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 출신의 아버지처럼 경제학과로 진학한 그는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면서 2년 전의 그 우주를 직접 경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들의 귀가시간이 늦는 이유를 용납할 수 없었던 아버지가 늘 문 앞에 서 계셨다. 가방을 내주고 나면 아버지는 대본을 꺼내서 찢기 일쑤였고, 그는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는 대신 ‘공부 못해서 연극한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7학기 때까지도 열심히 공부했다. “제 꿈이 좋은 아빠, 좋은 남편, 성실한 직장인이 되는 거였는데,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두고 고민하기 시작했죠.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이냐. 또 왜 그걸 해야 하는 것이냐. 해답을 찾기 위해서 일부러 질문을 이어갔어요. 그러다 보면 본질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결과, 어느 지점에서 질문이 멈춘 ‘직장인’ 대신 끝없이 질문이 이어지는 연극을 선택하게 됐다. 그날 밤 아버지께 드리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관점을 흐려야 되니까 되도록 길게, 가능한 한 신파로” 가면서 눈물을 흘린 표시로 물 몇 방울 떨어뜨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졸업 뒤 그는 김철리(현 국립극장 예술감독)씨가 운영하던 극단 ‘비파’에서 2년, 연우무대에서 3년간 활동했다. 1년 반 가까이 소속이 없는 상태에서 악어컴퍼니의 연락을 받고 고성웅 작, 박근형 연출의 <깔리귤라 1237호>에서 광대 역으로 무대에 올랐고, 이 연극을 계기로 극단 차이무가 준비한 <조통면옥>에 합류하게 됐다. 이 연극은 다시 동숭의 <이발사 박봉구> 합류 제안을 맞물려 주었다. “지난해 내 목표가 순수하게 연극으로만 1년에 500만원 정도 버는 거였어요. 제 나이에 그 정도 연수입이면 A-, B+ 학점 정도 돼요. 결과적으로 다섯 작품 하고 440만원 정도 벌었어요.” 이런 거에 비하면 첫 영화 <싱글즈>의 출연 계기는 소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겨레 문화학교 영화연출강의를 수강했던 그의 친구가 졸업작품을 찍을 때 주연으로 출연했다가 권칠인 감독 시선망에 잡혔다. 그의 친구는 연출부로, 조희봉은 배우로.
연극과 영화를 둘 다 계속할 거라는 그에겐 이 둘이 크게 다르지 않다. “매체가 다르니까 연기 방법도 물론 달라야 하겠지만” 자신의 연기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고 그 연기가 어떠했는지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반응도 똑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고민한다. “이게 과연 나의 갈 길인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래서 만약 안 하게 되면? 세 가지 정도를 생각했어요. 아침에 빵 냄새를 풍겨주는 빵집, 마음이 편안해지는 향기를 풍기는 종이가게, 열쇠나 칫솔 건네주며 여유롭게 사는 목욕탕 주인.” 그는 이렇게 여분의 계획이나 목표가 늘 있을 만큼 고민걱정이 많다. 하지만 올 10월에 한달간 연극공연 일정이 잡혀 있고 영화도 몇 편 얘기 중이라는 걸 보면, 고 2 때 만났던 그 경이로운 우주로부터 그리 쉽게 빠져나갈 것 같지는 않다.글 박혜명·사진 오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