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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No. 3> <시라트> <센티멘털 밸류> <스플리츠빌> 최초 리뷰
김소미 김혜리 조현나 2025-05-30

거울 No. 3 Miroirs No. 3

크리스티안 페촐트 / 독일 / 2025년 / 86분 / 감독주간

<거울 No. 3>는 라벨의 곡을 그대로 차용한 제목처럼 한편의 서늘한 피아노 소품과 닮았다.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이번에도 수수께끼로 문을 연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념과 충동에 사로잡힌 피아니스트 로라(파울라 베어)는 들판에서의 급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연인을 잃고, 이를 목격한 중년 여성 베티(바르바라 아우어)의 시골집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한다. 유사 모녀 관계로 보이는 두 여자의 강한 이끌림은 논리적 인과보다는 주술적 이끌림으로 묘사된다. 다만 베티의 가족과 로라가 어울리는 동안 그녀가 누군가의 대체재일 수 있다는 뉘앙스가 적층된다. <거울 No. 3>는 페촐트식의 <레베카>(감독 앨프리드 히치콕, 1940)이면서, 전작 <피닉스> <트랜짓> 등을 통해 반복해온 정체성의 재구성에 관한 드라마이다. 도플갱어적 존재와 오인의 모티프로 형성되는 긴장감은 공동의 역사에 뿌리를 둔 주요 전작들에 비해 일상적 층위에 머무는 한편,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환상 동화식 구조가 선명해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은유의 층위에 충실한 작품으로도 보인다. 의외의 유머를 허락하고 인간관계의 사사로운 진폭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어파이어>의 미덕을 잇는 지점도 돋보인다. 상실 이후, 외면 대신 혼란을 수락하며 살아가는 인물들의 심리적 잔상을 조용히 탐색하는 페촐트의 신작은 설명 대신 인상으로, 서사 대신 리듬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배우 파울라 베어가 또 한번 유령과 인간의 경계에 서서 영화를 지배하는 신비로운 기운을 내뿜는다. /김소미

시라트 Sirât

올리버 라세 / 스페인, 프랑스 / 2025년 / 120분 / 경쟁

사람들이 메마른 땅 위에 대형 스피커를 설치하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그 속에서 루이스 부자는 사라진 딸을 찾고 있다. 아마도 다른 파티에 딸이 있을 것이라며 떠나는 일행 뒤를 루이스 부자가 말없이 따라붙는다. ‘시라트’는 이슬람교에서 ‘지옥을 가로지르며 이승과 낙원을 연결하는 다리’를 의미한다. 오직 의로운 사람만이 다리를 건널 수 있으며 불의한 사람은 불에 타는 형벌을 받는다. 올리버 라세 감독은 교리를 따르는 대신 인물들 앞에 지뢰처럼 고통을 심어놓은 뒤 이를 딛고 ‘어떻게’ 다음으로 넘어갈 것인지에 관해 논한다. <시라트>를 관람할 때 연상되는 작품은 의외로 <매드맥스>다. 사막을 배경으로 곧게 질주하는 차, 전쟁이 암시되는 세계에서 훼손된 신체로 배회하는 이들의 광경이 익숙하게 펼쳐진다. 등장인물들이 특정 대상을 갈망한다는 점도 유사하지만 <시라트>의 주인공들은 거듭된 사건으로 자신의 목적을 점점 망각해간다.

다수가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던 오프닝 시퀀스와 루이스와 일행이 상실감에 젖은 채 춤을 추는 후반부 시퀀스는 대구를 이룬다. 그러나 후반부에 들어 춤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뼈를 깎는 고통에도 어째서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는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왜 눈앞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 인물들의 몸짓은 시라트에 담긴 실존적 질문을 형태화해 선보인다. <시라트>에서 음악은 상실을 넘어 죽음으로 들어서는 감각을 형상화한 것에 가깝다. 광활한 소리와 고통의 몸부림으로 채워진 지옥도에서 <시라트>는 서서히 죽음을 체험하게 만든다. /조현나

센티멘털 밸류 Sentimental Value

요아킴 트리에르 / 노르웨이, 프랑스, 덴마크, 독일 / 2025년 / 135분 / 경쟁

배급사 네온이 또 한번 옳았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레나테 레인스베와 트리에르가 다시 한번 손잡은 영화 <센티멘털 밸류>는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두 자매가 실종에 가까웠던 아버지 구스타프(스텔란 스카르스가르드)와 재회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영화감독인 구스타프는 갑자기 자신의 어머니에 관한 자전적 영화를 공표하며 배우인 큰딸 노라(레나테 레인스베)에게 주연을 제안한다. 노라는 아버지의 섣부른 예술적 명분에 상처받고 거절하는데, 할리우드 배우 레이첼(엘 패닝)이 그 역할을 수락한다.

가차 없이 흐르는 시간의 잔해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 ‘느끼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센티멘털 밸류>는 한 가계가 세대를 걸쳐 살아온 집을 매개로 예술과 가족의 기억을 관통하는 실내극이자 영화에 관한 영화다. 전작보다 조금 느리고 확실히 절제된 톤으로, 요아킴 트리에르는 쇼 비즈니스와 가족사의 경계를 부드럽게 탐험한다. 장년의 영화감독이 마주한 영화계는 우울한 겨울빛의 전망을 보여주지만 오슬로의 해질녘을 통과하는 노라의 시간은 트리에르의 영화가 언제나 그래왔듯 충분한 ‘감상적 가치’(센티멘털 밸류)가 있다. 제3의 목소리로 인물들의 자기 인식을 풀어 쓴 보이스오버, 블랙코미디적 터치도 여전히 빛난다. 프리미어 상영 이후 무려 19분간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김소미

스플리츠빌 Splitsville

마이클 앤젤로 코비노 / 미국 / 2025년 / 100분 / 칸 프리미어

미국 코미디의 신성이 나타났다. <더 클라임>에 이어 협업한 마이클 앤젤로 코비노와 카일 마빈이 공동 주연 및 공동 작가를 맡은 <스플리츠빌>은 ‘개방 결혼’(open marriage)이라는 새로운 관계 유형을 소재로 4초에 한번꼴로 폭소를 자아내는 밀도 높은 코미디다. 결혼 13개월 만에 아내 애쉴리에게 이혼을 요구받은 착실한 성격의 교사 캐리는 죽마고우 폴과 줄리 부부의 본을 받아 아내와 동거를 지속하며 줄기차게 바뀌는 애쉴리의 전 남친 클럽 관리자 역할을 한다. 한편 캐리와 줄리 사이에 생긴 특별한 감정은 네 사람 사이에 새로운 국면을 연다.

<스플리츠빌>은 주제보다 만듦새가 인상적이다. 영화 전반부 캐리와 폴이 벌이는 질투로 인한 실내 격투는 완벽한 타이밍과 안무, 유머감각으로 상영 도중 박수갈채를 끌어냈다(<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유명한 막싸움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올해 칸 최고의 액션신 후보다). 뿐만 아니라 긴 트래킹숏으로 두세개의 서브플롯을 한꺼번에 전달하는 솜씨도 인상적이다. 네온이 배급하는 이 영화의 프리미어에는 아리 애스터, 숀 베이커 감독도 참석해 높은 호감도를 입증했다. /김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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