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올라 La Ola
세바스티안 렐리오 / 칠레 / 2025년 / 129분 / 칸 프리미어
“이 대학은 강간범에게 학위를 수여한다.” 강렬한 문구의 거대한 현수막과 함께 여학생들이 분노로 가득한 노래를 시작한다. <더 원더> <글로리아 벨> <판타스틱 우먼>을 연출한 세바스티안 렐리오 감독은 2018년 칠레 대학에서 일어난 페미니스트 학생 시위에서 영감을 받아 <라 올라>의 메가폰을 잡았다. 주인공 줄리아(다니엘라 로페스)의 모교에선 교내 여학생에게 성희롱, 성폭력을 행한 남학생들과 교직원을 상대로 강력한 항의 시위가 주기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일부 여학생들이 위원회를 조성해 성폭력 피해 사례를 수집하는데 위원회의 일원인 줄리아 역시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줄리아에게 성폭력을 가한 상대는 같은 성악과의 조교였고 혹시 모를 불이익이 두려워 그는 계속해서 증언을 망설인다. 극 중 가해자와 가해자의 보호자들은 성폭력 피해자가 신분을 드러내길 꺼린다는 점을 역이용하려 한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학생들은 붉은 복면을 착용해 익명성을 담보한 채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이끌어낸다. <라 올라>는 뮤지컬 형식을 실험적으로 활용한다. 광장을 메울 만큼의 다수를 활용해 군무를 꾸리고 정갈한 편집 대신 거칠더라도 저항의 에너지를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택한다. 자기 경험을 드러내길 꺼리던 피해자가 다수를 이끄는 활동가로 변모하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묘사됐는데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된 신인 다니엘라 로페스가 이를 무리 없이 소화해 극을 이끈다. /조현나
시크릿 에이전트 O Agente Secreto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 브라질 / 2025년 / 158분 / 경쟁
<아쿠아리우스> <바쿠라우>의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감독이 부패와 독점이 횡행한 브라질의 1970년대를 소환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가 극장가를 휩쓸던 해, 브라질에서는 상어 뱃속에서 잘린 사람 다리가 발견된다. 바야흐로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다. 경찰은 카드 결제기를 들고 다니며 뇌물을 받고 자본가들은 독점 이익을 위해 정치인과 결탁한다. 공대 교수 아르만도(와그 모우라)는 기업에 불리한 친환경 기술을 연구하던 학과를 폐쇄당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잃는다. 어린 아들과 함께 망명을 꾀하는 그가 의탁한 아파트는 국가로부터 탄압당하는 소수자들의 임시 아지트로서 전작들에 나오는 코뮌적 공동체와 닮았다. 여기에 영화는 주인공들의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를 50년 후 청취하는 2020년대의 대학생을 등장시켜 현재를 과거와 대화하게 만든다. 나아가 형식적으로도 <시크릿 에이전트>는 70년 대 장르영화와 대화한다. 이야기의 동력은 진중한 분노지만 그 여정은 에로틱하고 코믹하고 마술적인 카니발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재키 브라운>과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를 한품에 안는 영화랄까. 2025년 오스카에서 국제장편작품상을 수상한 월터 살레스의 <계엄령의 기억>과 멋진 동시상영 프로그램을 이룰 작품이다. /김혜리
두 검사 Two Prosecutors
세르게이 로즈니차 / 프랑스, 독일, 루마니아, 네덜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 2025년 / 118분 / 경쟁
우크라이나 출신인 세르게이 로즈니차 감독이 크렘린궁을 포함하여 이 시대의 여러 스트롱맨들을 향한 한편의 걸출한 풍자극을 내놓았다. 배경은 1937년,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 젊은 검사 코르네프(알렉산드르 쿠즈네초프)는 국가보안위원회(NKVD)가 공산당 원로 간부들을 숙청하고 그 자리를 스탈린의 무능한 충복들로 채워가고 있다는 한통의 혈서를 받는다. 발신자는 갖은 고문 끝에 브랸스크 감옥에 수감된 초로의 법조인 스텝냐크(알렉산드르 필리펜코)로, 코르네프는 그를 구제하고자 직접 모스크바로 향한다. 한 쪽은 스탈린 체제의 희생자이자 법적 정의를 구현한 마지막 세대이고, 다른 한쪽은 도덕적 깨달음을 얻지만 끝내 무력할 수밖에 없는 세대로서 ‘두 검사’라는 역사적 연속체를 이룬다. <키이우 재판> <바비 야르 협곡> 등의 다큐멘터리에서 아카이브 푸티지 작업을 통해 역사적 기록에 내재한 편향의 흔적을 추적한 로즈니차 감독이 2018년 <돈바스> 이후 6년 만에 픽션으로 회귀했다. 주인공이 감옥과 관청 등을 오가며 끊임없이 대기하는 과정의 반복인 로즈니차의 신작은 아카데미 비율 안에 엄격히 응축한 미장센이 주는 압도감으로 집중을 요청한다. 블랙코미디적 수다와 전체주의의 공포가 기묘한 밀실극의 인테리어를 자랑하고, 카프카를 차용한 군더더기 없는 부조리극의 구조는 냉혹한 여운을 남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4년간 수감되어 1980년대 후반에 사망할 때까지 국가로부터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던 반체제 과학자인 게오르기 데미도프가 쓴 소설에 기반했다. /김소미
심플 액시던트 Un Simple Accident
자파르 파나히 / 이란, 프랑스, 룩셈부르크 / 2025년 / 105분 / 경쟁
가족과 집으로 향하던 에그발은 떠돌이 개를 차로 들이받는다. 단순한 사고로 치부하며 마저 차를 끌어보려 하나 결국 정비소에 들러야 할 상황이 벌어진다. 바히드는 과거 임금 체불 문제로 항의하다 수감돼 고문을 받은 경험이 있다. 정비소에 들른 에그발의 의족 소리를 듣고 바히드는 곧바로 수감소의 기억을 떠올린다. 바히드가 과거의 복수를 행하려 하자 에그발은 자신이 동일인이 아니라고 호소한다. 당시 시야가 가려져 있었기에 에그발의 신분을 자신할 수 없었던 바히드는 함께 수감됐던 동료들을 찾아간다. 이들은 정보를 조합해 에그발의 정체를 확신하는데, 곧이어 임신한 그의 아내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딜레마에 빠진다. 블랙코미디가 가미된 복수극처럼 시작해 임금 체불 문제, 억압적 체제 등 현 이란 정권에 대한 비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주인공 다섯명의 배경 서사는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반체제 혐의로 수감됐을 때 수감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바탕이 됐다. 고문의 정황을 자세히 묘사하는 대신 탄압에 관한 인물들의 감각적 기억을 사운드와 롱테이크 촬영을 통해 몰입도 높게 연출한 점이 인상적이다. 영화에선 에그발이 실제 고문관인가에 대한 답을 명확히 제시하진 않는다. 그러나 수감자들이 정당한 요구에 반해 과한 형벌을 받았고 트라우마의 여파가 상당하다는 점, 그럼에도 이들이 연대를 통해 저항하고 저항의 방식 또한 폭력의 테두리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이란 정권에 대한 가장 강한 비판적 태도가 담겼다. /조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