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이 부러져 병원에 누워 있는 조카에게 <도망치고, 찾고>라는 그림책을 선물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 사회를 보러 전주에 갔다가 ‘잘익은언어들’이라는 동네 책방에 잠깐 들렀을 때 그곳 주인장이 권한 그림책이다. 자존감에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서는 멀리 도망치고 나를 이해해줄 사람을 찾아 나서라는, 사람에게 다리가 있는 이유가 그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책이랬다. 다리 다친 조카에게 어쨌든 다리와 관련된(?) 책을 선물한다는 게 재밌어서 샀는데, 무심코 뒤적이다 보니 나야말로 지금이 ‘도망치고 찾아야 하는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사람과 사연과 목적과 욕망과 돈이 뒤엉킨 ‘산업’의 한복판에 있다 보니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사사롭고 오염된 마음의 덫에 걸려들기 십상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은 조바심, 인정욕구, 이해를 따지는 마음, 경쟁심, 시기심, 때로는 받아들일 수 없고 용서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방어하다 모든 게 다 미워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어차피 다 거짓이다’ 같은 극단적 허무와 ‘나는 왜 이렇게 별로인가’ 같은 얄팍한 자기혐오에 빠지곤 했다.
모든 게 거짓이라는 허무로부터 도망치고, 모든 미움을 산산이 흩어버릴 깨끗하고 순수한 찰나를 찾아 나서고 싶다. 목적 없이 순수한, 사심 없이 깨끗한, 이기심 없이 담대한 찰나의 순간을 목격하고 싶다. 그리고 마침내 온 힘을 써서 그런 순간을 만들어내고 싶다.
다 망친 것 같은 비탄과 회복의 열망을 오가며 산만한 낮과 달뜬 밤을 보내던 중 우연히 이 지면을 얻었다. 무엇을 써내려볼까. <씨네21> 30주년 축하 글을 먼저 적어 보내야 할까. 한쪽 다리에 통깁스를 하고 누워 있던 조카는 성장판이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의사 말을 듣고 펑펑 울었다더니, 다행히 수술이 잘돼 성장판도 무사하고 키 크는 데도 문제가 없을 거라며 무심하게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행이다. 성장판이 무사하다니.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예술이 우리를 구원할 거라 믿었다. 너무 거창해서 순진하게 들릴까 봐 소리쳐 외치지 못하고 작게만 읊조려왔지만, 나는 정말 그렇게 믿어왔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마음이 위축되거나 영혼이 저조한 날이면 나는 억지로라도 공연장으로 영화관으로 전시장으로 서점으로 찾아들었다. 전력을 다한 누군가의 가장 깨끗하고 사심 없는 한순간을 목격하기 위해. 그런 순간은 지켜보는 사람 역시 깨끗하고 온전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고백하자면, <폭싹 속았수다>를 보고 염혜란 선배님에게 너무 잘 봤다고 문자를 보냈다.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벅찬 마음을 누르지 못해 ‘예술이 우리를 구원할 거예요’라고 보냈더니 ‘너무 멋진 말이다. 그럴 거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답을 받고, 가장 내밀한 비밀을 주고받은 것처럼 수줍고 기뻤다. 선배님이 연기한 광례의 형형한 눈빛에서 발견한 정결한 힘이 나에게는 구원이었다. 마음속의 미움과 사사로움과 거짓을 깨부숴준 깨끗하고 순수한 찰나의 빛이었다. 그 눈빛 덕에 펑펑 울고 잠시나마 마음이 누그러지고 눈이 유순해졌었다.
나에게 구원이었던 예술의 순간들, 예술가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이양희 안무가의 <IN>을 보고 다시 무대에 설 힘을 얻었던 순간, 연극 <기존의 인형들: 인형의 텍스트> 중 <한쪽 발은 무덤을 딛고 나는 서 있네>에서 배선희 배우의 안내로 나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갔던 확장의 순간, 전시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에서 본 1956년생 최진욱 작가의 작가 노트에 담긴 고요하고 집요한 탐구에 감화되었던 순간, 고된 밤 소설가 최은영의 <밝은 밤>을 읽다 만난 한 문장- ‘새비 아주머니는 그날 바다에서 놀았다.’ - 를 읽고 밤새워 오열했던 고독과 공감의 경험, 드라마 <당신의 맛>의 신춘승을 연기한 유수빈 배우의 얼굴에서 한순간 목격했던 유약함이 선사한 아름다움 등등. 그 순간은 내게 각각의 방식으로 구원이었다. 그 순간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키보드를 치는 손가락이 빨라지고 모니터를 보는 눈에 생기가 돌고 저조했던 몸과 마음에 활력이 돋는 게 느껴진다.
그렇지. 내가 알고 있는 예술의 힘이 이런 것이었지. 하는 사람과 목격하는 사람 모두를 정화하고 활력 있게 만드는 힘이 있었지. 사실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정말 운이 좋으면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흔들리는 귀한 순간을 경험하게 됐었지. 미움으로부터 도망쳐서 좋은 예술 작품을, 좋은 예술가들을 찾아 나서자!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이불을 걷어차고, 쓰린 눈으로 붙잡고 있던 휴대전화를 집어던지고, 예술이 주는 정화의 순간을, 점화의 순간을 다시 찾아 나서자!
앞으로 몇회에 걸쳐 이 지면에 써내릴 글은 허무와 미움으로부터 도망쳐 애써 찾아가 만난 순수하고 깨끗한 순간의 기록이 될 것 같다. 예술, 예술가들, 혹은 삶의 순간을 예술로 바꿔내는 멋진 이웃들도 찾아가 만나야지. 미움이 영혼을 집어삼키는 속도를 이길 수 있는,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무기는 예술이 주는 정화의 순간뿐이기 때문이다. 부디 내 영혼의 성장판이 아직 무사하기를.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혹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사사로움으로 마음이 어지럽다면, 전력을 다한 누군가의 깨끗하고 사심 없는 한순간을 목격하러 함께 가보자. 그 빛나는 순간들이 몸과 마음에 쌓일 수 있도록, 그 순간들이 모여 미움과 거짓과 허무를 물리칠 수 있도록, 부러진 발목으로 절룩거릴지언정 힘을 내서 찾아 나서 보자. 일단, 지금이 낮 2시고 이따 4시에 치과 예약이 있으니까, 치과에서 돌아오는 길에 영화관에라도 들러볼까? 혹시 운 좋게 빛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면 이 지면을 빌려 당신에게 적어 보내고 싶다. 부디 당신도 나도 내 조카도 더듬더듬 회복이 잘돼서 키 크는 데 문제가 없기를!
마지막으로, <씨네21> 3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씨네21> 덕분에, 누군가는 영화예술의 빛나는 순간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하고 있다는 안정감을 느껴왔습니다. 이 귀한 곳에 글을 실을 수 있어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