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첫 절기 입하를 지난 소만, 신간 <첫 여름, 완주>를 펴낸 출판사 무제의 대표 박정민을 만났다. 김금희 작가가 쓴 이 소설은 무제의 세 번째 책이다. 첫 책 <살리는 일>을 공개할 당시 아버지가 시력을 잃어 시각장애인을 위한 ‘듣는 소설’을 기획했다는 박정민은 <밀수>에서 공연한 고민시, 염정아 등 동료 배우들에게 <첫 여름, 완주>의 목소리를 맡겼다. 열매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자기 삶의 가지를 다시 뻗어보는 한 계절의 이야기는 국립장애인도서관 홈페이지와 오디오북 플랫폼 윌라에서 들을 수 있다. “바닥에 누워서 출판사 한번 해볼까 생각하다가 여기까지 와버렸다”라는 장난기 어린 진심을 품고, 출판인 박정민은 전시와 굿즈까지 만들어내며 많은 사람에게 책을 펼쳐 보이고 있다.
- <첫 여름, 완주> 출간과 함께 출판사 대표로서 여느 때보다 바삐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고 있다. 각종 지면 인터뷰에 더해 라디오나 유튜브 방송에도 출연 중인데, 배우로서 작품을 홍보할 때와는 다른 느낌인가.
완전! 영화는 큰돈이 들어가는 매체지 않나. 출판사는 돈이 없으니까 내가 발로 뛰지 않으면 안된다. 한번 뛸 때마다 그날의 판매 부수가 오르는 게 확인되니 거기에 홀린 듯 ‘더 해야 되나?’ 하는 거다. (웃음) 뜀박질 하나하나가 엄청 소중해진다. 6월 말에 열릴 서울국제도서전 때까지만 힘을 갈아넣어보려 한다.
- LCDC 서울에서 도서와 연계한 전시 <완주:기록:01>도 열리고 있다. 어제 전시장에서도 인사를 나눴는데, 매일 출석 도장을 찍고 있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려고 한다. 오늘도 인터뷰를 마치고 갈 예정이다. 전시장에서는 영화 무대인사를 할 때보다 팬들과 더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어서 예전에 책방 할 때 느낌이 든다. 책을 홍보하면서 이런저런 이벤트를 선보이는 것에 김금희 작가도 호의적이어서 참 감사하고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
- 팬들로부터 “당신 덕분에 독서한다”는 말을 자주 들을 것 같다.
종종 듣는다. 팬들의 지지와 응원이 내가 하는 모든 사업에 큰 영향을 주는 건 인지하고 있지만 팬들의 좋은 마음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서, 무제를 좋아해서 책을 한권이라도 더 읽게 되는 건 좋은 현상인 것 같다. 내가 이상한 책을 내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을 만들고 있으니까.
- 누군가를 좋아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그가 권한 책까지 읽게 만든다는 걸 잘 아는 분답게 <첫 여름, 완주> 추천사를 아이유와 신형철 평론가에게 받았다. 다독가와 그 반대편 양쪽을 모두 솔깃하게 하는 추천사계의 ‘끝판왕’들 아닌가!
그렇게 하고 싶은 의도가 다분했다. 이 책이 너무나 다른, 그러나 분명히 좋을 두분의 글로 인해 어떤 힘을 받게 될지 궁금했다. 아이유는 내가 원고를 보내고 며칠 만에 재밌게 읽었다며 추천사를 써보겠다고 연락해왔고, 신형철 선생님은 과거 서로 응원의 메일을 주고받은 것을 계기로 부탁드려봤다. 다행히 선생님이 그 메일을 기억하고 계셨고, 김금희 작가의 팬이라 추천사를 써보겠다고 해주셨다. 간곡히 메일을 썼는데 해주신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무제가 이걸 계속 해도 되는지 묻고 싶었다”
- 시각장애인을 위한 ‘듣는 소설’로 기획한 책인 만큼 종이책을 펼치기 전에 오디오북으로 먼저 <첫 여름, 완주>를 들었다. 일상에서와 달리 <완주:기록:01> 전시의 암전된 공간에서 그 일부를 다시 들으니 촉감이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이런 공간을 꾸려야겠다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었나.
