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을 여러 차례 밟은 사업자 자자 코다(베니치오 델 토로)가 택한 것은 세상으로부터 은신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인의 후임을 정해 일생일대의 프로젝트인 ‘코다 육해상 페니키안 기반시설 사업’(이하 페니키안 사업) 진척을 서두르기로 한다. 슬하엔 9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이 있고 그중 딸 리들(미아 트리플턴)과는 수년간 소원하게 지냈다. 수련 수녀인 리들에게도 아버지의 재력이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리들은 자자 코다가 세 부인 중 한 사람인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했다고 의심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곁에 남아 어머니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한다. 한편 외부의 방해로 자자 코다의 페니키안 사업은 재정적으로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다. 자자 코다는 사업 투자자들을 일일이 방문해 이전에 합의한 사항보다 적은 이익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해 자금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이 위험천만한 여정에 리들과 개인 교사 비욘(마이클 세라)을 동행시킨다.비행기 격추 사고에도 불멸의 존재처럼 살아남는 자. 스파이 장르의 주인공처럼 강렬하게 등장한 것과 별개로 자자 코다에 관해 공개된 정보는 제한적이다. 20세기 초 미국의 철도왕, 해외 석유 재벌들을 연상시키긴 하나 그가 어떤 식으로 부를 축적해왔으며, 해당 사업의 후임자로 리들을 택한 이유 등은 영화 초반부터 베일에 싸인 채 전개된다. 그렇기에 사업가(자자 코다), 수녀(리들), 과학 교사(비욘)라는 독특한 구성의 팀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세 사람이 화물선과 수력발전댐, 사막의 호텔, 나이트클럽과 같은 장소를 경유하며 미국의 해운 재벌 마티(제프리 라이트), 자자 코다의 육촌 힐다(스칼릿 조핸슨)와 동생 누바르(베네딕트 컴버배치) 등을 만나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이 차례로 그려진다. 이는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장을 분리해 병렬적으로 소개한 것과 유사하다. 자자 코다는 크기, 형태가 제각각인 신발 박스에 비밀리에 보관해둔 사업가들의 정보를 순차적으로 꺼내 보이는데 에피소드별로 사업가들의 외형과 배경, 스타일을 다르게 설정하기 위해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인다. 정교한 미장센을 선호하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특색이 온전히 반영된 구성이다.
그러나 사업가들과의 협상만큼이나 <페니키안 스킴>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자자 코다와 리들의 관계 회복이다. 암살 시도로 인해 죽을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자자 코다는 천국에서 눈을 뜬다. 블랙코미디물처럼 연출된 천국에 반복해 발을 들이면서 자자 코다에게도 변화가 온다. 오랫동안 세계를 주름잡아온 콧대 높은 자본가가 자신 역시 필멸자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하고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골몰하게 된 것이다. 본래 자자 코다의 모토 중 하나는 “방해가 되면 처리해버린다”는 것이지만 그렇게 힘들게 부를 축적해도 주위에 남은 이가 아무도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 후반부로 갈수록 자자 코다와 리들은 서서히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페니키안 스킴>은 과거와 현 시대의 재벌 및 자본가의 특성을 반영해 자자 코다라는 인물을 완성했으나 그의 불법적인 행동에 가치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적절히 유희의 도구로 활용하고, 빈틈을 만들어 가족을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킬 여지를 둔다. 변모해가는 자자 코다와 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베니치오 델 토로 외에도 신예 미아 트리플턴의 미래를 기대하게 된다. 전작과 비교해 차별점은 없지만, <페니키안 스킴>은 웨스 앤더슨 감독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족’이라는 주제에 관해 논의를 펼치는 영화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후 웨스 앤더슨의 진가를 깨닫게 하는 영화”(<할리우드 리포터>)라는 찬사를 받으며 <페니키안 스킴>은 칸영화제에서 6분이 넘도록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더 현실적으로, 더 화려하게
<페니키안 스킴>은 로케이션 촬영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신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미니어처 시퀀스를 촬영했던 독일의 바벨스베르크 스튜디오에서 촬영됐다. 가장 공들여 제작된 세트 중 하나는 자자 코다의 집이었다. 미술감독 애덤 스톡하우젠은 “사업가 칼루스트 굴벤키안의 파리 저택과 베네치아의 한 팔라초를 레퍼런스로 삼았”으며, 자자 코다 집의 입구에 위치한 갤러리를 준비할 때에는 “베를린 주변의 성과 빌라를 돌아보며 정교하게 그려진 트롱프뢰유 대리석 벽과 기둥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전한다. 또한 자자 코다의 집에 놓인 명화와 예술품들은 미술관에서 직접 대여한 것이다. 가령 르누아르의 그림은 나흐마드 컬렉션, 마그리트의 그림은 피에츠쉬 컬렉션 소속의 작품들이며 그 밖의 작품들은 함부르크 쿤스트할레에서 대여했다. 제작진의 노력으로 예술품과 골동품, 자연물 표본 수집에 관한 자자 코다의 집착과 방대한 컬렉션은 성대하게 완성됐다.