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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지브리화되었나

AI 지브리 이미지 생성, 그 안에 스며 있는 우리의 노스탤지어

지난 3월 말, 오픈AI의 CEO 샘 올트먼이 자신의 SNS에 챗GPT-4로 생성한 지브리 스타일의 프로필 사진, 일명 ‘지브리 프사(프로필 사진)’를 올리자 전세계 사람들이 너도나도 따라 올리는 이색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챗GPT 사용자도 5억명에서 2배 수준으로 증가했다. 특히 한국에선 미국 다음으로 사용자가 늘면서 이 유행을 주도했다. 그렇다면 때아닌 이 지브리 밈은 우리나라에서 왜 그토록 관심과 인기를 끌었을까? 그 원인을 생각하다가 문득 1990년대 어느 해 겨울, 홍대 거리의 한 카페 앞에 서 있던 토토로 모양의 눈사람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살짝 해볼까 한다.

아침잠을 설치게 한 특선 만화

<벼랑 위의 포뇨>

지브리 밈과 관련해 머릿속을 정신없이 뒤지다 보니, 어느새 기억 저편의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마땅한 놀이가 없던 시대, 텔레비전에서 매주 나오는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에게 큰 위안과 즐거움을 주었다. 당시 애니메이션은 ‘TV 만화’로 불리며 일본산 작품이 방송국마다 경쟁하듯 전파를 탔다. 특히 방학이나 공휴일 아침 시간대에 ‘특선 만화’라는 타이틀로 미국이나 일본의 극장용 작품을 자주 방영했는데, 눈곱 낀 눈을 비비면서 비몽사몽 본 기억이 난다. 지금은 세계의 거장이 된 스튜디오 지브리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20대에 참여한 도에이 초창기 작품들도 이때 처음 보았다. 그중 1975년에 방영된 <장화 신은 고양이>가 뇌리에 짙게 남아 있다. 무서운 마왕에게 쫓겨 높은 탑 꼭대기에 올라 제발 해가 뜨기를 빌며 부둥켜안은 소년과 공주…. 자신도 모르게 두손을 꼭 잡고 흑백 브라운관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추억, 나만 갖고 있지는 않을 듯싶다. 웃픈 사실은 이 작품들이 일제가 아닌 미제로 둔갑해 소개됐다는 점이다. 미국에 수출된 일본산 필름을 미국산인 것처럼 수입했기 때문.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며 일본 문화를 개방하지 않았던 시절, 방송심의규정을 통과하기 위해 쓴 깜찍한 속임수였다. 그래서 누가 그렸는지, 어떤 회사가 만들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미야자키와 처음 만났다.

이후 그가 메인으로 참여한 명작 동화 소재의 <플란다스의 개> <알프스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가 차례로 방영되면서 비로소 지브리 스타일이라는 것을 접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하자면, 지브리 스타일은 미야자키 고유의 것이 아니다. 1958년의 <몽견동자> 와 <백사전> 때부터 제작사 도에이 동화에 하나의 전통처럼 내려온 화풍에다 미야자키의 만화적인 몇몇 특징이 더해져 탄생했다. 이는 지금도 후배 애니메이터들에 의해 미세하게 진화하고 있다.

열혈 소년과 감성 소녀, 안방극장을 찢었다!

코난 세대 구별법을 아는가? 코난을 아느냐고 할 때 <미래소년 코난> 을 말하면 구세대, <명탐정 코난>을 말하면 신세대라는 철 지난 우스갯소리다. 이처럼 <미래소년 코난>은 1980년대 우리 어린이 문화의 아이콘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작가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지브리 스타일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기발한 액션과 세기말 메시지로 TV 시청률도 고공행진이었는데, 방송국에 재방영을 요청하는 어린 시청자들의 전화가 쇄도했다는 뒷얘기도 있다. ‘푸른 바다 저 멀리’로 시작하는 주제가는 가을 운동회 때 응원가로 목이 터져라 불렀고, 반마다 포비(코난의 단짝)라는 별명을 가진 학생이 한둘은 꼭 있을 만큼 몰입감도 상당했다. 돌이켜보면 이것이 한국 최초의 지브리 밈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래소년 코난>이 남자아이들의 로망이었다면, 1985년에 방영된 <빨강머리 앤>은 여자아이들의 로망이었다. 이화여고 신지식 선생이 국내에 처음 번역한 캐나다의 성장소설이 지브리 스타일로 TV 화면에 나오자 사춘기 여학생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앤을 담당한 성우 정경애의 목소리는 캐릭터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높은 인기에 한몫했다. 그녀의 호소력 있는 감성 보이스는 일본의 오리지널 성우보다 찰떡궁합이라는 평가까지 들었다.