오디오북 녹음을 끝내고 집에서 그 파일을 열어 듣는데 시각장애인분들이 이 소리를 어떻게 느낄지 궁금해지더라. 시각장애인도 각자 보이지 않는 정도가 다르고, 내가 그 시야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을 끄고 방을 깜깜하게 해야 그들과 가장 유사한 상태에서 오디오북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니 소리가 더 잘 들리고 깊이 다가오더라. 이 느낌을 독자들에게도 전해줄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더해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들에게 책을 보여주고, 그들이 책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만든 작품을 전시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기에 두 아이디어를 합쳐 과거 무제에 북토크 행사를 제안한 LCDC 서울과 협업해 전시를 열었다.
- 전시를 위해 일본 나고야까지 가서 도자기를 가져왔다던데.
인스타그램에서 신기한 도자기를 봤다. 알고 보니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 학생의 작품이었다. 그렇게 정하현 도예가의 작업을 지켜보다가 <첫 여름, 완주> 원고를 보내며 작품을 부탁했고, 5월 중순 나고야에 가서 도자기를 이고 지고 왔다. 도자기가 깨지면 안되니 비행기 수하물로도 못 부치고…. 다른 작가들에게도 올해 초 <휴민트> 촬영으로 라트비아에 머무는 동안 원고를 보냈고, 직접 작품을 받으러 다니느라 엄청 고생했다.
- 그림, 사진, 뮤직비디오까지 다 보고 나오니 엽서, 포스터, 키링 등 수많은 굿즈가 펼쳐져 있더라.
책방이나 출판사 굿즈를 작게만 만들어봤지 책 한권에 관한 굿즈를 이렇게 여럿 만들어본 건 처음이다. 그래서 경험이 중요하다. 해본 적이 없으니 전시회 첫날에야 너무 다종으로 굿즈를 만들었다는 걸 알았다. 뭐가 이렇게 많지? (웃음) 너무 많이 깔아놓아서 팬들이 돈을 쓰게 만든 건 아닌지 괜히 죄송스럽고. 절대 대충 하고 싶지 않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 이야기의 본질로 돌아와서, ‘듣는 소설’ 기획 의도가 독자들에게 잘 전해지고 있는 것 같나
그걸 잘 모르겠다. 5월 말에 장애인도서관들에 연락해 잘들 이용하고 계신지 확인을 한번 해볼 예정이다. 우리 책의 첫 북토크를 국립장애인도서관에서 했는데, 그날 굉장히 떨렸다. 독자들이 시큰둥하거나 내가 괜히 오지랖을 부린 것처럼 보이면 ‘듣는 소설’ 시리즈가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두렵더라. 무제가 이걸 계속 해도 되는지 여쭤보고 싶었다. 다행히 그날 반응이 무척 좋아 용기를 얻었다. 장애인도서관 오디오 서비스 시스템이 불편하다는 피드백도 있었는데, 그 시스템에 콘텐츠를 맞추는 것도 우리의 몫이니까 다음에는 권수나 챕터를 나눈다든지,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기획자로서 김금희 작가에게 대사를 많이 써달라는 부탁 외에 더 귀띔한 건 없었나.
배우들이 라디오드라마처럼 연기를 해줄 거고, 음악과 효과음도 쓸 거라는 이야기 정도만 드렸다. 그러자 김금희 작가가 시각장애인분들과 만나고 싶어 해서 오디오 기반으로 독서토론을 하는 시각장애인 동아리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 구간 <살리는 일> <자매일기>에 뾰족한 문제의식이 있었다면 <첫 여름, 완주>는 픽션의 자장 아래 세태의 그림자들을 심어둔 책이다. 소외된 이야기를 들여다보겠다는 무제의 모토를 조곤조곤 실천한 듯하다.
