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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찾아온 배우들의 책
남선우 2025-05-29

배우는 여러 번 산다고들 한다. 하나의 배역을 한번의 인생이라 친다면 그럴 수 있겠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살아본 만큼 죽기도 하지 않나. 연기한 만큼 숨쉬고, 작품이 끝날 때 사라지며 여러 죽음을 겪는 게 아닐까. 달리 말하면 배우는 여러 번 죽어야 산다. 그러나 이런 웅장한 비유는 곧장 허무해진다. 배우도 사람이다. 빤한 대사가 차라리 혜안에 가깝다. 결국 배우를 우상화하는 것과 범인으로 보는 것 모두 관객의 오랜 습관에 불과하다. 영화기자도 다르지 않다. 탁월한 배우 앞에서 질문해야 할 입이 잘 떨어지지 않거나, 그가 악수를 청하는 손을 감히 잡아도 되는지 헷갈리곤 한다. 반대로 언젠가 통화로 인터뷰한 배우는 급히 설거짓거리를 처리하는 소리, 짜증내는 아이를 달래는 소리까지 수화기 너머로 공유해준 적이 있다. 멋쩍은 웃음을 덧붙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 공백 덕분에 실감했다. 배우도 생활인이라고.

배우를 향한 양가적 시선을 인터뷰보다 더 통렬하게 일깨우는 건 배우들의 글이다. 그들이 한 말을 옮긴 글이 아닌 그들이 직접 쓴 글이면 더 좋다. 얼마 전 내 마음을 도끼처럼 찍어 내린 책 <나는 탄원한다 나를 죽이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가 그랬다. 이 책은 배우 김수미의 유작이다. 그가 1983년부터 쓰기 시작해 2024년 10월 숨을 거두기 전까지 붙잡고 있던 일기를 그와 요리책을 냈던 출판사 용감한까치가 엮었다. “책이 출간된 후 가족에게 들이닥칠 파장이 두렵다”는 저자의 우려가 적혔을 만큼, 책은 늪처럼 질고도 짙다. <전원일기> <안녕, 프란체스카> <마파도> 등 대표작들에 얽힌 뒷이야기는 일부다. 촬영과 촬영 사이 그를 괴롭힌 크고 작은 사건들, 그러니까 돈과 사람 때문에 벌어진 지리멸렬한 삽화들이 생선 가시처럼 이 책에 박혀 있다. 들켜선 안되었던 연모의 기억까지도. 죽음 후에야 읽히기 시작한 한 여자 배우의 생은 더 많은 독자를 만나야 한다.

<나는 탄원한다 나를 죽이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가 세상에 나오고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또 다른 여자 배우들의 책도 책장에 꽂았다. 김수미에게 일기가 있었다면 진서연에게는 SNS가 있었다. 지난 2월 그가 SNS에 올린 사진과 단문을 모아 만든 책 <견딜겁니다>가 그 결과물이다. “봄도 질투할 만큼 만개할 꽃이 될 것”이라 다짐했던 날들의 “전투일지”는 연기자를 지망하는 이들뿐 아니라 각자의 희망을 안고 사는 독자들을 위로한다. 그리고 두달 뒤, 배우 김지호는 자신이 위로받았던 경험을 적어 작가로 데뷔했다. 그는 자신이 “준비되지 않은 배우”인 것 같다는 불안으로 인해 본업과 거리를 두며 요가에 몰두했던 한때를 <마음이 요동칠 때 기꺼이 나는 혼자가 된다>라는 제목으로 요약했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틀 안에서 평생을 살았기에 나도 자기검열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고백하지만 끝내 “달라지는 나를 고요히 만나고 받아들인다”고 고개를 숙이는 이 책은 자신에게 <파타>라는 정체성을 부여하며 삶을 재해석한 배우 문가영의 산문집도 떠올리게 한다.

‘배우의 책’이라고 하면 이렇게 내밀한 에세이가 주로 연상되지만 기꺼이 소설가가 된 배우들도 있다. 톰 행크스의 <그렇게 걸작은 만들어진다>, 매슈 매코너헤이의 <꼭 그런 건 아니야>처럼 말이다. 전자는 영화인의 경력을 반영한 장편소설이고, 후자는 어린이를 위해 쓴 동화지만 언뜻 두 제목이 서로 대화하는 것처럼 읽혀 피식 웃게 된다. 한편 최근 한국에서 가장 활발히 집필 중인 배우-소설가는 바로 차인표가 아닐까. 그는 근 5년간 세권의 소설을 발표했고 그중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은 지난 4월 15만부 기념 에디션으로 새 옷을 입었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를 담은 이 책으로 많은 주목을 받은 그는 자신의 글을 영상화하는 꿈도 꾸고 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배우 김신록이 인터뷰어가 되어 연기를 업으로 삼은 이들을 대면한 기록 <배우와 배우가>, 배우 김지석이 아끼는 세계 시를 추린 시집 겸 에세이 <새벽 입김 위에 네 이름을 쓴다>와 같이 독창적인 기획도 계속해서 접하고 싶다. 관객이자 독자로서, 앞으로도 배우를 한명의 동료 인간으로 마주하고 싶으니까. 그러니 염치없지만 바라본다. 그들 자신이 아닌 캐릭터들을 통과하며 새긴 나이테가 그들 자신의 뿌리까지 단단히 해주기를, 그 성장기를 책이라는 나무에 옮겨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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