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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x cross] 번역가의 눈, 번역가의 언어, <오역하는 말들> 출간한 번역가 황석희
정재현 사진 백종헌 2025-06-16

알베르 카뮈가 쓴 <이방인>의 결말부 원문. ‘à la limite de la nuit’를 두고 ‘밤의 저 끝’, ‘밤의 경계’, ‘밤이 시작되려는 바로 그때’ 등온갖 번역문이 존재한다. 이어지는 문장의 ‘sirènes’가 ‘뱃고동 소리’일지 ‘사이렌’일지에 대한 논쟁 또한 무덤 속 카뮈가 답을 알려주지 않는 이상 독자들은 자신의 취향에 부합하는 번역문을 지지할 것이다. 무엇이 정역이고 오역인지를 가리는 일은 수상전에 가까워 쉽게 결론을 내기 어렵다. 조성진과 임윤찬의 쇼팽 에튀드가 전혀 다른 곡이듯, 번역문을 읽는 묘미는 다양한 해석을 즐기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황석희 번역가가 신간 <오역하는 말들>에서 “번역가는 하나의 곡을 오만 가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연주하는 연주자들”, “번역은 번역가라는 필터를 거치는 결과물” 등으로 적은 것도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영화와 시리즈, 연극과 뮤지컬 등 장르를 종횡무진하며 ‘번역: 황석희’를 하나의 브랜드로 굳힌 황석희에게 그의 새 책과 번역에 관한 대화를 청했다.

- 첫 책 <번역: 황석희>에 이어 1년 반 만에 두 번째 책이 나왔다.

= 분에 넘치게 종종 출간 제안을 받았다. 매번 거절하기도 송구해서 일일이 미팅도 못했다. 그런데 북다의 출판 기획안에는 처음부터 <오역 하는 말들>이라는 가제가 붙어 흥미가 갔다. 이제목이면 할 이야기가 꽤 쌓였다고 보았다. 내가 아니어도 오역에 대해선 어떤 번역가든 할말이 많지 않을까.

- 명확한 기획으로부터 출발한 책이다. 기존에 쓴글과 새로 쓴 글 모두를 오역이라는 키워드로 재편했는데.

= 번역을 20년째 하니 아무래도 만사를 번역가의 눈으로 인식하고, 번역가의 언어로 정의하곤 한다. 그럴 리 없겠지만 셰프가 “기억은 후숙된다”와 같은 표현을 쓰는 식일 터다. 제목에 부합하는 책을 내야겠다는 확신이 든 이후로 원고도 어렵지 않게 모았다. 평소 습관처럼 글을 쓰고 SNS에 업로드하는데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는 잡문은 퇴고도 거의 하지 않는다. 1천 자에서 1500자 정도 되는 글을 2500자에서 3천자 정도의 글량으로 늘린 후 논조를 다듬어 그나마 글처럼 바꿔놓았다.

- ‘오역의 정의는 다양하다’가 결국 이 책의 주제 아닐까.

= 오역과 정역은 영어 시험 문항처럼 정답과 오답을 채점할 수 없다. 번역가의 입장으론 오역과 정역을 가르는 기준은 ‘Correctness’가 아닌 ‘Rightness’, 즉 적합성 혹은 정합성이다. 이조차도 번역가마다 입장이 다를 텐데 이 책은 그 다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든 요소를 흑백으로만 나눌 수 없는 세상에서 양분된 세상 사이의 회색 지대를 인정하고 더 너그러운 시선에서 오역을 바라보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 에세이집 한권을 내본 경험이 있으니 이번 책은 재밌게 집필해볼 수 있겠더라. 첫 책을 쓸 때만 해도 전문서가 아닌 에세이를 내가 감히 쓸 수 있을까 우려했다. 나는 타인의 일상에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인데(웃음) 사람들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크게 궁금해할 것 같지 않았다. 이번 책은 오역이라는 주제가 확실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쓸 말이 생겼다.

