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때때로 예언이 된다. 개막작 <캔 아이 겟 위트니스?>는 전 지구적 기후변화와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류가 수명을 50살로 제한하는 국제협약에 동의한 세계다. 과거라면 터무니없는 은유였을지 모르나 세계적으로 체감되는 기후 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이 불러온 숱한 죽음, 안락사 제도가 실제화된 지금, 꽤 현실적인 상상처럼 다가온다. 극 중 인간들은 과거의 과도한 소비와 기술 의존을 멈추고 검소하고 평등한 삶을 선택한다. 느린 도시에서 어머니 엘리(샌드라 오)와 함께 사는 키아(키라 장)는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사회 초년생이다. 기록관으로서 죽음을 앞둔 이의 마지막을 그림으로 남기는 과정에서 두려움과 연민,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을 감지한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인생을 정리할 시기가 찾아오자 모녀의 삶은 변곡점을 맞이한다. 애니메이션을 접목한 서정적인 연출 감각을 살려 인간성과 윤리를 면밀히 성찰해왔던 캐나다 감독 앤 마리 플레밍 감독이 이번 작품에서도 자신의 장기와 사유를 이어간다. 그와 화상으로 만나 소중한 지금을 살아가는 법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 개막작 선정 소감을 나눠준다면.
매우 영광이고 기쁘다. 기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만든 영화가 환경영화제의 문을 여는 작품으로 소개된다니, 이보다 더 어울리는 만남은 없을 것이다. <캔 아이 겟 위트니스?>를 볼 관객들에게 한 가지 당부를 드리자면 내용이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희망을 말하는 작품이라는 걸 기억해주시면 좋겠다. 우리는 행동할 수 있는 존재이자 지구에 영향력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주체라는 점도 함께 말이다.
- 극 중 세계는 인간 수명을 50살로 제한함으로써 지속가능성을 선택한 사회다. 굉장히 대담한 설정인데, 이런 미래를 상상하게 한 영감은 어디서 비롯됐나.
아일랜드계 영국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의 풍자적 에세이 <겸손한 제안>에서 이야기의 씨앗을 찾았다. 이 책에서 작가는 인구 과잉과 기근에 시달리던 아일랜드 상황을 풍자하며 ‘아이를 먹자’라는 충격적인 제안을 한다. 그러면 단백질도 얻을 수 있고 인구문제도 해결된다는 식이었다. 아주 날카로운 풍자였지만 그의 얘길 심각하게 받아들인 많은 사람이 분노했다. 후에 <겸손한 제안>은 당시 영국과 아일랜드의 지주들이 벌이던 착취적인 토지 관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사회적 논의를 불러일으켰고 실제로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냈다. <캔 아이 겟 위트니스?>를 집필할 당시에 50살에 죽는다는 설정은 쓰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코로나19 팬데믹 전이었고, 현재 캐나다에서 시행 중인 ‘의료조력 사망’ 제도가 생기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극적 전략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으로 충분히 받아들여질 거라고 믿고 있다.
- 영화 속 모녀는 각기 다른 두 세대를 대표한다. 엘리가 이 시스템을 만든 세대라면 키아는 그것을 물려받은 세대인데, 이들의 관계를 깊숙이 다루며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지금 시대에는 그레타 툰베리처럼 10대 때부터 기후 위기에 대해 강력한 목소리를 내는 용감한 이들이 있다. 그들을 지지하며 1968년으로도 시선을 돌렸다. 그때는 학생들이 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선언문을 직접 쓴 시대였다. 세월이 흘러 이들은 목소리를 내는 것을 넘어 책임지고 행동해야 하는 세대가 되었다. 다시 말해 역사가 이어지도록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엘리는 키아가 옳은 선택을 하도록 그를 이끌고 싶어 한다. 동시에 자신이 내린 선택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소비는 줄고 자연은 아름다워진 지금 시점에서 떠나는 윤리적인 결단을 내린다. 돌고 돌아 <캔 아이 겟 위크니스?>는 현세대가 다음 세대에 전하는 대화라고 생각한다. 전쟁이든, 기후 재난이든, 이민과 같은 삶의 거대한 변화든 일찍이 그걸 감내한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믿는다.
- 샌드라 오와 여러 차례 작업하면서 그와 영화적 동지 관계를 맺어왔다고 알고 있다. 창작 파트너로서 샌드라 오가 이번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샌드라는 정말 뛰어난 협업자이자 창작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작품 전에 그와 가장 최근에 만든 작품은 장편애니메이션 <윈도 호스>(Window Horses)다. 여기서 샌드라는 막대기 소녀 로지의 목소리를 연기했는데 그가 실사만큼이나 깊이 몰입해 다양한 감정과 이해를 끌어내는 걸 보면서 놀랐다. 샌드라는 이 작품의 유능한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인디고고’라는 크라우드펀딩 캠페인 당시 그가 아주 적극적으로 움직여준 덕분에 이 작은 영화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캔 아이 겟 위트니스?> 때도 그는 ‘샌드라답게’ 전방위적으로 행동했다. 동료들을 세심히 신경 쓰며 전체 세계관의 구축에도 열심이었다. 당시 우리는 여러 가지 혼란 속에서 촬영을 진행하고 있었다. 배우 파업, 감독 파업, 작가 파업 등 여러 가지 노동 이슈가 수면 위로 올라왔고 AI에 대한 논의도 뜨거웠다. 샌드라는 맞닥뜨린 현실을 영화 속에 어떤 식으로든 반영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도 그의 말에 공감해 영화 곳곳에 지금 사회의 목소리를 심고자 했다.
