처럼 천재지변이 일어나 전복되지 말란 법이 어딨어? 이런! 대체 어쩔 거야? 죽어야 고치는 이 소심증을!
제9는, 네 정신상태를 의심해볼지니라
여행 도중 혼란스러운 상황이 도저히 정리되지 않을 경우, 최후의 의심을 하는 수밖에 없다. 과연 내가 지금 온전한 정신상태인가.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 자신이 맞는가. 이 모든 일을 내가 자처해놓고, 쓸데없이 원인을 찾아내려 삽질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아이덴티티>나 <파이트 클럽>의 다중인격, 죽은 자가 죽은 줄도 모르고 떠도는 <쓰리> 등은 조금 극단적인 케이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 A처럼 평소에 소심하고 겁이 많은 인간일수록, 어느 날 갑자기 대형사고를 칠 확률이 높다. 쉽게 고쳐지지 않겠지만, 마음속에 쌓아둔 스트레스나 근심거리를 조금씩 풀어주는 것도 좋겠다. 이것저것 걱정만 하다가 여행의 즐거움 다 놓치기 전에!
제10은, 네 이웃의 일에 참견하지 말지니라
ref. <파리의 늑대인간> <마스터즈 오브 호러-제니퍼>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자고로 오지랖 넓은 인간은 죽을 때까지 피곤하게 살아가게 마련이다. 영화에서만 해도, 변고를 당하거나 팔자가 사나운 캐릭터를 보면, 죄다 호기심 많고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부류들이다. 그러니 시간이 어느 정도 한정된 여행에서라면, 호기심을 죽이는 결단이 더더욱 필요하다. 괜히 친절을 베푼다고 끼어들었다가는, 인생의 방향이 통째로 바뀌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파리의 늑대인간>에서 남자는 배낭여행을 왔다가, 에펠탑에서 만난 여자(사실은 늑대인간!)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퍼붓는다. <마스터즈 오브 호러> 중 다리오 아르젠토가 만든 <제니퍼>에서, 남자는 살해되기 직전의 여자(사실은 식인종!)를 살려준다. 관여하지 않았더라면 평범하게, 적당하게 살아갔을 이들. 사랑인지 박애주의인지, 휴머니즘인지 모를 애매한 관심 때문에, 그들의 인생도 엄청 피곤해졌다. 여기다 갖다붙이긴 좀 뭣하지만,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의 체 게바라도 여행 당시 마음의 온도를 조금만 낮췄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더라면 불멸의 아이콘 ‘체 게바라’는 못 됐을지라도, 아르헨티나의 평범한 의사 ‘에르네스토 게바라’로 단란하게 살아가지 않았을까. 최소한 쫓겨다니다가 CIA에 피살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