콘텐츠에서 번역가의 역할

- 오역을 포함한 번역 전반의 여러 단상 중 번역체에 관한 글이 인상적이다. 번역체는 출발어의 원의를 고려하며 한국어로 옮기다 보니 발생하는 문체이지 않나.

= 만약 기자처럼 출발어로 취재한 내용을 한국어로 옮긴다면 정보의 전달이 중요하므로 출발어의 여러 요소를 고려해야 맞다. 하지만 대사 번역은 감정이나 내용의 전달이 더 우선된다. 다시 한번 정합한 말이 더 중요해진다. 서브웨이 본사의 부사장 이름을 갖고 노는 <데드풀>의 대사처럼 한국 관객과 먼 유머가 아니고서야 애써 출발어의 재미를 살릴 수 있는 우회로를 찾는다. 번역체의 자연스러움에 관해서는 영화 번역과 무대 번역에도 차이가 있다. 뮤지컬 <틱틱붐>을 예로 들면 원작자 조너선 라슨만의 위트를 전달해야 한다. 예컨대 첫 넘버 에선 주인공 존이 갓 닥쳐올 서른살을 온갖 위기에 빗댄다. 한곡 안에 수많은 비유가 등장하는데 그 내용이 한국 관객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내용이라 최대한 살렸다. 사람들은 번역가의 위트가 아닌 원작자의 위트를 즐기러 극장을 찾고, 번역가의 자아가 그 위트를 덮으면 월권이다. 언젠가 모 뮤지컬 넘버의 번역을 두고 팬들 사이에서 벌어진 설전을 본 적 있다. 한뮤지컬 팬이 “나는 자연스러운 번역이 좋다”고 강경하게 말하자 이어 다른 팬이 “그러면 오역인데?”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바로 “오역 내가 알 바야?”라고 재반박이 달렸다. 영화 번역을 할 땐 본 적 없는 반응이라 재밌었다.

- 영어 어순대로 한국어를 해석하도록 가르치는 한국식 영어 교육이나 영어로 쓰인 글을 쉽게 구해 찾아볼 수 있는 현실이 번역체를 익숙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 그래서 번역체가 마냥 나쁘다고도 볼 순 없다. 무작정 막을 수도 없다. 이런 논의가 늘 있지 않았나. ‘일제강점기의 잔재다’, ‘한국어에 없는 수동태다’ 등등. 한국어 어법에 맞지 않는 언어 사용을 지양하자는 움직임이 일었지만 언어는 생물과 같아 그 경향을 막을 수는 없다. 한국어는 포용성이 넓은 언어라 번역체가 한국어의 표현 범위를 확장하는 방편일 수도 있다. 얼마전 뮤지션 스텔라장씨와 콘텐츠를 촬영했다. 언어 천재인 분이 왜 나랑 콘텐츠를 찍나 의문이었는데 고민 지점이 딱 번역체에 관한 것이었다. 영어에 워낙 능통하다 보니 영어의 체계로 쓰인 한국어 문장에서 어색함을 못 느낀다고 하더라. ‘~하는 나를 발견했다’라는 문장만 봐도 전형적인 영어 번역투지만 입말과 글 모두에 두루 쓰인다. 번역체가 한국어 어법과 다르다는 걸 인지하는 사람은 두 표현을 모두 사용할 수 있고, 자신이 지닌 언어의 저변을 확대할 수 있다.

- 오역할 수 없는 사례로 시리즈 <파친코> <리틀 드러머 걸>, 영화 <PMC: 더 벙커> <비공식작전> 등 원작자와 함께한 작품을 들었다. 두 한국영화는 한국어 대사를 영어로 번역한 경우인가.

