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happiness의 어원은 happen이고, 행복이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happen)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라고,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행복의 요건은 두 가지인데, 먼저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려야 하고, 둘째로 그 일에 대해 긍정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도 어렵지만 사실 정말 어려운 것은 전자인데, 나는 주변에 누가누가 연애한다는 재미난 이야기도 늘 그 그룹에서 가장 마지막에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항상 그랬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재미난 일은 어제 일어났고 나 빼고 다 거기 있었다. 다들 좋은 데 가고 맛있는 거 먹고 재밌는 거 볼 때 나는 항상 이상하게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세상은 늘 나를 원 가장자리 혹은 원 밖에 세워둔 채 자기들끼리만 굴러가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는 이자람의 판소리 공연 <눈, 눈, 눈>을 보러 부산에 다녀왔다. 서울 초연 때는 역시나 티켓 오픈 날짜를 놓치고 땅만 쳤는데, 가을에 출연할 연극 연습을 눈앞에 두고 보니 공연 고수의 최신작을 보며 전의를 다져야겠다 싶어 무리해서 부산까지 가게 된 것이다. 객석에 앉아 행복과 주변시에 대한 생각을 더듬다 ‘나는 왜 항상 다른 곳에 있었나’ 하는 상념에 젖으려는데 공연이 시작한다. 소리꾼 이자람과 고수 이준형이 담백하고 단단하게 걸어 나온다. 그 순간 ‘그녀는 여기에 있다’는 문장이 마음을 스쳤다. 두 사람이 자리하고 소리꾼이 객석에 대고 뭐라고 인사 한마디 할 줄 알았더니 대뜸 소리를 시작한다. ‘인왕~~산~~’ 그 담백하고 에누리 없는 대면의 순간, 마음속에 ‘나도 여기 있다’는 문장이 새로이 스치더니 갑자기 두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나는 멍때리며 길을 걷다가 어느 쪽 횡단보도든 파란불이 켜지면 훈련된 경주마처럼 본능적으로 건너버린다. 건너고 나면 ‘어? 여기 어디지? 내가 왜 여기 있지?’, 어떨 때는 버스 정류장에서 몇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뭔가 아는 번호에 깨끗하고 빈 버스가 오면 순간적으로 조바심이 나서 타버린다. 나는 왠지 운이 좋아서 눈감고 주워 탄 버스도 나를 목적지 가까이에 내려줄 것만 같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 어디 갈 건데?’, 앉자마자 정신을 차리고 버스 벽면에 붙은 노선도를 보면 나는 먼 길을 돌아 더 덥고 더 먼 곳에 내려야 한다. 이렇게 정신이 팔려 나는 주로 다른 곳에 있는 것이지 특별히 마이너한 취향이 있다거나 반골 기질을 타고났기 때문은 아니다.
이자람 판소리 <눈, 눈, 눈>. 사진제공 LG아트센터.
‘인왕~~산~~~’으로 시작한 소리꾼이 어느샌가 ‘눈~~~~눈~~~~누우우운~~~’ 하며 얇고 높고 긴소리로 무대 위에 눈을 불러온다. 톨스토이의 <주인과 하인>이 원작인 이자람의 <눈, 눈, 눈>은 눈이 휘몰아치는 명절 연휴에 숲을 사기 위해 길을 나서는 러시아 부자 상인 바실리의 하룻밤 생사에 관한 이야기다. 바실리는 하인 니키타와 함께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점심때쯤 무리해서 길을 나서는데, 눈길에서 여러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빠르고 험한 길과 느리고 안전한 길 중 어느 길을 택할지, 우연히 들른 마을에서 하루 자고 갈지 해지는 것을 무릅쓰고 계속 갈지, 말고삐를 더 전문적인 니키타에게 맡길지 본인이 계속 쥐고 있을지, 지친 말을 쉬게 할지 무리하게 할지 등등. 바실리는 이윤 때문인지 자존심 때문인지 자신감 때문인지 기분 때문인지 뭔지, 정말이지 무엇 때문인지, 뭐에 씐 사람처럼 눈보라 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다 결국 고립되어 얼어 죽고 만다. 세상에! 정말 죽다니! 소리꾼에 멱살 잡혀 바실리와 함께 눈속을 헤매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어느새 소리꾼은 ‘바실리의 모습이 꼭 나와 같다!’는 자기 고백의 아니리와 ‘이제 이자람도 힘들고 고수 관절도 아프고 관객 여러분 엉덩이도 아플 테니 그만하겠다’는 너스레로 담백한 작별을 고한다.
