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바그 Nouvelle Vague
리처드 링클레이터 / 프랑스 / 2025년 / 105분 / 경쟁
<카이에 뒤 시네마> 사무실의 서랍을 열어 지폐 몇장을 몰래 훔치는 청년, 장뤼크 고다르(기욤 마르벡)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4:3 흑백 셀룰로이드 화면에 대고 말한다. “영화를 비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링클레이터가 택한 가장 좋은 방법 역시 그렇다. 1959년 촬영한 고다르의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 작업기를 경쾌하게 좇는 신작은, 고다르의 걸작보다 <누벨바그>를 먼저 볼 세대를 위해 앞장서 띄우는 한통의 러브레터처럼 다가온다. 오토 프레민저 감독과의 악명 높은 작업을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온 할리우드 배우 진 셰버그(조이 도이치)가 고다르의 즉흥성과 충돌하며, 프로듀서인 조르주 드 보르가르는 대중을 위한 플롯과 메시지를 역설하는 상황. 넷플릭스 코미디 <히트맨>과 1940년대 미국 브로드웨이로 돌아간 소니 영화 <블루 문> 이후 칸에 입성한 링클레이터는 인디영화와 상업영화를 횡단하는 동안에도 작가성을 유지해온 자신의 여정에서 누벨바그라는 출처를 찾는다. <보이후드> <블루 문> 등에서 영화의 시간성을 조각해온 정신 또한 고다르와 일군의 친구들에게서 수혈된 것이다. 다만 그는 영화사에 기록된 혁신적 문법을 자신의 스크린에 외형상 재현하는 고다르의 경구들을 되새기고 당대의 에너지를 옮기는 데 충실하다. 이 점이 곧 <누벨바그>의 매력이자 결여일 것이다. 독창적 각주를 기대한 이들에게는 <누벨바그>의 세련된 경쾌함, 링클레이터다운 온유함이 일면 해석의 부재로 다가올 수도 있다. 온기, 유머, 관용의 거장인 링클레이터의 미덕이 날 선 누벨바그의 기수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영화임은 분명하며, 올해 칸영화제에서만큼은 경쟁부문의 어떤 영화보다도 애정 어린 호응을 이끌어냈다. 오늘날 우리가 열광하는 영화들에 깃든 오래된 유산을 향해 사랑스럽게 어깨동무하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에게 뤼미에르 대극장은 길고 신나는 박수로 화답했다. /김소미
에딩턴 Eddington
아리 애스터 / 미국 / 2024년 / 145분 / 경쟁
아리 애스터의 신작 <에딩턴>은 정치적 극단주의를 풍자하는 광란의 사회실험극이자 공동체의 파멸을 선고하는 아리 애스터식 아포칼립스다. 트라우마로 점철된 장르의 세계에서 현대 미국 웨스턴으로 초점을 확장한 아리 애스터의 신작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정면으로 반영한 최초의 할리우드영화이기도 하다. 연대기적 상징성을 떠나 아리 애스터 필모그래피의 시계열을 넓혀 바라볼 때 중요한 분기점임은 분명해 보인다. 영화는 팬데믹, 인종 갈등, 온라인 음모론, 쇼츠와 가짜 뉴스, AI 빅테크 기업의 침투 등 동시대 미국의 지옥도를 대변하는 요소들을 작은 집단에 거침없이 욱여넣은 모양새다. 때는 2020년,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는 보수 성향의 마을 보안관 조(호아킨 피닉스)는 극우 유튜버를 신봉하는 아내(에마 스톤)와 장모 사이에서 무력한 나날을 보낸다. 진보 성향의 시장 테드(페드로 파스칼)가 펼치는 보건 정책에 반감을 품게 된 그가 직접 차기 시장 선거에 뛰어들면서 영화는 본격적인 전환점을 맞는데, 소통 대신 폭력을 택한 주인공의 폭주와 함께 후반부는 전작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그랬듯 초현실적인 피카레스크를 향해 내달린다. 칸 현지 반응은 극렬히 나뉘었다. 미국 기자들은 자국을 겨냥하는 과격한 촌극에 손을 들어준 한편, 노골적 도상들로 가득 찬 쇼케이스를 과시하는 아리 애스터의 호들갑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급진화된 백인 청년들의 모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그려지는 온건파 흑인 경찰들의 무고한 희생 등 주변부의 묘사가 외려 날카롭게 반짝인다. /김소미
르누아르 Renoir
하야카와 지에 / 일본, 프랑스,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 2025년 / 116분 / 경쟁
