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밤, 영화제가 중반을 향해가는 시점. <서브스턴스>의 성공 이후 약 10억달러로 기업 가치를 올린 인디 배급사 무비(Mubi)가 올해 경쟁부문 화제작인 <다이, 마이 러브>를 2400만달러에 사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베를리날레에서 공개된 A24 영화 <이프 아이 해드 레그스, 아이드 킥 유>에 이어 육아 스트레스로 인한 광기를 종말론적으로 풀이하는 린 램지의 신작은 포효하는 동물이 된 제니퍼 로런스를 향해 ‘왜 진작 안 하고?’라고 되묻고 싶을 정도로 절호의 역할을 쥐여준다. 스타 파워와 향후 오스카 레이스까지 고려하면 무비의 야심도 납득 가능하다. 그럼에도 이례적인 수준의 구매 가격에 대해 <할리우드 리포터>는 덧붙인다. “<아노라>의 북미 박스오피스 수익보다 많은 액수다.” 전통의 스튜디오들보다 공격적인 행보에 나선 무비의 소식은 새로운 시장 질서를 예고하는 것일까. 한층 더 느리고 조심스러운 구매 풍경은 앞서 선댄스와 베를린에서도 감지된 분위기다. 다만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칸 개막 직전 발표한 해외영화에 대한 관세 부과 계획이 심리적 영향을 미쳐 가뜩이나 영화산업의 미래를 회의하는 불안감을 증폭시킨 것으로 보인다. 물론 끝이 없는 기자들의 줄서기, 어딜 가든 소란스러운 풍경은 겉보기에 여전하다.
12년 만에 한국영화(장편 극영화 기준)가 초대받지 못한 올해 칸영화제엔 CJ엔터테인먼트가 부재했다. “한국영화 시장의 위기를 바이어들도 익히 알기에 확실히 구매 결정이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는 반응도 대다수였다. 마르셰 뒤 필름 2층을 방문하면 입구 메인 스폿에서 바이어들을 맞던 CJ 부스에 새롭게 자리한 건 <파묘>의 쇼박스다. 강하늘, 김영광, 차은우, 한선화 주연의 코미디 <퍼스트 라이드>의 대형 배너를 내건 쇼박스는 <퍼스트 라이드>와 더불어 연상호 감독, 구교환 주연의 <군체>에 대한 선판매 반응을 긍정적으로 전했다. 두 영화 모두 현재 한창 촬영 중이다. 롯데, 콘텐츠판다, 플러스엠도 뜻밖에 호조를 보이는 홍콩영화와 세력을 겨눠가며 신작 세일즈에 열을 올렸다.
마르셰 뒤 필름 2층 입구 메인을 차지한 쇼박스의 <퍼스트 라이드> 배너. 사진 씨네21 김소미
예산 문제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칸영화제에 한국영화를 소개하는 ‘한국영화의 밤’(Korean Film Night)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가 항만 인근에 자리한 영화진흥위원회 부스에서 파티를 열고 경쟁 영화제로의 전환을 성황리에 알렸다. 올해 집행위원장 취임 소식을 알리기 위해 칸을 찾은 정한석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손님을 맞이했다. <스크린 데일리>는 정 집행위원장의 임명을 두고 세대교체라는 측면에 집중한 인터뷰를 내보냈다. 경쟁 전환, 상영관 확대 및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상영작 규모로의 점진적 회복, 역대 최고의 아시아영화를 선정·상영하는 30주년 기획 등이 주요 이슈로 다뤄졌다. 정한석 집행위원장은 “기성의 작가감독과 상업 장르 영화. 두 갈래가 오랫동안 한국영화를 설명해왔지만 이 이분법을 넘어 더 넓은 시야로 한국영화를 바라봐주길 바란다. <괴인> (감독 이정홍), <남매의 여름밤>(감독 윤단비), <벌새>(감독 김보라)처럼 부산영화제에서 월드프리미어로 소개된 뛰어난 영화들이 새로운 한국영화의 지형이다”라고 소개했다. 마찬가지로 위원장으로서는 올해 칸을 처음 찾은 한상준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은 <씨네21>과의 만남에서 한국영화가 부재한 위기의식을 발판 삼아 국제 공동제작의 활로를 모색하겠다는 기조를 내비쳤다. 특히 일본, 인도 등 아시아 유력 감독들이 유럽의 펀딩을 받아 차기작을 확장된 규모로 선보이는 사례에 주목했다. 올해는 프랑스,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카타르가 합작한 경쟁부문 상영작, 하야카와 지에 감독의 <르누아르>가 대표적이다. 다큐멘터리스트들의 네트워킹 플랫폼인 칸 독스(Cannes Docs)에 주요 협력사로 합류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장병원 프로그래머는 한국의 젊은 다큐멘터리 프로듀서가 국제무대에서 펀딩 피칭과 비즈니스 미팅을 진행할 수 있는 기틀을 닦는 데 주력했다. 경쟁부문 상영작을 좇은 <씨네21>이 확인한 중반까지의 분위기를 종합하자면 지금까지의 가장 강력한 황금종려상 후보작은 <심플 액시던트>(그린나래미디어 수입)다. 망명 중인 이란 감독 자파르 파나히가 칸영화제에 22년 만에 귀환(2003년 주목할 만한 시선 초청작 <붉은 황금>)한다는 사실만으로 개막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그는 상영 직후 기자회견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들조차 내가 다시는 영화를 만들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파나히는 지난해 특별상을 수상한 동료 감독 모하마드 라술로프(<신성한 나무의 씨앗>)의 정권 비판을 지지한 이유로 구금되었다가 단식투쟁 끝에 2023년 풀려났다. <심플 액시던트>는 이란 정권에 의해 탄압받았던 이들이 과거의 고문자를 납치하고 복수를 꿈꾸는 플롯을 그린다. 국가폭력 아래 형성된 복수심이 어떻게 공동체 내부로 침투하는지를 조명한 신작으로, <노 베어스>처럼 가택연금 상태에서 자신을 화면에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던 감독의 전작들보다 훨씬 직설적이다. 파나히는 “감옥에서의 취조와 고문 경험이 정치적으로 더욱 각성한 영화를 만들게 했다”고 언급했다.
