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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연의 해상도를 높이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이자연 2025-06-19

샛노란 염색 머리에 표정 없는 얼굴. 시골에서 나고 자라 서울로 떠나지 않는 젊은이. 그의 이름은 미지(박보영)다. 성인이 된 후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향하거나 반대로 고향에 귀농하여 새로운 모험을 시작한 목표지향적인 주변인들과 달리 미지는 단기계약직을 전전한다. 학문, 취업, 연애 등 사회가 지정해둔 생애주기 앞에서 미지는 제 이름처럼 불확실한 낙오, 불량, 하자에 가깝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뇌경색으로 쓰러진 할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유동적인 생활 방식을 ‘선택’한 것이지만 “그게 대수냐”는 엄마의 말마따나 그 노고를 쉽게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고 미지의 반쪽이자 일란성쌍둥이 언니 미래(박보영)는 미지와 완전히 다른 현재를 산다. 태어나자마자 선천심장병을 앓으면서 의도치 않게 고강도 인내심을 체득한 그는 어디서든 전교 1등을 도맡는 인텔리, 완벽주의자, 두손리의 자랑이다. 다만 미래는 남들에게(특히 가족에게) 쉽게 말 못하는 어둠을 쥐고 있다. 한국금융관리공사에 입사한 이후, 내부고발을 한 동료를 지지했다가 집단적으로 교묘한 사내 괴롭힘을 당하게 된 것이다. 투명인간마냥 복사기 옆에 가만히 앉아서 하루를 버티는 게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업무다. 미지와 미래. 한쪽은 툭 튀어나오고 한쪽은 쑥 들어간 퍼즐처럼 둘은 완전히 다르지만 조각을 맞춰보면 결국 똑같다. 이들에게 삶은 그저 소란스럽고 고달프기만 하다.

두 가지 트랙으로 나열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지의 서울>은 일란성쌍둥이 자매의 인생을 교환시킨다. 엄마마저 구별하지 못할 만큼 똑같은 생김새를 활용해 미지는 미래의 삶으로, 미래는 미지의 삶으로 스며든다. 드라마는 초반부터 작품이 구현할 카타르시스의 방향을 명확히 제시한다. 아마도 쾌활하고 거침없는 미지가 미래의 직장 내 괴롭힘을 타개할 것으로 예상되고, 반대로 방구석에 뒤엉킨 먼지처럼 은둔했던 미지의 그림자를 미래가 이해할 차례로 보인다. 본래 당사자와 다른 성격의 인물이 그로 위장하여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이야기는 주인공과 시청자 사이에 긴밀한 비밀을 진전시키는 아슬아슬한 즐거움을 준다. 동시에 현실에서 이루기 어려운 복수 또는 반전을 극대화하면서 억압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해방감까지 안겨준다. 그런데 <미지의 서울>은 그 대리인이 그러니까, 일란성쌍둥이다. 작품 속에서 사정을 호소하거나 벼랑 끝에 내몰린 피해자와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를 지닌 상호적 구원자. 그 안에는 아주 익숙한 동시대적 자극제가 있다.

<미지의 서울>이 채택한 1인2역 방식의 해결 과정을 보다 보면, 아닌 줄 알면서도 언뜻 둘이 한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미지 말대로 구두에 길들여질 발조차 똑같은 자매는 취향도, 사회적 입지도, 직면한 문제도 모두 다르지만 유독 밤이 길게 느껴진 어느 날의 미래가 고통을 참지 못해 기도로 분신을 불러낸 것만 같은 착각마저 일으킨다. 그리고 이 착각은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책임져주길 바라는, 다음달의 내가 이번달의 나를 받아주길 바라는 현실 속 쓴 농담과 느슨하게 겹친다. 다시 말해 <미지의 서울>은 언젠가 또 다른 내가 나타나서 지금의 슬픔과 고난을 대행해주길 바랐던, 상상 속에서나 실현할 수 있었던 오랜 안전욕구를 자극한다. 문지방을 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바깥세 상이 버겁게 느껴질 때 나를 대신해 현관문을 나서주는 또 다른 나. 일터에서 이유 없는 눈총이 나를 찌를 때 그들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무심히 지내는 또 다른 나. 일상 속 흔히 던지는 장난 섞인 투정에는 대외적 자리에 나의 분신을 보내고, 진짜 나는 딱 한번만 도망쳐보고 싶은 외로운 서글픔이 깃들어 있다. 분 단위로 돌아가는 바쁜 현실에서 주변 사람에게 나의 힘듦을 고백하는 게 일종의 민폐처럼 여겨지는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적 분투를 털어놓기 위해 감정 쓰레기통이란 이름으로 챗GPT를 찾는다. 인간의 감수성보다 알고리즘의 인공지능이 오히려 한 울타리 안에 있는 안전한 감각을 준단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기는커녕 1+1 피로가 되는 세상에서 내 문제를 척척 해결해낼 누군가가 상상에서마저 완벽한 타인이 아닌, 가짜일지언정 나여야만 하는 이유 또한 여기서 비롯한다.

하지만 대중의 절대다수는 일란성쌍둥이가 아니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드물고, 내 고난을 대신 맞닥뜨려줄 이는 더더욱 없다. 미래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출근도, 미지가 울부짖으며 거부했던 외출도 우리는 그냥 해야만 한다. 다만 극 중 상반되는 두 ‘나’가 서로를 어떻게 끌어안는지를 보면 된다. 한국금융관리공사에서 내부고발을 한 선배에게 심각한 따돌림이 이어졌을 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미래를 두고 미지는 “차마 용기가 없던 미래는 끝내 손을 내밀지 못했다”고 표현한다. 사실상 그는 방관자지만 그의 가족이자 반쪽이고, 분신인 미지는 그를 두고 ‘차마 용기가 없었다’고 너그럽게 희석해준다. 또 미래가 오피스텔 3층에서 스스로 몸을 내던졌을 때 미지는 끝까지 미래의 손을 놓지 않았고, 엄마 옥희(장영남)가 미지의 노동을 후려칠 때마다 미래는 자신의 논리로 그를 완전히 방어한다. 두 쌍둥이는 자신의 일에선 날카로운 비난을 쏟아내지만 서로의 일이면 경계심 높은 방어 태세로 서로를 보호한다. 자신에게만 혹독했던 두명의 ‘나’는 두 사람이 바뀐 줄 모르고 당사자가 없는 자리라 편히 이야기한 주변인의 말을 통해 뒤늦게 온기 있는 진심을 전해받을 뿐이다. 그러니 이런 태도가 중요한 거다. 파도 앞에 선 모래성처럼 나를 쉽게 무너뜨리려는 사람들 틈에 섞여 나를 재판대에 올리기보다, 나라도 내 편을 들어주고 내 말이 맞다고 우겨주고 안아주고 추켜세워주는 것. 미지가 그랬던가. 타인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으니 오히려 숨이 좀 쉬어진다고. 두 자매는 그간 자신의 삶을 본게임이 아닌 것처럼 여겼다. 지금까지는 임시적인 삶이고 진짜 스테이지는 다음 단계에 있는 것처럼 모든 기쁨을 유예했다. 이 사소한 태도조차 우리의 삶과 크게 멀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조금 더 뻔뻔해져볼까. 다음 일이야 내 안의 또 다른 미지, 또 다른 미래가 견뎌줄지도 모를 일이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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