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의 공포, 메이저 스튜디오의 영광, 장인들의 시대가 사라지면서 변화의 시기를 통과하던 196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 <허니문 킬러>는 그 모퉁이에서 발견되는 이상한 영화다. 연출을 맡은 마틴 스코시즈가 1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해고되자 그 자리에 들어간 사람은 각본을 쓴 레너드 캐슬이었다. 고전음악가 캐슬이 만든 유일한 영화 <허니문 킬러>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보다 한참을 더 나간 영화였다. 누벨바그, 시네마 베리테, 할리우드 B급영화가 뒤섞인 <허니문 킬러>는 1960년대판 <건 크레이지> 혹은 <그들은 밤에 산다>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밤만이 존재하는 괴물들의 세계- <허니문 킬러>의 그 검은 눈동자를 누구보다 사랑했고(그가 <나처럼 귀여운 아이>를 왜 만들었겠나), 루이스 브뉘엘로부터 불온함을 전수받은 아르투로 립스테인은 <허니문 킬러>를 다시 만들기로 한다.
말러 교향곡 6번 1악장의 죽음의 향기가 <허니문 킬러>를 지배했다면, <짙은 선홍색>엔 탱고의 치명적 유혹이 넘실댄다. <짙은 선홍색>의 두 남녀는, 옥죄는 운명 때문에 고통받기보다는 불순한 운명에 대항하고 서로의 불행한 영혼을 구원하기로 한다. 여기에 사랑을 위해 두 아이를 버리는 여자와 샤를 부아예 흉내를 내는 대머리 아저씨의 설정으로 비극성과 희극성은 더 강조된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고 에두아르트 한슬릭이 “악취가 난다”고 했던가? 그래, <허니문 킬러>와 <짙은 선홍색>은 악취나는 영화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가 불편하다고, 도덕이 흔들린다고, 캐릭터와 배우에게 동조하기 힘들다고 그들의 사랑마저 부정할 순 없다. 두 영화는 죄와 벌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외롭게 살던 두 악마가 나눈 지옥같이 영원한 사랑에 대한 탐구다. 가장 끔찍한 사람들에게도 분명 사랑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