= 작중 영어 대사의 한국어 번역을 담당했다. 두작품을 통해 번역가가 좋게 쓰일 수 있는 방식을 새로 알 수 있었다. 김성훈 감독님이 <비공식작전> 속 영어 대사를 한국어 자막으로 옮길 때 톤이 살지 않는다며 전문 번역가를 찾았다. 와중에 영어 대사가 의도대로 나오지 않아 고민하고 계셨는데, 한국어 자막을 보니 이미 촬영이 완료돼 바꿀 수 없는 영어 대사의 문체가 작가의 의도대로 살아났다며 좋아하셨다. <PMC: 더 벙커>의 김병우 감독님은 후반작업 중에 특정 액션 시퀀스에서 외국인 용병의 긴 영어 대사로 인해 긴박한 상황을 컷을 쪼갠 편집으로 살리지 못했다며 아쉬워하셨다. 번역가는 세상 모든 언어를 응축해내는 직업 아닌가. 마침 대사의 양에 비해 장면은 짧길래 대사보다 압축된 한국어 자막을 드렸다. 감독님들이 번역가가 외국어를 응축하는 기술을 신기해한 다. 번역가들이 이런 일 하는 사람인지 몰랐다는 칭찬도 많이 받고. (웃음)

- 번역한 대사가 텍스트를 넘어 배우의 육성을 통해 직접 발화되는 경험은 <파친코>가 처음이었나.

= <파친코>를 통해 생전 처음 프리프로덕션에 동원됐다. 번역을 받아쓰기에 비유하곤 한다. 배우들의 발화를 자막으로 받아 적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이니 말이다. 전과 달리 <파친코>에선 내가 손본 글을 배우가 발화했다. 요즘은 무대 작업처럼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번역가의 개입 여지가 있는 작업이 점점 흥미롭게 다가온다.

- 전문 번역가가 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참여하면 작품의 퀄리티나 번역가의 활동 영역 모두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보나.

= 과거 미국 드라마에서 어색한 한국어가 재현되던 현상도 전문 번역가의 사전 검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엔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전문 번역가가 작품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생긴다. 나도 넷플릭스의 <더 리크루트> 시즌2나 <엑스오, 키티>의 모든 시즌,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의 <버터플라이>의 한국어 대사를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제작진과 함께 논의했다. 공개를 앞둔 <성난 사람들> 시즌2의 한국어 대사 또한 제작진은 물론 윤여정, 송강호 두 배우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들었다. 귀띔하자면 한국어의 존비가 두 캐릭터 사이에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지켜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언어 사이에 사다리 놓기

- <데드풀> 번역으로 유명해진 이후 유머러스한 번역가, 작품에 유머 코드를 적극적으로 넣는 번역 가로 규정되는 일이 늘었다고 책에 적었다. 정해진 규격의 텍스트가 나와야 하는 자막 번역이 코미디의 타이밍을 주파할 수 없어 아쉬울 때는 없나.

= <아메리칸 허슬>을 번역했을 당시 한 관객의 리뷰를 접했다. 영어권 관객과 같은 상영관에서 영화를 봤는데 서로 웃는 타이밍이 달라 작품의 재미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것 같다며 박탈감을 느꼈다고 하더라. 한국어와 영어는 어순이 달라 이를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데에 애를 먹곤 한다. 영어는 펀치라인이 맨 끝에 붙는 탓에 대사의 마지막에 가서야 웃음이 터진 다. 반대로 한국어는 펀치라인이 제일 앞에 붙는다. 펀치라인을 최대한 밀고 밀어서 원문의 타이밍 그대로 자막 끝에서 자연스럽게 웃음을 터뜨릴 방법을 늘 고심한다.

- 비영어권 관객들은 영어의 악센트 차이를 감지하기 어렵다. 지역별 악센트 차이를 자막으로 구현할 수는 없을까. <아메리칸 허슬> 속 시드니가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를 오갈 때 말투를 손본다거나, <쓰리 빌보드> 속 미주리주 주민들이 한국의 남부지역 사투리로 대화한다든가.

