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오롯이 관객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얼마나 자주 찾아올까. <도희야> (2014), <다음 소희>(2022)를 연출한 정주리 감독이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심사위원으로 영화제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다.
올해 경쟁 부문에는 아시아영화 13편이 초청됐다. 심사위원장인 중국의 거장 장이머우 감독을 비롯해 비간 감독, 사말 예슬라모바 배우, 이시카와 케이 감독, 쩐 티 빅 응옥 프로듀서, 최희서 배우까지 7명의 영화인이 심사를 맡는 다. 여기에 신작 <도라>(2026)의 국내 첫 상영까지 더해졌다. 심사가 한창 이어지던 영화제의 어느 날, 비프힐의 북적거리는 카페에서 정주리 감독을 만났다. 많은 관객 사이에 뒤섞여 영화를 보고 오랫동안 논의하는 시간을 보낸 그는 하루 4~5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고강도 일정을 보내고 있다고 했지만, 어쩐지 순수하게 행복해 보였다. 아마도 그간 잠시 잊고 지낸 기쁨이 그를 찾아온 모양이다.
영화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정주리 감독은 그동안 해외 영화제의 심사 제안을 고사해왔다. 영어 자막으로 영화를 봐야 하는 환경에서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산은 달랐다. “모국어로 자막이 잘 갖춰져 있으니 영화를 충분히 느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이렇게 실컷 영화를 볼 기회가 생각보다 많이 없다.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영화 자체를 온전히 감상할 시간이 줄었다. 모든 작품을 이렇게 깊이 있게 볼 수 있다는 게 정말 좋다.” 다른 심사위원들과 감상을 나누는 시간 역시 뜻깊다. “영화학교에 다니던 시절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던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장이머우 감독님의 말씀은 한마디 한마디가 마스터클래스 같다.” 서로 다른 영화적 경험을 가진 동료들과 한 작품을 오래 이야기하는 일. 정주리 감독은 이 시간이 주는 자극을 반겼다.
좋은 영화는 질문을 남긴다
아시아영화 경쟁 부문에는 거장 감독의 신작부터 신예의 데뷔작까지 다양한 영화가 모였다. 그렇다면 심사위원직의 정주리 감독은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바라볼까. “기준은 하나다.좋은 영화.” 심플하고도 분명한 답. 헷갈리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문장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계속 이야기가 나오고 질문이 생기는 작품이 있다. 좋은 영화에 대해서는 자꾸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익숙한 주제나 형식에 작품을 가두기보다 영화가 일으키는 움직임에 귀 기울이려 한다. 또 나를 온통 흔들어놓는 영화를 만나고 싶다." <도희야>와 <다음 소희>를 통해 사회적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해온 감독이지만, 심사에서 특정한 주제에 무게를 두지는 않는다. “내용과 형식, 기술과 실험 등 모든 항목을 함께 본다. 올해 경쟁작은 특히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스타일리시한 영화, 장르영화와 애니메이션까지 그 범주가 정말 다양하다. 감독의 제작 환경이나 작품 외적인 사정은 판단의 전제가 되지 않는다. 작품만 봐서는 제작 과정에 어떤 제약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 또한 영화적 세계를 만든 사람이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몫이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만든다.” 작품의 바깥보다 스크린 안에 놓인 세계를 선행하여 이해하는 것. 정주리 감독이 선택한 심사 방향이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심사 위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점도 이번 경험의 특별함이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각자가 살아온 사회에 따라 발견하는 의미가 달라진다. “이번 심사위원은 한국 외에도 중국, 카자흐스탄, 일본, 베트남 등으로 구성돼 있어 다양한 문화적 관점을 들어볼 수 있다. 이를테면 한국인인 나한텐 다소 배경처럼 보여지는 장면이 해당 국가의 심사위원의 설명을 통해 왜 그런 장면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면밀하게 이해할수 있다. 무엇보다 7명의 심사위원이 각자의 이야기를 정말 귀 기울여 듣는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궁금해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심사 의견을 좁혀간다.”
한번도 본 적 없지만 기다려온 영화
심사위원으로서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정주리 감독은 <도라>를 들고 관객 앞에 섰다. 제 79회 칸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뒤 부산영화제에서 국내 관객과 만난 작품이다. 정주리 감독에게는 설렘만큼 걱정도 컸다. “<도희야>와 <다음 소희>를 좋아해주셨던 분들이 이번 영화를 보고 낯설어하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렇지만 첫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관객으 로부터 잊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한번도 본적 없는 영화인데 오랫동안 기다려온 영화 같았다’고. 사실 <도라>에는 남몰래 품어 온 야심이 있었다. 어디서도 듣도 보도 못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야심. 익숙한 영화의 기준이나 전작의 분위기에 머무르지 않고 싶었다."
삶을 살다 보면 가끔은 오묘한 예감이 강렬 하게 다가온다. 이를테면, 아직 하루가 채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에 너무나 중요하게 기억될 것 같은 직감 같은 것들. 올해의 부산영화제가 정주리 감독에게 그렇다. 올해 부산은 자신이 만든 영화를 선보이는 곳이자 다른 이들이 만든 영화를 마음껏 만나는 장소가 됐다. “이런 시간은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굉장히 귀한 경험으로 남을 것 같다.” 좋은 영화가 무엇인지 계속 논의되는 세상에 사랑과 희망이 없을 리 없다. 새로 태어난 영화를 기꺼이 반겨준 정주리 감독은 자기 안에 새로운 지도를 만드는 중이다. 13편의 쟁쟁한 경쟁작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 하게 될까. 수상작들은 10월15일 목요일 부산 어워드 시상식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