극장 밖은 여름 해가 제법 스러져 간다. 서울 갈 생각에 끼니도 거르고, 택시 타고 기차 타고 서울역에 내리니 부산에서부터 한두 방울씩 내리던 비가 슬슬 쏟아지기 시작한다. 부산역 근처에서 사서 보냉백에 담아 온 어묵과 막걸리를 양손에 들고 등짐도 지고 ‘택시 타는 곳’에 줄을 섰는데, 예약 택시만 쏠쏠히 오고 일반 손님을 태우는 택시는 회전율이 예전만 못하다. ‘나도 예약할 걸 그랬나?’ 빗물에 번지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눈을 찡그려 뜨고 앞을 보는데 ‘택시 내리는 곳’에 손님을 내려준 택시 등이 곧바로 ‘빈 차’로 바뀐다. 옳거니! 꾀가 난 나는 냉큼 길을 건너 택시 내리는 곳으로 간다. 손님을 내려주느라 잠깐 멈춘 빈 택시 문을 벌컥 열었더니, 기사님이 손을 휘휘 저으며 택시 타는 곳에서만 태울 수 있다고 돌아가라 한다. 아차, 뒤를 돌아보니 택시 승차줄은 순식간에 길어져 이제는 돌아갈 수도 안 돌아갈 수도 없다. 잠시 망연히 서 있다가, ‘그래, 이제라도 택시를 부르자!’ 핸드폰 액정을 적시는 빗물을 닦아가며 앱으로 택시를 부르니 가까운 택시가 금세 잡힌다. 옳거니! 슬며시 자신감이 올라 택시 오는 방향을 노려보는데 2분 거리에 있다던 택시는 좀처럼 오지를 않고 ‘택시 타는 곳’에 있던 손님들은 더디더라도 착실하게 착착 택시를 타고 떠난다. 입술을 깨무는데, 앗! 헤드폰이 내 머리 위에서 여태 비를 맞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급히 헤드폰과 어묵과 막걸리와 배낭을 양손으로 저글링하느라 용을 쓰는 그때, 예약한 택시 기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다. 머리 어깨 무릎 발을 다 동원해 ‘여보세요!’ 그랬더니 대뜸, ‘오케이저축은행 보이시죠?’ ‘오케이저축은행이요?’ ‘오케이저축은행이요.’ 필사적으로 두리번거리다 ‘네! 보여요!’ 나는 빗속을 달려 저 멀리 귀퉁이에 꼼수처럼 은신해 있는 택시에 오른다. 뒷좌석에 내동댕이치듯 짐을 부리는데 ‘내가 바로 눈보라 속을 헤매는 바실리다’는 생각에 픽 웃음이 난다.
기진한 채 집에 들어서며 비에 젖은 어묵과 막걸리를 남편에게 건넨다. 밤 10시가 다 되도록 나 기다리느라 아직 식전이라던 남편이 만두라면을 끓여 내놓는다. 나 도착할 시간에 딱 맞추느라 끓는 물에 면을 담갔다 건졌다 했다더니 참깨라면이 너구리가 되어 있다. 국물 없는 라면이 왜 이리도 맛있나. 김신록바실리는 오늘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구나! 라면 한 젓가락을 후루룩 하면 그가 여기에 있다, 국물 한 숟가락을 쥐어짜 마시면 나도 여기에 있다, 오가는 젓가락질과 숟가락질 사이에 라면도 여기에 있다.