- 키아의 그림 기록이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방식이 인상 깊었다. 슬픔과 기쁨, 회한과 감동 등 수많은 감정이 시각적인 형태로 고스란히 표현된다. 비디오 아티스트이자 애니메이터인 감독의 재능이 여실히 드러나는데, 이 작품에서 애니메이션이 어떠한 효과를 내길 바랐나.
짚어준 대로 애니메이션을 감정을 표현하는 주요한 도구로 사용했다. 그래서 키아의 움직이는 그림은 미처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의 감정을 보여준다. 구상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애니메이션 장면을 넣을 계획이었다. 지금 사회가 억누르도록 강요하는 개인의 내밀한 감정을 영화에서 제약 없이 펼쳐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촬영에 들어가보니 아주 조금씩 힌트를 흘리는 편이 더 적합할 듯했다. 감정은 이미 배우들의 연기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래서 탄생한 게 작은 ‘슈무들’ (schmoodle)들이다. 이 귀여운 이미지들은 감정 표현을 넘어 삶이 끝나간다는 걸 예고하는 상징으로도 기능한다.
- 영화 후반부에 모녀가 과거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시퀀스의 힘이 강력하다. 엘리는 키아에게 옛 사진들을 보여주며 인간이 야기한 재해로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던 그 시절을 고백한 뒤 지금 인류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단호히 말한다.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이 시퀀스에 다 담겨 있는 듯했다.
여기서 엘리는 사랑하는 딸과 지금 이 땅에 함께 사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힌다. 눈앞의 딸에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 우리가 이런 선택을 했는지, 왜 이 일이 그토록 중요한지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촬영 당시 주변에 산불이 번지고 있었다. 시사회를 열 시점에는 대피해야 할 정도였다. 이런 위기를 직접 겪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이 비상 상황이라는 걸 체감하지 못한다. 위험이 바로 여기 와 있는데도 말이다. 극 중에서 2025년을 우리가 모든 걸 ‘종료’하기로, 이를테면 플러그를 뽑은 해로 설정했다. 인간이 기후변화의 원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 변화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만큼 기후 위기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더는 미뤄서는 안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었다.
- 당신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인가. 이번 작품을 만들면서 죽음에 대한 관점에 변화가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작업하는 몇년간 나는 정말 많은 사람을 잃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에서부터 더 어린 친구들까지 다양했다. 한해 한해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픈 곳이 더 많아지는 부모님을 돌보고 있기도 하다. 삶 속에 이미 죽음이 정해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예견된 슬픔. 무언가가 서서히 쇠약해지는 걸 지켜보면서 그걸 바꿀 수 없다는 사실에 압도당하는 감정 말이다. 젊은 세대가 기후 위기에 느끼는 감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들이 내 영화를 보며 죽음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을 가졌으면 한다. 내가 그랬듯 말이다. 나는 극 중에서 죽음을 평화롭고 괜찮은 상태로 그리고자 노력했다. 그로 인해 관객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잠시 벗어나 자기 삶의 끝까지 스스로 생각해보길 바랐다. 완벽한 통제는 아닐지라도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다.
- 일상에서 하는 환경적 실천이 있다면.
개인이 환경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행동은 육식 줄이기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이 실천에 동참하고 있다. 그 밖의 것에 있어서는 늘 윤리적인 딜레마에 휩싸인다. 가스 난방을 사용하고 차를 몰고 종종 일 때문에 비행기를 타기도 하니까. 그때 정말 이것이 나에게 필요한가를 자문하며 최대한 자제하려고 한다.
- 진행 중인 다음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Shanghai’s>라는 제목의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1932년 밴쿠버를 배경으로 한 픽션이지만 내 가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중국 출신의 곡예사이자 마술사인 증조할아버지와 캐나다의 작은 마을 출신인 내 증조할머니가 주인공이다. 이 시절 내 조부모는 크리스마스 파티 ‘스노볼’에 가게 된다. 실제는 백인들만 입장할 수 있는 무도회에 공연자로 초청받은 것이었지만 극에서는 그들이 진짜 초대받은 줄 안다는 설정으로 바꿨다. 인종문제와 문화 혼합의 긴장, 그리고 당대 사회 분위기를 다룰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