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마다 자신의 생활사를 이입하는 대상이 달라지더라.” 영화제에서 일찍이 관객들을 만난 박민수, 안건형 감독은 입을 모아 위와 같은 감상을 전했다. 그만큼 <일과 날>은 다양한 나이대, 성별, 직업군의 일터를 조명한다. 일면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은 이들의 삶이 압축적으로 담긴 내레이션을 통해 특별해지고, 관객이 공감할 여지를 내어준다. 4~5년의 제작 과정을 거쳐 완성된 <일과 날>이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비프메세나상을 수상하고 마침내 극장에 걸리기까지 박민수, 안건형 감독이 거쳐온 길을 함께 되짚어보았다.
- <일과 날>을 함께 작업하게 된 계기는.
박민수 가끔 만나서 각자의 작업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그러다 우연히 이 영화의 기획이 언급됐고 대화를 하다 보니 둘 다 흥미를 느껴 여기까지 오게 됐다.
안건형 영화의 구조상 효율적으로 빠르게 작업을 마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기획 단계였던 2019년 이후로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돼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 출연자들은 어떤 기준으로 섭외하고 선정했나.
박민수 특정 기준을 두기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나온다는 인상을 줄 수 있게 나이, 성별, 직업 등을 고르게 고르려고 했다. 출연자 9명을 동시적으로 알아보지 않고 앞서 진행한 인터뷰이의 인터뷰 내용과 푸티지를 고려해 다음 사람을 정하는 식으로 점진적인 섭외 과정을 거쳤다.
안건형 특정 산업군을 카테고리화해 출연자들을 고루 섭외했다는 식의 느낌이 들지 않게 하는 게 목표였다. 관객들이 ‘저런 곳엔 저런 직업군도 있구나’ 하고 느끼게 하는 게 중요했다. 박 감독의 말대로 점진적으로 섭외하다보니 처음으로 섭외한 사람과 마지막으로 섭외한 사람 사이의 기간이 2년 이상으로 벌어졌다.
- 본격적인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는 대신 출연자가 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내레이션을 배치한 이유는.
박민수 사람들이 일할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드러내고 싶었다. 관객들이 영화를 통해 이 사람을 지켜보면서 속마음을 듣는 느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내레이션 대사는 사전 인터뷰를 진행한 뒤 감독들이 정리해 쓴 것인가.
안건형 그렇다. 사전에 동의를 구한 뒤 수정 요청이 있으면 바꾸는 식으로 진행했다. 간혹 본인이 직접 의견을 주기도 했고. 상대를 그대로 드러내는 표현일 경우 이상하게 들리거나 비문일지라도 그대로 넣었다.
박민수 출연자의 말이 다른 의도로 인용되지 않도록 어미 하나까지 신경 쓰고, 이들이 서로 편하게 대화했을 때의 생생함까지 잘 보존 하려 했다.
- 기억에 남는 내레이션이 있나.
안건형 이승진 선생님이 재활용 작업을 하는 장면에 들어간 말이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순간 누군가는 울게 된다. 그 심정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열심히 안 산 게 아니다. 나는 진짜 악착같이 살았다. 있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더 많이 가져가고 없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도 안된다. 사는 게 허무하고 어떤 때는 정말 화가 난다.” 녹음 때 읽다 울컥하기도 하셨는데, 정말 잊을 수 없는 대사다. 나 역시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동요된다.
박민수 전파사 사장님의 마지막 내레이션을 고르겠다. “나는 쉬는 날 없이 매일 출근했다. 잘될 때도 있었고 잘 안될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평생을 일해왔다. 앞으로도 하루 더 출근할 수 있고 그저 일만 할 수 있으면 고마운 일이다.” 일을 할 때 보람을 느끼는 동시에 모멸감을 느낄 때도 있지 않나. 축복이자 저주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 장면과 내레이션을 통해 노동이 인간의 숙명처럼 느껴진다는 경험을 했다.
- 일터 외의 출연자들의 사생활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안건형 처음에는 일터와 가정생활의 모습을 반씩 담으려 했는데 생각보다 사생활이 아예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중년 남성일수록 더 그랬다. 굳이 뽑자면 잠자기 전에 휴대폰, TV를 보는 것이 유일한 취미 생활이었다. <일과 날>의 출연자들은 대부분 혼자 일하는 직업인들이고, 칸막이가 쳐진 공간에서 하나의 숏 안에 혼자 등장한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타인의 모습이 담긴 숏을 볼 수 없다. 이들에겐 디지털 디바이스가 타인의 삶과 세계를 파악할 유일한 매체다. 관객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영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접하지 않나. 외적으론 우리도 스크린 속 출연자들과 마찬가지로 각자의 칸막이 속에서 일하고 있고. 그러한 알레고리를 구조적으로 씌워놓았다.
- 출연자들이 불을 끄고 잠드는 신 역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박민수 <일과 날>은 격자구조의 영화다. 9명 출연자의 숏이 모두 원테이크로 촬영됐고 이들이 9번씩 등장하기 때문에 영화는 총 81개의 숏으로 이루어졌다. 자연스레 9개의 시퀀스가 나오는데 암전되는 건 한 시퀀스가 끝났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낮의 모습은 달라도 밤엔 누구나 잠에 드니까, 상징적으로도 하루가 끝나고 이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줄 수도 있고 영화의 리듬감을 고려할 때도 그런 장치를 넣는 게 나쁘지 않아 선택하게 됐다.
- 영화를 제작하며 새롭게 느낀 점이 있다면.
안건형 출연자들 외에도 섭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을 만났다. 나이, 성별, 지역 차에 따라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하는지 느껴졌고 그 와중에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지점이 있어, 이게 현재의 한국이구나 싶었다. 영화를 만들며 보고 들은 것에 대한 기억이 아주 오래 갈 것 같다.
박민수 특정 연령대에 접어들어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내가 속한 영역 밖의 삶과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게 되지 않나. 그런 이들의 삶이 궁금했는데 여러 사람들과 관계 맺고 촬영을 하며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면 어떤 삶도 지속되기 어렵다는 걸 느꼈다. 영화에서 기후 위기, 인공지능에 대한 사람들의 걱정이 언급되는데 그런 상황들로 인해 인간으로서 일을 하며 느끼는 보람, 인간다움이 사라질 미래가 올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