= 가능한 때도 있다. <왕좌의 게임>의 시리오 포렐(밀토스 예롤에모)의 대사를 충청도 사투리로 번역한 적 있다. 능글 맞고 여유로운 농담을 던지는 이탈리아 악센트와 충청도 사투리의 정서가 통하는 점이 있었다. 몇년 전 <폭싹 속았수다> 초반 회차의 스크립트 번역을 했다. 해외 제작사의 임원들이 열람하는 용도의 영어 대본이었는데, 제주 해녀들의 방언을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됐다. 그때 떠올린 게 루이지애나 영어였다. 루이지애나도 바다에 면한 미국 남부라 제주도와 통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마 스크립트를 읽는 미국인들은 작품을 상상할 때 해녀의 얼굴로 남부 흑인 중년 여성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이질감이다. 배경이 한국이고 배우가 한국인인데 발화하는 언어가 루이지애나 악센트의 영어일 때의 당혹스러움은 무엇으로 갈음해야 하나. 답이 안 나오는 문제다.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대사를 번역하다 중국 한시를 알게 된 에피소드가 실렸다.

= 한 작품의 번역을 마치면 새로 배우고 싶은 종목이 생기는 편인지. 요새 뮤지컬, 연극 번역을 하며 공연 자체에 관심이 커졌다. 해외의 경우 공연을 올리기까지 필요한 모든 직업의 분과가 명확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한국 공연계는 컴퍼니측의 요구로 연출가가 드라마투르기를 포함해 여러 일을 겸업한다. 드라마투르기의 경우 번역가보다 원문에 대한 이해가 높아야 작품의 뉘앙스나 진의를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전할 수 있다. 한데 드라마투르기도 원문이 아닌 역본을 통해 작품을 이해하기 때문에 번역가와 원문을 보는 눈이 다를 수밖에 없다. 또 번역가는 연습실에서 왜 이 단어가 영어 가사에 쓰였는지와 같은 원문의 의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현장에선 번역가에게 드라마투르기의 역할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 점이 재미있지만 한편으로는 공연 경력이 아직 부족한데 작품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는 게 맞나 싶다. 무대와 관련한 학문을 전문적으로 배우려는 생각을 근래 자주 하는 중이다.

- 한국어는 관사가 없는 언어인 반면 영어는 관사가 명사 앞에서 분명한 맥락을 부여하는 언어다. 의미로든 음성으로든 관사가 차지하는 한 음절을 처리할 때 어떤 난점을 마주하나.

= 특히 가사 번역을 할 때마다 미칠 노릇이다. 마디가 부정관사 ‘A’ 또는 정관사 ‘The’로 시작하는 뮤지컬 넘버가 많고 관사 뒤에 붙는 명사는 대개 앞의 음정과 도약이 큰 멜로디가 이어진 다. 대응하는 한국어를 마디에 배치해도 한 단어 안에서 큰 음정 차이가 생겨 의미 전달이 불가능하다. 또 영어는 정보 값이 큰 1음절 단어가 마디 앞에 오는 경우도 많아서 옮길 때 어려 움이 크다. 이를테면 “오늘은” 대신 “참, 오늘 은”을 만들어야 음의 진행 과정에 맞는 가사를 붙일 수 있다. 그래서 음악감독님이나 배우들과 우스갯소리로 만만한 게 ‘오’라는 이야기를 한다. 일단 ‘사랑’이 아닌 ‘오! 사랑’으로 만드는 거다.

-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여러 정보를 수합할 때 각종 AI를 사용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인공지능을 사용하다 보면 이들의 한계가 짚이기도 하나.

= 인공지능엔 비합리성이 없다. 인간이 인공지능과 능력을 겨루었을 때 승리할 수 있는 차별화된 무기가 비합리성이다. 근래 개봉한 어느 작품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죽은 아이를 묘지에 묻고 돌아오는 어머니가 과거를 회상하며 그 묘지를 떠나기 싫었다고, 아이를 이곳에 묻고 내가 어떻게 침대에서 편히 잠을 자냐는 식의 말을 이어간다. 나 역시 한 아이의 부모로서 그 마음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아이를 묻고 묘지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어”라고 번역했다. 인공지능은 누군가의 부모일 수 없다. 부모가 된다는 건 합리적 판단에 따른 결과가 아닌 감정의 결과 아닌가. 인간만이 감정에 따라 울고 웃고 사랑을 한다. 감정만이 가져오는 인생의 예외적 변수야말로 인간만 써낼 수 있는 비합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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