<심플 액시던트> 뤼미에르 대극장 초연 후 기립박수 세례 속의 자파르 파나히 감독. 사진 씨네21 김혜리
린 램지와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기대만큼 훌륭했지만 아리 애스터와 쥘리아 뒤쿠르노는 혹평을 받아들여야 했다. 특히 과감한 표현법으로 페미니즘 장르영화의 가능성을 개척했던 뒤쿠르노가 이번엔 관객과의 소통에 완전히 실패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인간을 대리석처럼 하얀 조각상으로 변화시키는 새 질병을 묘사하며 아포칼립스적 이미지의 매혹이 부분적으로 강렬함에도 불구하고, <알파>(찬란 수입)는 자기만족으로 점철된 무의미의 향연을 보는 듯하다. 에이즈로 사망한 부모의 뿌리를 찾는 소녀의 성장담인 카를라 시몬 감독의 <로메리아> (M&M 인터내셔널 수입)와 더불어 <알파> 역시 에이즈를 알레고리 삼아 뒤쿠르노의 커리어상 가장 무거운 주제의식을 시도하지만 정작 중요한 목소리를 전하는 데 실패한 인상이다.
근자에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귀환한 이가 안긴 실망감을 누그러뜨리는 건 신예들의 몫이다. 올해 칸은 올리버 라세와 마샤 실린스키라는 두 이름을 추대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올리버 라세의 세 번째 장편영화인 <시라트>(찬란 수입)는 모로코 사막에서 벌이는 광란의 레이브(일렉트로닉 댄스 파티)를 제3차 세계대전이라는 디스토피아를 배경막 삼아 그려낸다. 미국 네바다주 사막에서 열리는 버닝맨 축제에서 영감을 얻은 <매드맥스>라 할 만하다. 실존주의 테크노극을 펼친 이의 다음 주제를 궁금하게 하는 동시에 그가 영화의 리듬을 압도하는 숏을 직조해내는 작가임에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영화다.
두 번째 영화로 소포모어징크스 대신 칸 경쟁부문을 찾은 <사운드 오브 폴링>(스튜디오 DHL 수입)은 독일 북동부의 농가를 무대로 한 집에서 무려 4세대에 걸친 여성들이 시공간을 경유해 정신적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옮긴다. 논리적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는 역사적, 여성적 연루의 감각을 명상적인 언어로 풀어낸 실린스키의 영화가 올해 칸 경쟁부문의 문을 열었고 첫 상영작임에도 강렬한 잔상을 남기며 영화제 중반까지 주요 황금종려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세르게이 로즈니차의 <두 검사>도 <심플 액시던트>와 함께 현재까지 <스크린 데일리> 평점 최고점(3.1)을 기록하며 다큐멘터리 작업 후 픽션으로 돌아온 세르게이 로즈니차의 기량이 절정에 달했음을 알려준다.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의 <시크릿 에이전트>는 단연 시네필을 위한 영화다. 열대의 더위와 체제의 공포, 영화사의 상징과 장르적 인용이 교차하는 필류의 신작은 앨프리드 히치콕, 브라이언 드 팔마, 마틴 스코세이지, 존 카펜터의 유산 위에 필류 특유의 해설적 시선이 더해지며 1970년대 브라질 사회의 억압 속에서 소외된 존재들의 비공식적 저항을 시네필적 정서로 아카이빙한다. 요아킴 트리에르는 배우 레나테 레인스베, 도시 오슬로, 개인의 감정적 위기를 탐구하는 자기 인식적 드라마라는 작가적 인장을 지속하는 신작 <센티멘털 밸류>(그린나래미디어 수입)에서 한층 심화된 구조와 절제력을 보여주며 찬사를 받았다. 황금카메라상 수상 후 경쟁부문에 안착한 하야카와 지에의 <르누아르>(오드(AUD) 수입)는 80년대 도쿄 배경의 성장영화로, 중반부 이후 힘 있는 전환을 보여주면서 연출자로서의 도약을 선명하게 증명했다. 배우 폴 메스칼과 조시 오코너가 주연한 <소리의 역사>는 오스카 레이스에서 돋보일 만한 신세대, 음악 버전의 <브로크백 마운틴>이다. 총 22편 중 18편이 공개된 현재, 남은 기대작은 켈리 라이카트, 다르덴 형제, 비간 감독의 영화다. <케이스 137>과 <막내딸>은 칸의 자국영화에 대한 너그러움을 여실히 드러내고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카를라 시몬의 또 다른 여름영화인 <로메리아>는 형식적, 감정적 응집력 모두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타릭 살레의 <공화국의 독수리들>, 마리오 마르토네의 <퓨오리>는 경쟁부문 심사 기준의 최저선을 의심케 할 정도로 평이한 영화에 그쳤다.