우리 문단엔 소설가 백영옥처럼 당시 <빨강머리 앤>을 보며 작가가 된 사람이 꽤 있다. 엄마와 딸이 함께 시청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런 소중한 추억을 쌓을 수 있도록 했다는 의미가 크다. 201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한국 대중문화 시장에 한자리를 차지한 ‘앤 컬처’도 이 애니메이션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미녀와 야수> 하면 디즈니 작품을 떠올리듯 이제 <빨강머리 앤> 하면 어김없이 이 지브리 스타일의 작품을 떠올리게 된다.

애니 덕후의 소장 1티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980년대 후반, 비디오의 대중화로 지브리 스타일은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왔다. 그리고 서울 명동의 회현 지하상가는 애니메이션 덕후들이 전국에서 시도 때도 없이 모여드는 본산이 되었다. 그곳을 통해 이전까지 애니메이션 잡지나 무크 등 해설과 스틸컷으로만 봐왔던 귀한 작품들을 비디오테이프로 소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가게가 용산이나 잠실에도 있었지만 명동처럼 많지 않았다). 당연히 이들 모두 불법복제였다. 해상도 420이라는, 당시로선 높은 해상도를 자랑하는 레이저디스크로 암암리에 카피한 해적판…! 하지만 일본 문화 개방이 안된 상황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싶은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오팔전자, 현대전자, 형음악실 등 애니메이션을 좀 봤다는 사람치고 이들 가게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가장 인기 있던 품목은 <이웃집 토토로>나 <천공의 성 라퓨타> 등 지브리 작품이었다. 구입을 예약한 사람이 너무 많아 일주일 이상 기다리는 것도 예사였다. 무엇보다 이 비디오테이프들이 전국 대학가를 돌면서 지브리를 테마로 한 소규모 애니메이션 영화제와 PC통신 동호회가 주도하는 감상회가 열렸다. 한편 일부 덕후들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영화 개봉일에 맞춰 직접 일본에 가서 <붉은 돼지>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등을 직관했다. 이른바 ‘원정 관람’이었다. <모노노케 히메>가 발표된 1997년은 그 기묘한 현상의 정점을 이루었다. 그래서 대체 지브리가 뭔데 비싼 해외여행 비용을 써가며 보느냐는 말도 무성했다. 유난을 떤다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젊은이들은 지브리처럼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동경의 싹을 틔웠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 중 많은 수가 훗날 대중문화 각 분야로 진출해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다. 서두에 언급한 홍대의 카페에 서 있던 토토로 눈사람도 아마 그런 꿈을 가진 학생이 만들지 않았을까? 지금은 꼰대가 됐을지 모를 X세대의 자유로운 일상의 한편에 어느새 이렇게 지브리가 들어와 있었다.

젊은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1998년 일본대중문화개방 이후 지브리는 우리 일상에 더 깊고 더 넓게 자리 잡았다. 물론 지브리 판권 전쟁이 치열하게 치러진 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필두로 국내에 정식 개봉된 지브리 명작들은 성적이 그리 썩 좋지 않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힘든 시기를 지나 2002년 개봉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덕후의 벽을 넘어 일반 대중에게도 큰 호응을 얻으며, 관객 200만명이라는 디즈니급 흥행을 거두었다. 2004년 겨울,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300만명을 흥행 몰이해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의 대세임을 입이런 사실을 직접 들었다. 이같은 현상은 영화계에만 국한되지 않는증했다.

이후 <고양이의 보은> <게드 전기: 어스시의 전설> <벼랑 위의 포뇨> 등 신작이 속속 개봉하면서 지브리는 어느 영화 제작사보다 우리와 가까워졌다. 이런 흥행력과 친근감은 당연히 관련 굿즈의 판매로 이어졌다. 학생들의 가방에는 토토로 액세서리가 달리고, 책상에는 하울의 피규어가 놓였다. 과거 지브리 캐릭터에 고개를 갸웃하던 사람은 줄고, 굿즈를 모으는 사람은 늘어 두터운 팬층을 이루었다. 이에 지브리 굿즈 숍은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지브리 음악으로 잘 알려진 히사이시 조는 <시네마 천국> 등의 엔니오 모리코네와 함께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음악가의 반열에 올랐다. 특히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테마곡 <Merry Go Round of Life>는 지금도 여전히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그램에 곡 신청이 이어지고, 클래식 음악 콘서트에선 단골 연주곡으로 눈길을 끈다. 지브리 작품은 시각뿐 아니라 청각의 즐거움마저 주고 있다. TV, 라디오, 신문, 잡지 등에 미야자키의 세계관이나 지브리의 성공담을 다룬 프로그램이나 기사의 노출도도 급상승했다. 2000년대, 트렌드 측정 기준이 된 포털사이트 검색에도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단어는 매년 5위 안에 들었다. 젊은이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자리 잡은 것이다. 지브리 스타일로 불리는 미야자키의 화풍은 불법의 시대 이후 합법의 시대에 우리 뇌리에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이 모두가 현재진행형이다.

