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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중립적 균형을 선택한 이유 , <수소-혁명인가 환상인가?> <곰과의 위험한 공존> 안드레아스 피흘러 감독
이자연 2025-06-05

올해 서울국제환경영화제에 초청된 안드레아스 피흘러의 작품은 총 두편이다. 먼저 <수소-혁명인가 환상인가?>를 통해 현재 대안에너지로 떠오르는 수소의 명과 암을 들여다보고, <곰과의 위험한 공존>에서는 곰과의 공포스러운 동거를 둘러싼 지역민의 골 깊은 갈등을 다룬다.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안드레아스 피흘러 감독의 중립적인 시선이 돋보인다. 특정 이슈에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영화가 마음대로 정해두지 않고, 양면을 균형 있게 다루면서 관객이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도록 돕는다. 큐레이션 또는 구독이라는 명목으로 듣고 싶은 이야기, 보고 싶은 정보만 선택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울어진 세상에서, 완전히 반대편의 관점을 끌어안은 포용은 안드레아스 피흘러가 세상에 제안하는 태도이자 지향점이다. 수소는 인류의 희망일까? 최대 포식자와의 공존은 앞으로도 이어질 수 있을까? 그의 질문이 촉발시킨 관찰이 여기에 있다.

- <수소-혁명인가 환상인가?>는 강력한 대안에너지로 떠오르는 수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실제로 유럽 국가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활발한가.

적어도 스칸디나비아반도와 독일에서는 수소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수소는 휘발유 기반 에너지에서 재생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로 전환되는 은총알을 상징한다. 게다가 수소는 가스이기 때문에 생산 문제만 잘 거치면 거의 모든 곳에서 이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미 인류는 가스 형태의 에너지를 활용하기 때문에 전반적인 시스템을 변경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수소에 대한 기대와 환상이 크다. 하지만 내 영화는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가 이 안에 있다.

-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미션으로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

취재 대상에 접근 권한을 갖는 것이다. 에너지 시설 대부분은 촬영팀의 연락을 반기지 않는다. 현존하는 에너지 시설 중 가장 큰 곳으로 알려진 사우디아라비아 사막의 그린수소 시설을 무척 가고 싶었는데 그들을 설득하는 데에만 9개월이 걸렸다. 최종적으로 오케이 사인을 받기 위해 두바이에서 무수히 많은 미팅을 갖기도 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거절을 받았다.

- 영화는 다양한 전문가로부터 수소에 관한 장단점에 관한 정보를 듣는다. 전문가 사이에서도 수소 활용에 대한 선호 차이가 있을 텐데. 정보와 개인적 의견이 뒤섞이지 않도록 어떻게 균형을 유지하려 했나.

중요한 질문이다.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변증법적인 ‘아니오’를 쌓아갔다. 영화는 초반에 승용차용 수소나 가정 난방용 수소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유럽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때 프랑스 전문가가 나와서 수소가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긍정적 의견을 설명하는 반면 영국 전문가는 수소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반대 의견을 전한다. 이들은 완전히 다른 의견이지만 결국 한 주제로 엮여 있다. 변증법적 접근은 <수소-혁명인가 환상인가?>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 요소이자 재미 요소이기도 하다. 서로 대립되는 의견이 결국 서로를 보완해주는 셈이다. 범주가 넓은 하나의 의견이 완성되는 과정과 같다. 혼자서 판단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우리 영화의 진화점이기도 하다.

- 두 번째 작품 <곰과의 위험한 공존>까지 보고 나니 다큐멘터리에 대한 감독의 특징적인 태도가 돋보였다. 서로 다른 의견을 동등하게 보여주면서 특정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렇게 중립적인 태도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혹자는 중립적인 태도가 소극주의를 만든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관객의 이성을 믿는다. 관객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 자체도 영화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영화감독으로서 관객이 생각하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정갈하게 준비할 뿐이다. <곰과의 위험한 공존>은 이탈리아 외에 유럽 다른 지역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영화에 드러나는 갈등이 너무 극렬해서 사실상 해결책이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윤리적 모호성이 무척 강하다. 인간이 산에 야생곰을 데려왔고 그들은 자연의 생리에 따라 왕성하게 번식했다. 그런데 곰들이 인간을 위협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곰들을 사살하자는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영화를 중립적으로 접근했던 건 논쟁뿐만 아니라 거기서 파생되는 인간의 감정까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총 맞은 곰을 보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강조하는 동시에 곰과 가까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심도 동시에 드러낸다. 전체 갈등이 얼마나 밀집돼 있는지 보여주는 게 내 임무다.

-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 곰을 숲으로 데려온 것도 인간이고, 그들의 개체수가 증가하자 무서워서 사살하려는 것도 인간이다. 영화가 문제라고 인식한 부분 자체가 인간 중심적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는데.

맞다. 곰을 산으로 데려온 것도, 곰의 위협을 인간의 방식으로 처리하려는 것도 모두 인간 중심적이다. 심지어 이 곰은 인간에 의해 멸종위기에 처한 상태다. 모든 굴레에 인간의 잘못이 있다. 그렇다면 오직 두세 마리가 전부인 멸종위기의 곰을 그대로 내버려둘 것인가, 여기서 선택의 기로가 생긴다. 생명다양성을 위해 실패하더라도 개입을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앉아서 기다리기만 해야 할까. 엄밀히 말하면 숲으로 곰을 이주시킨 건 생물학적으로 실패라 할 수 없다. 곰들이 건강하게 잘 번성했으니까. 다만 사회적 측면에서 따지면 인간과 곰이 섞이기 어려운 재난이 생겨났다. 영화는 인류가 직면한 복잡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생태계 문제에 인간이 얼마만큼 개입할 것인지의 복잡한 딜레마를. 나는 인간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 영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알게 모르게 인간에 의해 설계된 자연의 모습도 많다. 예를 들어 알프스의 나무 대부분은 수천년 동안 인간이 관리해온 일종의 계절 표지판이다. 특히 산림은 인간 중심적 문제로만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더 많은 논의와 토론이 필요하다. 어디까지 인간이 개입할 것인지, 그 개입의 정도를 어느 정도로 허용할 것인지. 결정의 책임만이 남아 있다.

사진제공 서울국제환경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