올리버 라세 감독(오른쪽)과 <시라트>의 부자를 연기한 두 배우. SHUTTERSTOCK
작품별 편차가 큰 올해 라인업에서도 두드러지는 트렌드는 앰비언트 사운드의 전면화, 그리고 박스형 화면비다. <누벨바그> <다이, 마이 러브> <두 검사> <사운드 오브 폴링>이 모드 1.33:1을 내걸었고 뤼미에르 대극장의 스크린을 가리는 검은 커튼이 유독 분주하게 움직였다. <사운드 오브 폴링>을 시작으로 <두 검사> <소리의 역사> <알파> <다이, 마이 러브> <시라트> 등 음악이 영화의 내적 요소로서 중요하거나 실험적인 사운드가 과감하게 배치된 영화들도 시네마적 체험의 본질을 고민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고민을 엿보게 했다. 공교롭게도 올해 칸은 팔레 데 페스티벌 내 뤼미에르 대극장을 돌비애트모스 음향시스템으로 재정비해 128개의 고정형 스피커, 20개의 천장 스피커, 5km 길이의 케이블, 29개의 앰프를 보강, 유럽 최대의 몰입형 사운드 극장으로 거듭났다. 영화제의 홍보 메일에 시큰둥했던 기자들은 첫 상영작 <사운드 오브 폴링>에서 내면을 파고드는 음습한 앰비언트에 우선 긴장하고 얼마 뒤 <시라트>의 급습을 당해 자리에서 일어나 춤추고 싶은 욕망을 억눌러야 했다. 사운드 시설 정비에 파격적으로 지원한 칸 시장 다비드 리스나르의 말은 과연 옳았다. “창작자와 관객 모두가 영화가 의도한 방식 그대로를 최대치로 경험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함으로써 칸은 영화가 감각을 통해 온전히 체험되는 예술임을 강조해왔다. 이런 결정과 지지는 칸이 유산을 지키면서도 혁신에 헌신하는 ‘영화의 수도’임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이다.”
평점을 받지 않는 영화
칸영화제 ACID 섹션의 개막작으로 소개된 다큐멘터리 <풋 유어 솔 인 유어 핸드 앤드 워크>(Put Your Soul in Your Hand and Walk)가 많은 매체들로 하여금 별점을 매기지 않겠다는 선언을 되돌려받았다. 이란 감독 세피데 파르시와 팔레스타인 가자 출신의 사진기자 파트마 하수나가 1년간 주고받은 영상통화 기록을 담은 영화다. 말 그대로 모바일, 노트북을 가리지 않고 때때로 기록된 줌 콜 영상이 겹겹의 렌즈를 거쳐 전달된다. 개막작이 공식 발표된 다음날,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공습으로 하수나는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 사망했다. 이 영화엔 감독이 하수나에게 칸 초청 소식을 전하는 4월15일의 마지막 통화가 그대로 담겨 있고 감독은 통화 장면 직후에 사망자 명단을 이어 붙였다. 거칠고 산만할 수밖에 없는 구성이지만 파트마 하수나가 사진과 증언으로 남기려 했던 전쟁의 진실, 그리고 그가 꿈꾼 예술의 존엄은 예년의 ACID 섹션 개막작이 품었던 반향보다 한층 큰 주목과 애도를 새겼다. 평가와 분석을 내려놓은 칸은 세피데 파르시의 영화 앞에서 사라진 하수나의 꿈을 향한 우리의 입장을, 그 윤리를 되묻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