토토로는 옥자를 낳고

<이웃집 토토로>

2017년 프랑스의 칸영화제에서 <옥자>의 감독 봉준호는 “어릴 때부터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랐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창작자 중에 자연과 생명에 대한 작품을 만들면서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긴 쉽지 않을 듯하다”라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 <옥자>는 <이웃집 토토로> 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토토로의 배 위에서 곤히 잠든 메이를 연상시키는 해외 포스터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이전 <설국열차>는 사회 계급의 갈등이라는 미야자키의 전형적인 레퍼토리를 답습했고, 최신작 <미키 17>에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왕충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크리퍼라는 벌레형 우주 생명체도 선보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에게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창작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었다.

과거 다른 영화에도 비슷한 예는 여럿 있다. 2005년 극장가 흥행 1위였던 <웰컴 투 동막골>은 마치 <미래소년 코난>의 무대 하이하버를 실사로 옮긴 듯하다. 어릴 적 <미래소년 코난>에 열광했던 경험과 그 메시지를 말하던 박광현 감독의 인터뷰로 미야자키의 영향력을 십분 느낄 수 있다. 또 같은 해 발표된 <청연>은 원래 <붉은 돼지>를 롤모델로 삼은 본격 항공영화였다. 지브리의 열렬한 팬이던 해당 기획자에게 이런 사실을 직접 들었다. 이같은 현상은 영화계에만 국한되지 않는 다. 유행에 민감한 대중음악도 마찬가지다. 이승환의 노래 <>의 뮤직비디오에선 <천공의 성 라퓨타>의 SF 세계관을 느낄 수 있고, 그룹 코나의 <마녀! 여행을 떠나다>와 장나라의 <키키>를 들으면 <마녀 배달부 키키>를 떠올리게 된다. 드라마 <>의 주제가 <Perhaps Love>를 제이와 듀엣으로 부른 남자 가수는 ‘하울’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며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이외에도 만화, 애니메이션, 소설, 드라마, 상업디자인 등 대중문화는 물론이고 생각지 못한 다양한 분야에까지 지브리가 끼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그야말로 ‘지브리 사조(思潮)’라고 불릴 만하다. 올봄, 세계인의 SNS을 뜨겁게 달군 챗GPT의 지브리 밈은 이 거대한 흐름의 한 지류에 불과하다.

순수하고 아련한 세계를 여는 열쇠

미야자키가 일으킨 지브리 사조는 오래전부터 전세계인의 창작 영역에 소소하게, 혹은 막대하게 영향을 끼쳐왔다. 2021년 블록버스터의 본고장인 할리우드에 아카데미영화박물관이 세워졌을 때 첫 전시회로 미야자키의 창작 세계를 다뤘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상업영화에 대한 자부심이 어느 나라보다 강한 미국에서, 게다가 자신들의 영화 역사를 드러내는 대규모 시설에서 개관 기념 전시의 테마를 미야자키 하야오로 정했다는 사실은 이미 그의 영향력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이 대단한 인지도는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1963년 <멍멍 주신구라>에 동화 참여를 시작으로 2023년 마지막 장편으로 발표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까지, 미야자키는 백발의 야윈 모습이 가엾을 정도로 꼬박 60년을 제작 현장에서 쉼 없이 달려왔다. 필름영화, 흑백TV, 컬러TV, 2D 디지털영화, 3D CG영화의 시대를 거치며 상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꾸준히 주목받은 세계 영상 역사상 유일무이한 행보다.

미야자키는 모든 세대를 관통한다.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TV나 영화를 보기 시작해 사춘기를 거쳐 청년이 되고 중년과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창작 세계와 함께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또 지브리 작품의 영상과 그림은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AI 시대에 지브리 스타일이 유행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그저 그 시점이 언제일지가 문제였을 뿐…. 순수하고 아련하다는 말은 지브리 스타일을 가장 잘 대변한다. 부드러운 선과 따뜻한 색감은 그 느낌을 구현하는 수단이다. 미야자키 작품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까닭도 그 때문일 것이다. AI로 만든 지브리 프사는 우리가 지브리의 순수하고 아련한 세계로 들어가 빡빡한 현실을 잠시 잊고 쉴 수 있는 비밀의 열쇠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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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대원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