언제 고생했냐는 듯 ‘행복~행복~~’ 소리를 하며 침대에 누워 부른 배를 두드리다 아침에 함께 달리기로 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몇몇 지인들이 모여 러닝하는 아침 모임에 오랜만에 함께하기로 했다가 오전에 부산 가는 일정이 부담스러워 안 가고 못 간 것인데, 전화기 너머 친구 말이 멤버 중 한명이 나 준다고 산딸기를 가져왔다가 도로 가져갔다고, 다음주까지 물러지지 않으면 다시 가지고 나온다고 했단다. 산딸기 주인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과 그 싱싱하고 여린 산딸기가 한주 동안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미약하나마 심장이 죄어온다. 아! 나는 왜 거기 없었나, 부산행 기차가 오전 11시58분이었으니 아침 8시에 함께 뛰고 10시까지 집에 돌아와 씻고 나갔으면 딱이었을 텐데…. 이런 무리하다 눈 속에서 얼어 죽을 바실리 같은 생각을 하며 친구에게 <눈, 눈, 눈>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도 서울에서 그 공연 봤는데 사실 자기가 꼭 바실리와 같다고 고백한다. 세상에! 세상엔 바실리들만 사나? 오늘 만난 사람 중 벌써 네명이, 오리지널 바실리, 소리꾼 이자람, 나, 내 친구, 이렇게 네명이, 바실리다! 그럼 나도 뭐 그렇게 특별히 흉물스럽거나 추레한 인간은 아니라는 말씀인가? 부디 오리지널 바실리가 죽는 순간 알게 된 깨달음이 살아 있는 바실리들에게는 죽기 하루 전에라도 임하기를. 아멘.
사실 눈먼 채로 눈속을 헤매던 바실리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온몸을 바쳐 니키타를 구한다. 평생을 자기만 생각하며 살아온 바실리는 얼어 죽어가는 니키타를 발견하고는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눈 쌓인 니키타의 옷섶을 풀어헤치고 중무장한 자신의 옷섶도 열어젖히고 바로 눕힌 니키타의 배 위에 자신의 배를 갖다 대며 엎어진다. 둘은 맨살을 맞대고 한 덩어리로 눈보라 속에서 밤을 지새우다 결국 위에 있던 바실리는 죽고 아래 있던 니키타는 살아남는다. 바실리가 죽기 직전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 그가 왜 갑자기 자기 대신 니키타를 살렸는지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게 인상 깊었던 것은 그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둘의 맨살이 드러나고 맞닿는 갑작스러운 순간이었다. 망설이거나 주춤거리지 않고, 이해나 변명을 구하지 않고, 눈보라나 바람 소리에 정신 팔리지 않고, 과감하고 신속하게 행해지던 그 행위의 순간이 기억난다. 그건 어쩌면 소리꾼이 ‘인왕~~산~~’ 할 때 내가 느꼈던 감각과 비슷한 게 아닐까? 지금 어떠세요, 추우세요? 슬퍼요? 힘드세요? 묻는 대신, 망설임 없이 자신의 옷섶을 열어젖히고 상대의 옷섶도 열어젖히고 맨살과 맨살을 맞대버리는, 둘을 한 덩어리로 묶어 여기 있게 만들어버리는 관통의 감각 말이다.
이부자리를 펼치고 양치질을 하며 생각한다. 별말 없이 마주 앉은 늦은 식탁의 불어 터진 라면이 왜 그렇게 맛있었나, 산딸기를 재차 싸들고 나올 그 정성 때문에라도 혹은 냉장고에서 산화되며 일주일을 버틸 그 산딸기 때문에라도 다음주에는 달리기 모임에 꼭 나가야지, 중무장한 내 옷섶부터 열어젖히는 연습을 해야지, 무엇보다 일단은, <씨네21>을 읽는 바실리들에게 이 순간을 적어 보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