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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나무가 쓰러질 때,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콘크리트 녹색섬> 이성민 감독
이유채 사진 최성열 2025-06-05

다큐멘터리 <콘크리트 녹색섬>을 만든 이성민 감독은 이른바 ‘주공 키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서울 개포주공1단지아파트에서 보낸 시간이 그의 정서적 기반이 됐다. 성인이 되어 다시 동네를 찾았을 때 예상외로 그대로인 풍경이 그의 무언가를 건드렸고 결국 카메라를 들게 했다. 언젠가 재건축으로 사라질지도 모를 공간을 사진으로 남기는 사적인 작업은 수많은 개포주공 사람들의 이야기와 만나는 과정 속에서 영화로 확장되었다. <콘크리트 녹색섬>은 과거의 기억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간들보다 훨씬 오래 그 자리를 지켜온 나무들의 흔적을 좇으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을 발견하고 보존과 공존의 가능성을 묻는다. 끈질긴 시선은 마침내 나무의 운명을 바꾸는 장면에 다다르고 관객은 그것이 가능한 일임을 목격한다. 결국 이 영화의 힘은 스크린 너머 우리의 일상에까지 가닿는다.

- 내레이션에 따르면 “나는 이곳에 다시 오고 싶지 않았다”고. 어떤 계기로 다시 개포주공을 찾았나.

살던 곳에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언젠가 한번은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숙제처럼 안고 살았다. 주공 키즈들은 공감할 텐데, 어릴 때부터 “이 동네는 곧 재건축될 거야”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2014년쯤 동네를 다시 찾았을 때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발길 닿는 곳마다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고 여전히 동네를 지키고 계신 어른들을 마주하는 것도 반가웠다.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들 수밖에 없었다. 영화 전공자였지만 당시에는 직장인이었기에 영화는 엄두도 못 냈고 일단 사진으로 시작했다. 찍다 보니 낡은 아파트 사이로 자라고 있는 울창한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이 나무들은 동네가 허물어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뒤로 카카오스토리에 나무 사진을 올리는 ‘개포동 그곳’ 프로젝트, 동네를 함께 걷는 ‘기억 산책’과 ‘나무 산책’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하나 해나갔다.

- 어느 지점에서 영화로 방향을 굳혔나. 완성까지 7년이 걸렸다고 들었다.

앞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영화쪽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모여서 처음에는 서로 추억을 공유하다가도 이야기가 현재와 미래로 뻗어나갔다. 이 공간을 앞으로 어떻게 기억할지, 나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관련된 전문가들도 참여하면서 공론의 장이 됐고, 이제부터는 다큐멘터리가 더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인 촬영은 2018년에 시작했다. 하지만 말이 본격적이지 처음엔 제대로 된 프로덕션도 없이 혼자 찍기 시작한 거였다. 편집 단계에서 제작 지원을 받아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 그 큰 나무들이 베어져 쓰러질 때의 충격이 컸다. 피비린내 나는 도축 현장에 있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는 더 했다. 너무 무서웠다. ‘에코사이드’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20~30m 높이에, 지하 2~3층까지 뿌리 내린 나무들을 톱으로 잘라낼 때마다 땅이 흔들리고 그 진동이 고스란히 내 몸에 전해졌다. 나무가 쓰러지며 진액을 토해내는 순간, 죽어가며 피를 흘리는 것과 다름없는 그때, 아이러니하게도 강력한 피톤치드 향이 퍼져 나왔다. 그 향이 너무나 황홀해서 견디기 힘들었다. 현장에서 내가 체감한 걸 온전히 담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다. 그래서 후반작업 때 나무가 ‘쿵’ 하고 쓰러지는 소리, 땅에 쓸리는 소리 등 사운드에 더 신경 썼다. 잘 들으면 동물 소리도 들리는데 이 소리를 넣을까 말까를 두고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을 반영한 소리라 살리기로 했다.

- 재건축이 진행되며 폐허가 된 아파트의 풍경도 카메라에 담았다. 감정 컨트롤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떤 마음으로 현장을 찾았나.

처음에는 건물 잔해를 밟고 다니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내가 자라온 세상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보다는 현장에서 갈 곳 잃은 고양이들을 구조하면서 이 아수라장에 수많이 생명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그래도 준비할 때부터 각오했던 부분이었고, 카메라를 들기로 했으니 물러설 수 없었다. 낙천적인 성격도 도움이 됐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자, 이 영화를 끝까지 완성해서 앞으로 자연을 위한 논거로 쓰자’라는 생각을 거듭했다.

- 과거의 기록을 넘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디자인정보연구실과 협력해 3D 스캐닝 카메라로 나무들을 기록하고, 조경학 전공자와 녹색섬 나무들의 축재 현황 조사 자료를 만들어 정책 홍보실에 전달하기도 했다.

앞서 진행한 프로그램들이 알려지면서 서울시립대에서 먼저 협업을 제안해주었고, 조경학 박사님도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참 신기한 게 기록하면 할수록 질문이 생기고, 질문을 풀다 보면 희망이 생긴다. 그 희망을 부여잡고 조금만 더 해보자, 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앞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세세한 기록들이 나무의 가치를 증명해줄 거라는 확신은 있다.

- 을 오랜 시간 작업하며 삶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다. 기록하는 삶이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

작업 전후로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필요하면 기존 것을 없애고 새로 짓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업을 하며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보게 됐고,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생각하게 됐다. 그 덕분에 삶에 조금 더 용기가 생겼다. 기록이 단지 과거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의미한 과정이라는 걸 깨달았고 기록하는 삶을 계속해나가고 싶어졌다.

- 지금 사는 동네의 나무들과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 기록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근처 호수공원에 자주 산책을 간다. 사진을 따로 찍지는 않고, 나무의 표피 냄새를 맡거나 열매가 언제쯤 맺히는지를 관찰한다. 요즘 애착 가는 나무가 하나 있다. 러닝 코스 중간에 있는 나무인데 한쪽 가지는 죽어 있고 다른 쪽은 잘 자라고 있더라. 그런데 어느 날 가보니 죽은 쪽이 베어져 있었다. 나무는 생명력이 강하니까 남은 가지로도 잘 자라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계속 마음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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