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에선 경비행기가 택시였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원시림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문명이 싹트기 전 태고의 지구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문득 알래스카 사람들이 부러웠다. 한국과는 삶의 결이 다르겠지. 마음의 넓이와 생각의 크기까지도.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니까. 나는 네명의 산악인 선배와 함께 북미 최고봉 ‘디날리’로 향하는 중이었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미지의 동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품지 않으니 문명이라고는 흔적조차 없는 곳. 오직 인간만이 첨단의 등반 장비와 피복으로 무장하고 겨우 며칠을 바득바득 머물다 간다. 운이 나쁘면 영영 돌아가지 못하거나. 원정 동안 길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가냘픈 주검이 디날리에서 만난 유일한 생명체였다. 인간의 부산물을 주워 먹으며 따라온 새는 몰랐을 것이다. 올라갈수록 공기가 희박해지고 추워진다는 것을. 새의 죽음 앞에서 역설적인 평화를 느꼈다. 섭리가 그렇다면 죽음 또한 받아들여야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풍경은 한없이 거대하고 소리는 지독하게 고요했다. 햇빛이 눈에 닿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그저 앞사람과 뒷사람의 들숨과 날숨 소리만이 희미하게 맴돌았다. 척박한 곳이지만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오직 자연의 질서만이 존재하는 곳.
등정을 위해 보름치 식량과 텐트 등 필수품을 썰매에 가득 싣고 첫발을 내딛었다. 차갑고 깨끗한 공기가 몸에 퍼지자 서울의 공해에 오염된 폐부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숨쉬기가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다니. 큰 숨 한번에 한 걸음씩, 무거운 썰매를 끌고 천천히 나아갔다. 이 한 걸음이 모이고 모여 기어이 나를 정상에 데려다주리라. 하루 종일 눈과 얼음 위를 걷고, 혹한의 텐트 속에서 두꺼운 패딩 재킷을 입은 장정들과 부대끼는 지난한 생활도 조금씩 적응되어갔다. 일주일 남짓한 동안 캠프1, 2, 3을 무탈하게 지나며 할 만하다는 시건방진 생각이 고개를 들려고 하자, 디날리 등반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모터사이클 힐’이 나타났다. 가히 악명 높은 언덕이었다. 그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저절로 입이 다물어지는 경사 길이었다. 겉은 고요해도 내면에서는 저마다 사투를 벌였다. 산과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마주한 싸움이었다. 기어이 언덕을 다 오르고 입안에 단내가 가시기도 전에 가장 고령인 S가 고산병 증세를 보였다. 원정대장 K는 어렵지 않게 결정했다. 다시 내려가자.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고산병은 따로 약이 없어 고도를 낮추는 수밖에 없다.
S의 고산병은 끝내 호전되지 않았다. 논의 끝에 그는 홀로 캠프3에 남고, 다른 사람들은 다시 정상을 향하기로 했다. 홀로 남겨진 선배의 처지가 눈에 밟혔지만, 얼른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길을 나서야만 했다. 모터사이클 힐은 여전히 힘들었고, 언덕 끝에는 새로운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탈에 좁게 난 길을 횡으로 가로질러 통과해야 했는데, 혹여라도 미끄러진다면 시체를 수습할 방법도 없어 보였다. 한 걸음마다 피켈을 박아 지지하며 긴장 속에 길을 건너 드디어 캠프4에 도착했다. ‘디날리 시티’라고 특별하게 불리는 캠프. 정상의 8할 정도 되는 지점이라 부쩍 추웠고 바람은 더욱 거셌다. 사람들은 여기서 축난 몸을 추스르고 날씨를 보아가며 최소한의 짐만 챙겨 속전속결로 등정을 완료한다. 손에 잡힐 것처럼 디날리 정상이 가까웠다. 하지만 원정대장 K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제 그만 하산하자고. 팀에 균열이 생겼으니, 정상에 도전하기 어렵다고. 나머지 선배 둘이 크게 다툰 탓이었다. 나야 고산 경험이 적은 초보라 애초에 큰 욕심이 없었지만, 다른 선배들은 벼르고 별러서 온 것이었다. 고작 이만한 일로 돌아가야 하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인간들 사이에 분란이 있든 말든, 디날리는 무심했다. 안개는 두터웠고, 텐트 천장이 코에 닿을 것처럼 강한 바람이 불었다. 하산을 결정하고도 악천후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누가 우리 텐트를 찾아왔다. 불길한 예감과 함께. 그는 캠프3에 홀로 남겨진 S의 안위를 전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이상 증세를 보이니 최대한 빨리 내려가서 살피라고. 이미 끝난 등반이지만 이제 정말로 끝이 났구나. 악천후 때문에 당장 나설 수 없었다. 모든 짐을 꾸려 하산할 수 있는 상태로 한참을 대기하다가, 희미하게나마 시야가 열린 틈에 하산을 강행했다. 하지만 이내 짙은 안개가 다시 들어차 한치 앞만 겨우 보였고 바람은 갈수록 심하게 불었다. 디날리에 침입한 인간들을 세상 밖으로 날려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날카로운 얼음 알갱이가 허공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얼굴을 때렸다. 고글에 얼음 알갱이가 달라붙어 시야를 막았고 장갑으로 연신 훔쳐도 달라붙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장갑이 젖으며 손끝이 시려왔다. 총체적인 정비가 필요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모두 조난당할 판이었다. 디날리는 매정했다. 그야말로 혼비백산해서 하산하는데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날이 화창하게 갰다. 뒤돌아보니 머리 바로 위에 구름이 있었다. 우리는 구름을 뚫고 내려온 것이었다. 홀로 남겨진 S는 우리를 만나자 곧 안정을 찾았다. 다행이었다. 최악은 면했구나. 하지만 거기서 시련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산을 마저하는 동안 원정대장 K는 크레바스에 추락해 수십명이 동원된 구조 끝에 헬리콥터로 후송되었고, 다른 선배는 손에 동상이 걸려 귀국과 함께 손가락 두개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한여름 밤의 꿈같은 소란과 함께 디날리 등정은 막을 내렸다. 여행은 필시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고, 삶은 이처럼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패한 등정이지만 디날리에 다녀온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감개무량하다. 욕망만으로 쉬이 거스를 수 없는 대자연의 숭고한 섭리를 잘 만나고 왔다. 내 삶이 결과주의에서 해방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여행이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꼭 좋은 영화는 아니지 않던가. 가끔 생각해보곤 한다. 순탄하게 등정에 성공했더라면, 나에게 디날리는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