장애인의 독서 환경을 개선해보겠다는 취지로 시작한 ‘듣는 소설’이라는 기획 자체가 출판사의 목표와 닿아 있으니 김금희 작가에게 어떤 내용을 써달라는 요청은 전혀 하지 않았다. 김금희 작가의 소설을 워낙 좋아한 독자로서 이번에도 그의 창작물을 기다렸을 뿐이다. 그런데 김금희 작가는 이번에도 글 쓰는 사람으로서 우리 곁의 소외된 이야기를 절대로 놓치지 못한 것 같다. 또 어떤 작가의 글로 무제의 바람을 이어갈 수 있을지 막연히 기대하는 중이다.
목표는 5인 출판사
- 오디오북 녹음을 위한 섭외부터 연출까지 맡으며 감독 역할을 해본 소감은.
오디오북이 화면 없는 영화이지 않나. 혼자 이 원고를 공부해가며 녹음 중 놓친 부분을 찾아가곤 했다. 배우들이 출연료 없이 재능기부를 해준 것이어서 재녹음을 부탁할 수도 없는 터라 엔지니어와 함께 애쓰며 편집했다. 그때까지는 감독의 마음이었다. 배우들, 엔지니어가 잘하면 뿌듯하고…. 그런데 책이 공개되는 순간 제작자 마인드로 바뀌면서 작품을 열심히 팔아 곳간을 채우고 싶어지더라. 연출과 제작 모두 하는 류승완, 박찬욱 감독님의 마음이 이런 걸까? 이 변화가 스스로도 신기했다.
- 곧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신간 <사나운 독립>을 선보인다. 수백개의 도서전 부스 중 무제만이 배우의 회사일 듯하다.
내가 배우이기 때문에 다른 출판사와 차별화 된 책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없다. 이 직업을 뽐내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다. 물론 <첫 여름, 완주>에는 반칙을 좀 썼다. 다만 배우로서 할 수 없었던 것, 배우이기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들을 무제를 통해 해보고 싶다. 창작물에 대한 권리가 나에게 있으니 전시와 같은 새로운 시도들을 해볼 수 있는 거지. 얼마 전 침착맨 방송에서 들은 ‘인생은 턴제’라는 말에 공감했다. 한번에 여러 개를 못한다는 거다. 영화를 찍을 때는 연기에, 책을 만들 때는 출판사 일에 집중해야 한다. 턴과 선을 지키면서. 나는 출판사 일이 내 본업을 망치려는 징조를 보이면 출판사를 그만둘 각오도 있다. 그런데 이 일이 너무 재밌으니까 그러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번에 무제에 새 직원인 이사님을 모신 거다. 내 목표는 무제에 다섯명의 직원이 생기는 거다. 그래야 내가 휴가를 가도 운영될 수 있는 안정적인 회사가 되지 않을까.
- 이번에는 훌륭한 배우들을 성우로 섭외했다. 언젠가 저자로 섭외하고 싶은 배우가 있나.
지난해에 에세이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을 내기도 한 배우 문상훈의 글을 정말 좋아한다. 그와 같이 책을 만들어보면 정말 재밌을 것 같다.
- <씨네21> 독자들은 당신부터 써주길 바란다. 창간 기념 설문조사에서 독자가 가장 읽고 싶은 필자 1위로 박정민이 꼽혔다.
말이 안된다! 그 기사를 보자마자 욕먹기 딱 좋다고 생각했다. 한강 선생님과 함께 이름을 올리다니. 사실 글을 써서 책을 내볼 계획이 있었는데 글이 잘 안 써진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무서워졌다. 무언가를 보고 그것에 대해 쓸 수는 있겠지만 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일기를 쓰고 금고에 넣어버리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과연 다시 쓸 수 있을지 지금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