“우리는 사람이 죽을 때 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안쓰러워서 우는 걸까, 우리 스스로가 안쓰러워서 우는 걸까?” 학교에 제출한 에세이에서 후키(유키 스즈키)는 한 소녀의 장례식을 지켜본다. 상주 자리에 선 부모를 보며 후키는 그것이 자신의 장례식임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본인의 판타지 에세이에 전술했듯 11살의 후키는 종종 죽음을 상상한다. 나아가 상실을 겪은 이들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수시로 영혼을 불러오는 주술을 행하고 텔레파시에 심취한 모습으로 등장하기까지, 이 모든 건 암환자인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됐다. 시한부인 아버지, 그를 간호하고 생계를 잇는 어머니에겐 딸을 돌볼 여유가 없다. 고요한 집에서 아이는 자주 외로움을 곱씹는다. 데뷔작 <플랜 75>를 통해 노년 여성의 생과 사에 주목한 데 이어 <르누아르>에서 하야카와 지에 감독은 11살 소녀를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예견된 이별 앞에 데려다놓는다. 버블경제 붕괴 이전, 풍요로웠던 사회의 외형과 반대로 가족간의 유대는 약화된 1980년대 일본의 시대상이 바탕이 됐다. 자전적 작품인 만큼 성인의 관점에서 회상한 과거임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후키의 과거, 상상의 결과물이 현실과 자주 교차되는데 여기엔 아버지의 부재에 관해 필사적으로 이해해보려는 소녀의 간절함이 녹아들어 있다. 소마이 신지의 <이사>,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의 자장 아래 놓인 작품임은 분명하나 <플랜 75>보다 한층 과감한 시도, 안정된 만듦새로 하야카와 지에 감독은 자신의 영역을 굳건히 다진다. /조현나
다이, 마이 러브 Die, My Love
린 램지 / 캐나다 / 2025년 / 118분 / 경쟁
잡화점 직원이 묻는다. “필요한 건 다 찾으셨나요?” 여자는 받아친다. “뭐, 인생에서?” 직원은 꺾이지 않고 유모차의 아기한테 찬사를 쏟아낸다. “어머 이렇게 예쁜 아이는 처음 봐요.” 점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여자가 일축한다. “댁은 생각은 하면서 말하는 거예요? 아니면 그냥 쉬지 않고 입을 나불나불하는 건가?”
이 가시 돋친 여자의 역설적인 이름은 그레이스. 배우는 이런 부류의 대사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 제니퍼 로런스다. 파트너 잭슨(로버트 패틴슨)과 그레이스는 자력으로 장만할 수 없는 넓은 집을 잭슨의 숙부가 물려주자 뉴욕에서 몬태나의 외진 시골로 이사하고 곧 아기가 태어난다. 왕성하던 섹스는 드물어지고 깊어가는 고립 속에 작가지망생인 그레이스는 책상에 앉지 못한다. 발산할 곳을 찾지 못한 여자의 욕구불만은 관계를 잠식하고 말 그대로 집을 파괴해간다.
벌레의 웅웅거림과 아기의 울부짖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가운데 히스테리가 불꽃놀이를 벌이는 <다이, 마이 러브>는 보기 쉽지 않은 영화다. 그럼에도 이 불꽃놀이에는 놀라운 아름다움이 있다. <케빈에 대하여> <너는 여기 없었다> 등에서 정신적 만성통증의 탁월한 연구자임을 보여준 린 램지 감독은 관객의 청각, 촉각, 시각을 난사하며 관객을 한 여자의 신경증 속으로 데려간다. <툴리>를 비롯해 산후우울증을 다룬 많은 영화들과 다르게 린 램지는 그레이스를 치유하려 들지 않는다. 건전한 정상성의 세계로 끌어내려 하지 않는다. 벽지를 손톱으로 긁고 타일을 부수며 그 뒤쪽의 무엇을 잡아 쥐려는 그레이스의 폭력적 몸부림을 변명하지 않는다.
한동안 스타덤에 의해 거세됐던 제니퍼 로런스의 야성과 무시무시한 재능이 봉인해제된 이 영화는 <가여운 것들>이 에마 스톤에게 그랬던 것처럼 로런스의 연기 편람으로 내년 오스카의 영광을 점치게 한다. <다이, 마이 러브>의 억압은 나쁜 남편, 못된 시어머니보다 거대한 것으로부터 온다. 잭슨과 그의 어머니 팸(시시 스페이섹)은 결코 악역이 아니다. 외려 남편의 죽음으로 가족에 봉사하는 역할을 완료한 팸과 출산에 의해 그 길목에 접어든 그레이스가 마주 보고 만들어내는 그림은 이 영화에 또 다른 차원을 더한다. /김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