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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해커의 탄생, <해피엔드>

가까운 미래의 도쿄를 영화의 시공간으로 제시하는 <해피엔드>.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 영화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것 같다. 후미(이노리 기라라)를 따라나선 코우(히다카 유키토)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난다. 그곳에서 소위 운동권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는 일본 포크송의 상징적 존재인 오카바야시 노부야스가 발표한 <くそくらえ節>(똥이나 처먹어라 타령)이라는 곡이다. 1968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저항을 상징하는 시대적 언표였으며 직설적인 가사 때문에 금지되기도 했다. 테크노 클럽에서 치안에 의해 색출당하며, 인정받지 못할 정체성을 번번이 증명해야 했던 코우는 그곳에서 오래된 금지곡을 배우고 “시위하면 정말 사회가 변해요?”라고 묻는다. <해피엔드>는 미래를 향하는 앞모습과 잔존하는 파시즘의 뒷모습이 동시에 배태된 영화이자, AI 감시체계가 함의하는 판옵티시즘과 자위대라는 극단적인 상징을 반복해서 드러내며 사고실험을 감행하는 동시대의 기획물이다. 소라 네오 감독은 어째서 1960년대 후반의 금지곡을 소환한 것일까. 당시의 일본은 1964년 치러진 도쿄올림픽 이후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영화적으로는 마쓰모토 도시오, 아다치 마사오, 오시마 나기사, 데시가하라 히로시 등의 감독들이 실험정신을 극대화하였으며, ‘풍경영화’라는 사조가 형성된 시기이다. 현재의 일본에는 ‘시대상’이 부재하기 때문일까. <해피엔드>는 앞선 세기 감독들의 인장을 미학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기보다, 미래의 풍경을 상상하기 위해 지나간 시대를 우회하여 경유하면서 앞으로 걸어나간다.

소년이 뒤를 돌아볼 때

유타(구리하라 하야토)와 함께 테크노 클럽으로 잠입한 코우. 테크노음악은 유타와 그의 친구들에게 유희의 수단이자 그들의 공동체적 우정을 확인하는 미디엄으로 작용한다. 디제잉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들이 들이닥친다. 출구를 향하던 코우는 등불 아래에서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망설이다가, 뒤를 돌아본 후 다시 유타의 곁으로 간다. 경찰은 둘의 얼굴을 찍어 신원을 확인하고, 재일한국인인 코우는 특별영주자증명서를 요구받는다. 이때 코우의 시점숏이 목격하는 것은, 치안 시스템에 개의치 않는 유타의 모습이다. 유치원 시절부터 같이 자라온 둘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존재로 남고 싶어 하지만, 이들의 우정은 치안에 의해 분할된다. 유타와 함께하는 순간마다, 코우는 일본이라는 파시즘에 의해 징집되었으나 치안에 의해 정체성이 거부당하는 사생아인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교장의 차를 곧추세우는 장난을 저지른 날, 유타 일행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농담을 주고받는다. 이때, 구석에 앉아 있던 후미가 ‘경찰은 국가와 부유층을 위해 무장한 관료’라 선언한다. 창밖을 바라보던 코우가 뒤를 돌아본다. 그의 시야에, 함께 장난을 치고 밤새 음악을 듣던 친구들의 설익은 얼굴이 아닌 분주한 교실의 풍경과 후미가 들어온다. 코우는 새로운 우정의 단서를 발견한다.

