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 영문판을 구해줄 수 있을까요?’
수인의 메시지였다. 난감했다. 노벨문학상이 발표된 지 일주일 남짓한 때였으니, 세상은 온통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과 함께 그녀의 책이 얼마나 불티나게 팔리는지 타전하기 바빴다. 한국 문학계의 오랜 숙원인 노벨문학상이었으니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인 것은 당연했다. 나라 안에서만이 아니라 노벨문학상이라면, 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읽고 싶겠지. 그것은 아주 평범한 바람이겠지. 멀리서 전해진 누군가의 평범한 바람이 이토록 슬프다는 것이 아연해서 메시지창을 붙들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책을 꼭 구해야겠다는 다짐이 일었다. 비로소 실감되었다. 나는 곧 ‘로힝야’ 난민캠프에 간다.
수인은 국제평화단체 ‘개척자들’의 활동가다. 로힝야 난민캠프가 있는 방글라데시를 들락날락하는 것이 그녀의 일인데, 나도 늘 따라붙고 싶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어렵사리 서로의 일정을 맞출 수 있었다. 이미 여러 번 필요한 거 없느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챙겨가겠다고 물었지만 따로 회신이 없었다. 검소하고 불편한 생활에 인이 박인 활동가들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처음으로 무언가를 요청하는 메시지였다. 개척자들이 지원하는 난민 학교의 선생님 누군가가 한강의 소설을 읽고 싶다는 것이었다. 급한 마음에 인터넷 서점을 뒤적였는데 죄다 매진이었고, 언제 다시 입고될지 알 수 없다는 안내만 나와 있었다.
한국말보다 영어가 익숙한 친구에게 난감한 사정을 알렸다. 혹시나 이미 가지고 있으려나 했지만 그렇지는 않았고, 대신 전국의 중고 서점을 살피더니 대전에 딱 한권 남은 <채식주의자> 영어판을 친히 차를 몰아 구해주었다. 내가 받아든 그 책은, 한권의 헌책에 지나지 않지만 여러 사람의 소중한 마음이 덧대어져 스스로 고고한 빛을 발하는 것만 같았다.
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 전체 일정이라 해봐야 10일 남짓이었다. 캠프에 들어서니 대나무로 얼기설기 적당히 꼴을 잡고 비닐과 천막으로 벽을 만든 난민의 집들이 빼곡했다. 무슬림은 대체로 위생 관념이 철저한 편인데 좁은 면적에 너무 많은 집들이 들어차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생활의 악취가 가득했다. 가난과 상관없이 늘 매무새가 단정한 로힝야이기에 악취는 더욱 슬프게 폐부를 할퀴었다. 상수도시설은 언감생심이고 지하수를 뚫어 생활용수를 해결하는데 땅은 하수와 쓰레기로 오염되었으니, 오염된 땅은 다시 지하수로 스며들어 악순환을 하고 있었다.
캠프 안을 걷다보면 견디기 힘든 무력감이 몰려와 종종 눈을 감아야 했다. 대대손손 잘 살던 곳에서 갑자기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자유를 제한당한 것도 모자라 총부리를 겨누며 나가라고 하니,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아무 잘못도 없고 갈 곳도 없는데, 여기가 내 집이고 고향인데. 로힝야는 저항했고, 저항은 학살로 돌아왔다. 희생된 이웃과 친지의 트라우마를 안고 쫓겨나듯 국경을 넘은 그들의 수는 너무 많았다. 100만명에 이를 정도라고 하니 국제사회와 구호단체에서도 쉬이 손을 쓸 수 없었다. 이런 걸 두고 속수무책이라고 하는 거겠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정말 눈감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아 눈을 부릅뜨고 다시 사진을 찍었다. 미약하고 막연하지만 보탬이 되고 싶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로힝야 난민을 위로해줄 수 있도록. 직접 위로해주지 못하더라도 멀리서나마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도록. 작은 관심이라 할지라도 모이고 모이면 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될 테니까.
한강의 책을 요청한 선생님은 ‘누르 까말’이었다. 6년 전 여기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의 포트레이트를 찍었던 기억이 선연했다. 굳은 다짐에도 불구하고 다시 오기까지 6년이나 걸렸구나. 그동안 한국은 대통령이 한번 바뀌었고, 바뀐 대통령은 국민을 유린하듯 세상에서 가장 짧은 계엄령 기록을 갈아치웠다. 공교롭게도 증언문학으로 한국 현대사의 학살 트라우마를 보듬어온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기 위해 스웨덴에 머물 때 일어난 일이었다. 한강 작가에게도, 국민에게도 비현실감을 가득 먹인 대통령의 계엄은 결국 탄핵에 이르렀고, 한국은 새로운 대통령이 막 선출되기에 이르렀다. 한강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이 주어진 연유는 ‘시대의 고통에 대한 증언’ 때문이라지. 그래서 ‘세계의 실체적 진실’을 문학으로 성취하여서라고. 증언의 책무를 깊이 새기며 누르 까말에게 책을 전하고, 그의 포트레이트를 다시 한번 찍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스스로 허물어진 건지 누군가 허물어뜨린 건지 모르게 철조망 사이에 난 개구멍을 통해 난민캠프에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며칠 전 차를 타고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한 구멍이었는데, 꼬마들 몇이 거기서 뛰쳐나와 세상 밖을 질주하듯 힘차게 뛰어놀고 있었다. 아무리 가두려 해도 인간의 자유의지는 살아갈 구멍을 찾아낸다. 로힝야의 강렬한 생의 의지를 되짚으며 부러 찾아간 구멍이었다. 난민캠프에서는 크리켓이 유행인 모양이었다. 크리켓을 하는 아이들이 종종 보였는데 던지는 아이는 살살 던지고, 치는 아이는 살살 쳤다. 마음껏 던지고 치기에는 골목이 너무 좁았으니까. 귀한 공을 잃어버려서도 안되었고 다른 집에 피해를 줘서도 안되었다. 지나칠 뻔한 풍경이었는데 거기에는 로힝야 난민의 처지가 중첩되어 있었다.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었다. 놀이가 지겨워진 아이들이 제각각 어딘가로 흩어질 때까지. 사라진 아이들의 풍경과 함께 나도 발길을 돌리는 참이었다. 우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손톱을 깎는 남자가 보였다. 나도 손톱을 깎아야 하는데. 출국할 때까지 몰랐었다. 손톱이 이렇게 길었는지. 지나치게 바빴으니까. 경유지에서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는 하릴없는 시간에 문득 발견한 것이었다.
오래전 읽은 최영미 시인의 글귀가 떠올랐다.
‘여행지에서 발톱을 자르는 여유를 누렸으니, 나는 이곳에서 이방인이 아니다.’
나는 남자의 것을 잠시 빌려 선 채로 손톱을 깎았다. 이제 이방인이 아닌 나는, 어느 날 문득 이곳을 다시 걷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