어째서 유타와 아타(하야시 유타), 밍(시나 펭), 톰(아라지)은 후미와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못하는 것일까? 유타는 후미와 한 프레임 안에 있을 때조차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포크송을 부르고 시위에 참여하는, 그리고 종이책을 읽는 후미는 60년대에서 온 유령일까? 오직 코우만이 그녀와 마주 보고 대화를 한다. 영화는 우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선들에 의해 분할된 공간으로서의 학교를 보여준다. 이런 구분선을 순간적으로 삭제하는 장치로서, 영화는 ‘지진’을 선택한다. 지진은 투표권은 없지만 ‘비국민’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찍힌 코우의 집, 학교와 도쿄의 거리를 평등하게 흔든다. 그러나 영화는 지진이라는 자연적 재난과 영화적 상징을 시위와 곧장 연결시킨다. 지진은 거리의 시위를 호출하고, 시위는 숨어 있던 권력을 팽창시킨다. 스스로를 드러내며 가시화된 권력은 유타에게는 안전을 약속하고, 호모 사케르인 코우에게는 위협을 가한다. 지진과 시위에 잇따라 등장하는 두번의 정경숏을 떠올려보자. 고층 빌딩의 미디어 파사드와 구름 위로 총리의 얼굴과 경직된 메시지가 흐른다. 이 암울해 보이는 예외 상태의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은 누구의 것일까. 그것은 어둡고 축축한 길을 지나야 도착하는 곳에 사는 코우가 바라본 일본의 풍경일 가능성이 높다. 이 숏은 코우에게 ‘너의 자리는 어디에 위치하는지’ 질문한다. 동아리실이 폐쇄되고 학교에서 훔쳐 나온 장비로 디제잉을 하던 유타는 자리를 떠나려는 코우에게 장난을 건다. 친구들을 떠나던 코우가 뒤돌아서서 “웃고 즐기는 사이에 다 죽는다”고 말한다. 서로를 동일시함으로써 지탱되던 이들의 우정에 균열이 도착한다.

감시 시스템 너머를 응시하는 몫 없는 자들

소라 네오의 단편 <슈가 글라스 보틀>에서는 로봇 순찰견이 길 위의 사람들을 찍고 정보를 수집한다. <해피엔드>에서 치안 체계는 보다 가시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위시한다. 권력은 응시의 주체로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데모스로 분류될 수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응시의 대상으로 데이터를 착취당한다. 문제는 이렇게 수집된 데이터가 어디에 축적되고, 어떻게 활용되는지 은폐되고 있다는 것이다. 교실 안으로 자위대가 들어오고, 코우를 포함한 귀화하지 않은 학생들과 후미는 교실 밖으로 쫓겨나와 감시체계의 카메라 앞에 마주선다. 순간 이들은 침묵한 채로 카메라 너머에 있는 권력의 주체를 뚫어지게 응시한다. 이들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시스템의 구조와 폐부마저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지만 결코 온전하게 편입되지 못하는 자들. 한편으론 그것을 열망하지만 끝내 가지지 못하는 몫 없는 자들. 영화는 자성하지 않는 오래된 치안의 허점을 탈은폐하는 미래의 아키비스트, 불화를 일으키는 해커의 탄생을 그린다. 자크 랑시에르에 따르면, 정치의 본질은 현존하는 불일치를 현시하면서 고유한 공간을 짜내는 것이다. 자위대가 드나들던 학교는 데이터를 빼앗긴 몫 없는 자들이 몫을 나누는 정치의 현장이 된다. 교장의 차에 몰래 장난을 치고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가 아침을 맞이했던 코우는 새롭게 속하게 된 공동체의 일원들과 교장실을 밤새 점거한 후, 개운한 얼굴로 아침을 먹으러 간다. 그런데, 유타는 어디에 있을까. 교장은 졸업식의 리허설에서, 감시체계를 없애는 대가로 차량을 망친 범인의 자백을 요구한다. 코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본다. 이제 그 자리에 유타는 없다. 감시체계에 제대로 포착되거나 두려워한 적 없던 유타는 교장의 자리로 올라가 마이크를 이어받은 후, 모든 것은 자신의 짓이라 고백한다. 권력자의 연단. 그곳은 우정이 성립할 수 없는 장소이다. 유타는 우정에 헌신하면서 동시에 우정을 포기한다. 클로즈업된 두 소년의 얼굴 위로 떨림이 감지된다. 우정의 한 챕터가 그 어떤 지진보다 강하게 균열하며 닫히고 있다. 소라 네오의 사고실험을 옹호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두 소년이 하는 선택에 있다. 코우는 이제 더이상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유타 역시 그런 코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반대편으로 걸어내려간다. <해피엔드>는 불화로 완성되는 우정을 통해 소년들의 미래를 낙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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